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PPLE_OF MY EYE / HAPPY_END :: 스메야展

SMEYA Solo Exhibition :: Painting

 

 

▲ 스메야, 십이간지5-1, 2022

Oil on Canvas, 90.3 x 90.3cm

 

 

 

작가 ▶ 스메야(SMEYA)

일정 ▶ 2024. 01. 25 ~ 2024. 02. 20

관람시간 ▶ 11:00 ~ 19:00(월요일 휴관)

∽ ∥ ∽

호아드 갤러리(HOARD GALLERY)

서울시 종로구 율곡로 54-3

02-725-1204

www.instagram.com/hoard_official

 

 

● 서정적 풍경, 그리고 무구한 숲에 관한 보고서

신항섭(미술평론가)

 

그림은 작가가 세상과 마주하며 무엇을 보고 있느냐에 관한 시각적인 표현이다. 세상을 환희의 땅으로 보면 아름다운 표현이 나오고, 세상을 고통의 시간으로 받아들이면 어두운 정서가 지배하는 그림이 되기 십상이다. 그림은 곧 감정의 표출이자 표현이기에 그렇다. 의식이 감정을 제어한다고 할지라도 어느 틈에선가는 감정이 비어져 나와 그림을 정서적으로 물들이게 된다. 한마디로 아름다운 그림은 긍정의 논리를 이끄는 순기능에 봉사한다.

스메야의 요즘 그림은 세상을 향한 아름다운 제안이자 메시지라고 할 수 있다. 자연과 동물이 공존하는 숲을 무대로 하는 그의 그림은 초록의 세상에 관한 보고서일 수도 있다. 초록은 생명의 근원 또는 원시성과 같은 의미로 받아들인다. 자연의 상징색이 다름 아닌 초록이라는 데서 알 수 있듯이 생명의 본원으로서 해석되기도 한다. 초록은 시각적인 측면에서 풀과 나무를 아우르는 숲에 일치한다. 그가 초록과 숲을 매개로 하여 작업하는 건, 이처럼 생명의 근원에서 파생하여 다양한 형태로 우리 삶에 영향을 주는 자연의 이치를 따지려는 데 있다. 그 대상이 누구이든 자연의 모습을 적나라하게 드러냄으로써 그로부터 일어나는 여러 시각적인 이미지 및 정서를 살피고자 한다. 다시 말해 그 안에서 일어나는 여러 자연현상을 객관적인 시각으로 살피려는 것이다.

그가 사실적인 기법을 택한 건 주관성을 배제한 객관성을 담보하기 위해서일 터이다. 눈에 보이는 사실을 그대로 전함으로써 누구나 그곳에 가 있는 듯한 기분에 사로잡히게 되는 게 사실적인 그림의 목표이다. 내가 아닌, 타인의 눈을 빌어 바라보는 자연풍경은 간접적임에도 때로는 실제보다 더 큰 감흥과 감동을 불러일으킨다. 그림이 가지고 있는 힘이 바로 여기에 있다. 이는 화가의 눈이라는 또 다른 형태의 렌즈를 통해 바라보는 세상이라는 얘기다. 화가가 들여다보는 세상 풍경은 무엇이 다른 걸까.

그의 그림이 말하고 있듯이 실재하는 숲의 이미지라고는 하지만 작업 과정에서 많은 부분이 재해석된다. 여기에서 선택적이라는 단어가 필요한데, 이때 화가는 일반인과는 다른 미적인 태도를 견지한다. 미적인 태도란 미의식과 미적 감정이 개입된 조형적인 시각을 말하는데, 이 과정에서 많은 일들이 일어난다. 그가 취하는 물상이나 공간은 그 자신이 추구하는 이상적인 조형미를 위한 선택이다. 선택적인 상황이 다름 아닌 실제와 그림의 차이가 만들어지는 요인이다.

이렇게 시작된 그림은 작업 과정을 통해 주관성이 개입되면서 객관성을 해치지 않는 범주 내에서 자유로운 조형적인 해석이 덧붙여지게 된다. 가령 실제를 빙자한 동물의 등장이 그 하나의 예이다. 어쩌면 사슴과 같은 동물은 숲속에 산다는 점에서 당연한 일이 아니냐 싶지만, 자세히 보면 숲속에 서 있는 게 아니라, 그림 속의 숲에 존재한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숲이라는 공간에 자연스럽게 살아가는 존재로서의 이미지가 아니라, 어디선가 들어와서 그냥 존재하는 듯이 보이는 것이다. 달리 말하면 숲이라는 공간에 초대된 존재인 셈이다. 한마디로 자의적인 구성을 통해, 사뭇 의도적인 상황이라는 사실을 숨기지 않는다. 숲이긴 해도 그 안을 들여다보면 조그만 개울물이 흐르고 있다. 그 개울물에서 살아가는 수많은 수생식물과 동물들이 존재함으로써 초록의 숲이 존재하게 된다.

