제4승지 남원 (4)

남원의 가볼만한 곳①

 

• 광한루원

광한루원은 경복궁 경회루의 지원과 전남 담양군에 있는 양산보가 조성한 소쇄원과 함께 한국의 정원을 대표할 만큼 우수하며 독특한 조경양식이 탄생하는 모체가 되고 있다.정원의 사상적, 역사적 배경은 자연적 사고방식 즉, 신선사상과 음양오행사상, 풍수지리사상 또는 수심양성의 도로 표현되는 송, 죽, 국, 매의 사절과 유교의 선비사상이다. 그중에서도 신선사상이 가장 크다고 볼 수 있으며 이러한 신선정원의 양식은 생성시기인 조선시대의 제도적인 원인에 기인하여 유교문화가 지방으로 분산되면서 형성되었다.옛적 우리 조상들은 자연에 순응하고, 자연을 거슬러서는 안 된다는 생각으로 조성에 세심한 배려를 하여 신선이 사는 이상향을 이 땅에 건립하고자 하였으며, 이러한 생각은 분합문을 달아 열어놓고 지내어 건물이 탁 트이게 처리하였다. 또한 누원 앞에 호수는 은하를 상징하도록 하여 하늘의 옥황상제가 사는 곳처럼 꾸며서 월궁의 광한청허부와 같다고 한 광한루라는 이름을 얻게 되었다. 정원은 인공적인 멋을 가리지 않고 토양 구릉을 자연 그대로 살렸으며, 드문드문 자연석 고인돌을 구릉에 그대로 놓아 작은 언덕 공간처럼 하고, 정원수도 전지를 하지 않고 자연 그대로 자라도록 하여 흡사 숲속에 있는 착각이 들게 한다. 이러한 연유로 건축기술과 사회상, 생활, 이상향 등 당시의 문화를 이해하는 중요한 명승지로 높이 평가되고 있다.현재의 누원 모습은 누원 근처 시장이 불타고 옮긴 것을 비롯하여 수차례 확장 사업을 하면서 차례로 근처의 부지를 매입하여 오늘에 이르게 되었다.

광한루원은 근세 전기에 조영된 대표적인 정원으로 꼽히고 있는데 한국의 독특한 조경양식이 탄생하는데 모체가 되고 있으며 정원을 대표할 수 있을 만큼 질적으로 우수하고 통시대적 문학사에 나타난 정원양식을 표현하고 있어 전통예술을 계승 발전시키는데 중요한 몫을 차지하고 있을 뿐 아니라 문화재적 가치가 있다.광한루원 앞에는 동서 100m, 남북 59m에 이르는 정방형의 호수와 호수 속의 3개의 섬(삼신산), 그리고 서편에 4개의 홍예로 구성된 오작교로 구성되어 있다. 오작교는 평교지만 교각의 형태가 원형으로 된 홍예교로 누정원을 구성하는 구성물의 일부로 처리되어 있는데 직선적이고 평탄한 노면에 율동감을 주어 경관의 아름다움을 더해주는 요소로서의 가치를 지니고 있으며 호수에 직녀가 베를 짤 때 베틀을 고이는 돌인 지기석을 넣고 견우가 은하수를 건널 때 쓰는 배인 상한사를 띄워 칠월 칠석의 전설의 은하수와 오작교를 상징한다.

[광한루원]
[광한루원]

 호수는 현재 상태에서 1:2의 비를 갖는 장방형으로 축조되어 있으며 그 안에 3개의 섬이 동서방향으로 거의 같은 간격으로 배치되어 있으며 호수 북쪽 광한루 앞에는 돌 자라가 동남방향으로 향해 놓여 있어 신선사상에 입각한 지킴이의 기능을 갖고 있어 전체적으로 광한루원의 구성은 넓은 은하세계, 즉 천체우주를 상징하고 있다.

광한루는 원래 1419년 황희 정승이 남원으로 유배되어 왔을 때 "광통루"란 작은 누각을 지어 산수를 즐기던 곳이다.

이후 세종 26년(1444)에 하동 부원군 정인지가 이곳의 아름다운 경치에 반해 달나라 미인 항아가 사는 월궁속의 '광한청허부'를 본따 '광한루'라 바꿔 부르게 되었다.

광한은 달나라 궁전을 뜻한다. 춘향과 이몽룡도 바로 이곳에서 처음 만나 사랑을 맺게 되었다. (보물 제 281호)

위치 : 전라북도 남원시 요천로 1447번지(천거동)

규모 : 241.81㎡

본루 : 정면5칸, 측면4칸 팔작지붕 루 마루집

익루 : 정면3칸, 측면3칸

월랑 : 정면1칸, 측면3칸

조성년대 : 1419년 황희 광통루 축조

1434년(세종 16년) 부사 민공 중수

1437년(세종 19년) 부사 유지례 단청

1444년(세종 26년) 정인지 광한루 개칭

1582년(선조 15년) 부사 장의국 대규모 개수

1597년(선조 30년) 정유재란 때 불탐

1599년(선조 32년) 부사 원신 재건

1626년(인조 4년) 부사 신감 중수

1855년(철종 6년) 부사 이상억 중수

1879년(고종 16년) 부사 이용준 월랑 설

1931년 군수 백정기, 남원면장 양재영 및 진사 이수봉 등이 보수 완료

 

이 건물은 조선조 초기의 재상이었던 1419년 황희(黃喜)가 남원에 유배되었을 때 누각을 짓고 광통루(廣通樓)라 하였다. 그 후 1434년 세종 16년에 남원부사 민공이 중수하고 당시 충청 전라 경상 삼도 순찰사였던 하동부원군 정인지가 이 누에 올라 경관을 감상하다가 “오호라 호남에서 가장 뛰어난 경관은, 나의 고향의 경승을 감상하게 되면 나의 고향보다 나은 곳이 없고, 더욱이 이곳 광한루보다 나은 곳이 없더라'용성지(龍城誌)'고 했다. 또 일설에는 ”호남의 승경으로 달나라에 있는 궁전 광한청허지부가 바로 이곳이 아니던가“하고 감탄하여 그 후 광한루로 개칭되었다. 그러나 이때의 건물은 1597년 정유재란으로 인해 불타고 현재의 건물은 1626년 당시 남원부사인 신감(申鑑)이 복원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광한루의 앞뒤에는 ‘호남제일루(湖南第一樓), 계관(桂觀), ’광한루(廣寒樓)란 편액이 걸려있다. 호남제일루라는 말 그대로 호남에서 제일가는 누각이라는 뜻이며, 광한과 청허부는 하늘나라 월궁의 옥경에 들어서면 ‘광한 청허지부’가 있다는 신화적 전설을 상징하고, 계관은 달나라의 계수나무 신궁을 상징한다. 광한루 누각에 걸린 여러 편액중 광한루란 편액은 신익성이 호남제일루와 계관의 편액은 1855년 남원부사 이상억이 누각을 중수하면서 손수 써 걸었다. 이 중 계관의 편액은 동학란 때 없어진 것을 1930년대 광한루를 대대적으로 보수할 때 남원유지 강대형이 다시 써 건 것이다. 또한 현재 광한루에 걸린 광한루란 편액은 전민의원 조정훈이 쓴 글씨라고 하는데 금암봉의 금수정과 용성관의 편액 글씨도 썼다고 전해온다.

1879년 광한루가 차츰 북쪽으로 기울어져 이를 방지하기 위해 루의 북쪽에 다락(월랑)을 세워 층층대를 만들어 놓았다. 북쪽의 층층대는 1877년(고종14년)에 부임한 남원부사 이용준이 광한루가 퇴락하여 본관 전체가 북쪽으로 기울어져 무너질 우려가 있어 수지면 고평리에 사는 추(秋) 대목의 묘안을 받아들여 북쪽에 누를 오르내리는 계단을 만들되 본관과 같이 아름드리 기둥을 세워 튼튼하게 고정시켜 본관의 기울음을 바로 잡고 외관으로도 더 화려하게 하였다. 이는 우연하게도 누각 건축사상 큰 의의를 가지게 되는데 그것은 우리나라 누각에 월랑을 가설하게 된 시초이며 이전까지는 누상을 오르내리는 사다리만 설치하였다.

남원은 춘향의 고향이자 고전 춘향전의 발상지다. 서양에 로미오와 줄리엣이 있다면 우리에겐 성춘향과 이몽룡이 있다. 옛날 사람들은 참 성적으로 빨랐다. 방년의 나이면 16세다. 지금으로 치면 부모의 속을 꽤나 썩이는 문제아들이다. 우리 민족에게 영원한 사랑의 지침서 역할을 해오던 춘향전은 지금 아무런 효용이 없다. 남원의 풍요로운 마음과 정절의 풍습이 있었던 시대이기에 가능했던 이야기다. 문화, 도덕, 관습은 시대에 따라 변한다. 가족과 결혼의 개념도 달라졌고 가족과 결혼의 해체는 무서운 속도로 빨라지고 있다. 춘향전의 배경으로 유명한 광한루원은 우리 선조들이 자연에 순응하고 자연을 닮고자 하는 생각을 표현한 공간으로, 신선이 사는 이상향을 건설한 조선 시대의 대표적인 정원이다. 하늘나라 월궁을 ‘광한루’라 했고 그 아래에 천상의 은하수를 상징하는 호수와 오작교를 놓았으며 신선들이 산다는 전설 속의 삼신산을 연못 가운데 조성해 전체적인 구성이 천체 우주를 상징한다. 이외에도 완월정, 춘향사당, 춘향관, 월매집, 그네, 전통놀이 체험장 등 오랜 역사와 더불어 다양한 볼거리와 체험을 해볼 수 있다.

 

 

김덕기 법학박사/부동산학박사

 

- 연세대학교 이학사

- 성균관대학교 문학 석사

- 건국대학교 부동산학 석사·박사

- 동국대학교 법학 박사

- 전) 법무법인 하우 부동산·금융 수석 전문위원

- 전) 동국대학교 법학대학 일반대학원 겸임교수

- 현) 건국대학교 부동산 대학원 겸임교수

- 현) 부동산포털 한국도시환경헤럴드 발행인

- 현) 법률사무소 두남 고문

- 현) 주식회사 두남씨앤디 대표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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