이번 전시에는 ‘십장생’ 연작을 비롯하여 ‘나의 십장생’, ‘십이간지’, ‘슬립 Sleep’, ‘보여도 보이지 않는’으로 이어지는 모두 다섯 주제에 의한 연작으로 꾸민다. 이들 연작은 서로 다른 명제를 가지고 있으나, 숲을 기반으로 한다는 공통점이 있다. 그에게 숲은 자신의 조형 세계를 펼치는 텃밭이다. 거기에 여러 가지 이야기를 도입하여, 옥답으로 만드는 과정이 창작활동이다. 그 이야기에는 일상적인 삶에서 일어나는 개인사적인 에피소드가 함께 한다. 그러면서 십장생이나 십이간지는 전통적인 삶을 되돌아보자는 자의식 또는 주체적인 의지를 수반한다.

숲을 제재로 하는 일련의 여러 형식은 사실 묘사를 축으로 하면서 실제와 다른 회화적인 공간으로서의 가치를 지향한다. 재현적인 기법을 취하고 있으나, 전통적인 사실주의 미학과는 다른 점이 적지 않다. 원근법 및 명암기법을 크게 개의치 않으면서도 눈앞에서 보고 있는 듯싶은 실제적인 공간감이 명확하게 표현된다. 이는 생동감, 즉 눈부신 생명력을 증폭시키는 요인으로 작용한다. 풀과 나무 사이로 은밀히 흐르는 생명의 기운을 감지할 수 있을 것만 같은 착시현상을 가져온다.

그런가 하면 고래로부터 면면히 이어져 온 우리, 즉 한민족이라는 공동체의 삶의 가치 및 정서를 돌아봄으로써 자칫 시각적인 이해만을 좇는 현실과 다른 길을 가겠다는 의지의 표명이다. 자연과 숲을 우리의 전통적인 삶의 대입하는 건 무엇을 의미하는 걸까. 전통적인 삶에는 오랜 세월 축적된 의식 및 정서가 배어있다. 그가 제재로 삼는 십장생이나 십이간지는 동양 사상인 음양오행을 기반으로 하는 생활철학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장수하는 열 가지의 자연 물상이라는 십장생을 그림의 소재로 하는 건 오랜 수명을 염원하는 차원이다. 십장생의 의미가 그렇듯이 자연 속에서 장수하는 열 가지 물상을 그림 속에 도입함으로써 인간의 영속적인 욕망인 장수에 관한 꿈을 되살려준다. 무구한 자연에서 살며 주어진 생명을 탈 없이 소진하는 십장생의 태도를 꿈꾸자는 것인지 모른다.

다른 시각에서 보면 그가 제시하는 십장생은 민화의 십장생도와 같은 의미를 공유한다고 할 수 있다. 다시 말해 현대판 십장생도라는 의미로도 해석된다. 물론 한 화면에 열 가지의 십장생이 함께 하는 민화적인 완벽한 구성은 아니다. 그렇더라도 십장생 몇을 한 화면에 등장시킴으로써 그가 의도하는 바는 충분히 전달된다. 여기에는 ‘나의 십장생’이라는 명백한 명제가 제시되고 있기 때문이다.

‘십이간지’를 소재로 하는 일련의 연작 또한 ‘나의 십장생’과 마찬가지로 전래의 동양 사상에 근거한다. 십이간지는 하루를 12시간으로 나누고, 그 시간마다 동물 하나씩 배치하여 하늘과 땅을 지키는 수호신으로 삼았다는 데서 유래한다. ‘십이간지’를 ‘십이지신’이라고 부르는 것도 이에 연유한다. 이러한 의미가 담긴 십이간지를 숲의 이미지에 끌어들여 전통과 현대가 공존하는 세상을 표현한 게 ‘십이간지’ 연작이다. 십이간지가 존재하는 곳이 숲이다. 초록의 숲에서 실상의 모양을 그대로 노출하기도 하지만, 때로는 석상과 같은 형태로 가공된 상태의 이미지로 등장하기도 한다. 시간과 공간이라는 개념을 없앰으로써 과거와 현재, 전통과 현실의 간극을 메우고자 한다. 다시 말해 전래의 사상 및 철학적인 의미가 현대 또는 현재로 이어지는 상황을 제시한다. 숲 곳곳에 출몰하는 십이간지는 초록과 대비되면서 유머러스한 모양으로 보이기도 한다. 재미와 웃음을 유발하는 것이다. 바꾸어 말해 의외성이 지어내는 시각적인 쾌감이 있는 것이다.

‘슬립 Sleep’ 연작은 일테면 수면제와 같은 기능을 기대하는 작업이다. 그 자신의 존재를 숲속에 밀어 넣는 건, 마냥 평온한 숲의 기운이 우리에게 어떤 효험을 가져오는지에 대한 물음이자 답이다. 숲이 주는 혜택을 직접 몸으로 받아들임으로써 실증하려는 건지 모른다. ‘수면’은 심신의 치유에서 최상위 개념에 자리한다. 단지 숲속에 서 있는 것으로 그 숲의 기운에 젖어 들어 숲 자체가 되는 신기한 경험을 말하려는 건지 모른다. 무구한 물과 공기와 온갖 소리는 그대로 심신의 정화를 의미한다.

평화와 평온, 휴식, 치유, 정화, 평안, 위안 등 긍정의 논리만이 지배하는 숲은 그야말로 생명의 본원이다. 단지 거기에 존재하는 것으로 생의 참된 의미를 일깨우게 되면서 동화되기를 바란다. 현실적인 모든 걸 내려놓고, 자연 그대로의 상태로 자신을 되돌려 놓는 시간에 관한 명상의 시이다.

‘보여도 보이지 않는’ 연작은 존재하는 물상에 대한 비틀기라는 조형어법을 구사한다. 형태를 길게 늘어뜨려 왜곡시키는 비정형의 미를 추구한다. 자코메티 조각을 연상케 하는 비현실적인 형태 해석 그 한 가운데 자신이 서 있다. 여기에서는 회화와 입체작업을 병행하는데, 어느 쪽이든 비현실적으로 기다랗게 늘여 놓은 인물상의 존재가 이채롭다. 이목구비는 물론이려니와 팔다리조차 분별할 수 없는, 젓가락 같은 인물이 지어내는 시각적인 이미지는 충격적이다. 비정형이어도 그 정도가 심하게 느껴질 정도이다. 하지만 이런 형태 해석은 조형이라는 예술창작의 결과물이라는 사실과 마주하면 되레 미적 쾌감을 느낄 수 있다. 비정형의 조형언어는 인물에 국한하지 않고 숲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숲에서는 떨림 혹은 리듬을 수반하는 선이 동심원을 연상케 하는 이미지로 흘러간다. 선은 구체적인 형태를 지우는 대신에 생명의 힘을 촉발케 한다. 율동미를 동반하는 동심원을 닮은 선의 흐름에서 조형의 묘미를 즐길 수 있다. 이러한 조형적인 특징은 개별적인 형식의 가능성에 맞닿아 있다.

 

▲ 스메야, 동화책 보는 소녀, 2023

Oil on Canvas, 45.5 x 53cm

 

▲ 스메야, 웃고있어, 2021

Oil & Mixed Media on Canvas, 72.7 x 116.8cm

 

▲ 스메야, 반박자, 2022

Acrylic on Canvas, 90.5 x 73cm

 

작가노트 | 볼, 見(현) - apple_of my eye & happy_end

취향과 성향은 겪어 온 환경 안에서 만들어진다. 보편적으로 생각하던 그것이 보편적인것이 아닐 수도 있으며, 문제를 앞에 두고도 문제라고 느끼지 못할 수도 있다. 눈앞의 사실성이 보이지 않을 수도 있다.

희망은 삶의 철학 안에 담겨 진 삶의 그림자이며 방향이다. 보편적 소망을 통하여 본 사회는 매우 개인적이고 직설적이다. 이를 십장생, 십이간지와 같은 공통적 욕구와 염원을 가지고 우리의 일상에서 찾게 되는 소재를 통하여 심연의 원초적 자유를 함께하는 시선과 이해로 바라보고자 탐구하고자 한다.

우리의 이마고는 우리의 취향과 습관에 의해 형성된 환경, 세계 속에서 만들어져 작용한다. 우리의 바램과 그에 따른 욕구들은 사회의 보편성을 보여 준다. 이를 데페이즈망을 이용한 세계를 구현하여 보려 한다.

 

▲ 스메야, 나의 십장생 3

Acrylic on Canvas, 80.3 x 80.3cm

 

▲ 스메야, 나의 십장생 6

Acrylic on Canvas, 80.3 x 80.3cm

 

▲ 스메야, 공존, 2024

Oil & Mixed Media on Canvas, 90.1 x 90.1c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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