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지혜展

Ha Jihye Solo Exhibition :: Painting

 

 

 

▲ 하지혜

 

 

 

작가 ▶ 하지혜(Ha Jihye)

일정 ▶ 2024. 01. 23 ~ 2024. 02. 19

관람시간 ▶ 00:00 ~ 2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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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트허브 온라인 갤러리(ARTHUB Online Gallery)

온라인 스페이스(Online Space)

arthub2@naver.com

www.arthub.co.kr

 

● 치유와 안식의 자연미학

이성석(남가람박물관장, 미술평론가)

 

1

21세기라는 초현대사회에 접어들면서 가속화된 사회전반의 구조적 해체는 이 전 세기말에 겪었던 해체와는 확연히 다른 의식적 양태를 보이고 있다. 그것은 근대이후 20세기말에 이르는 해체는 부도덕과 비윤리 혹은 비상식과 반사회적인 인식이 강했다면 지금은 어떠한가. 인간자체의 독립적 존재감과 존엄, 그리고 그에 수반되는 자유의지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하여 이것이 더 이상 부도덕하거나 반사회적인 것이 아님이 되었다. 그러나 예나 지금이나 이러한 관계의 해체를 통해 겪어내어야 할 고통과 시련은 한 사람의 인생 전체를 흔들만한 파괴력을 지니고 있다. 뿐만 아니라 그러한 해체로 인해 삶에 대한 모호한 경계의 폭은 훨씬 더 넓어져 있다. 경계의 폭이 넓어질수록 방황의 늪도 넓어지는 것이며, 이러한 방황은 판단력 부재라는 부작용을 낳는다.

필자를 포함한 50%에 육박하는 수많은 사람들은 해체이전의 결합적인 상황으로부터 촉발된 이러한 경험을 갖고 있다. 이러한 경험은 또 다른 경험을 양산하고, 삶에 대한 고통과 시련의 두께를 강화하며 현대인으로서의 강력한 인내와 지혜를 요구하는 것이 작금의 사회현실이다.

그것을 겪어내는 사람이 예술가라면 어떨까. 20세기 세계최고의 예술가로 등극한 피카소와 영국의 문호 오스카 와일드는 ‘예술은 슬픔과 고통을 통해 나오는 것이며, 그 슬픔과 고통은 인간이 가질 수 있는 정서 가운데 최고의 것이고, 동시에 모든 예술의 전형이요, 시금석’이라 했다. 고통스러운 슬픔으로 가슴에 상처를 입고, 슬픔에 마음이 혼란스러울 때, 예술은 은빛 화음으로 빠르게 치유의 손길을 내미는 법이다. 뿐만 아니라 깊은 고뇌와 비밀스런 탐색, 비밀스런 회환이 없이는 성숙에 이를 수 없다. 그래서 우리는 고통에서 도피하지 않고, 고통의 밑바닥이 얼마나 감미로운가를 맛보아야 한다. 이러한 고통은 인간을 생각하게 만들고, 생각은 인간을 지혜롭게 만들며, 지혜는 인간을 인내하게 만드는 것이다. 그러한 고통의 바로 한가운데에는 아무리 심한 고통도 와 닿지 않는 피안지대가 있다. 그리고 그곳엔 일종의 기쁨이 자리 잡고 있는 것, 그것이 어쩌면 예술의 도달점내지는 쉼터가 아닐까.

그림으로 자신의 삶을 피력하고자 하는 작가 하지혜, 그는 필자가 전술했던 상황 즉 시대와 사회가 만들어낸 여건에 고스란히 노출된 채 어딘가에서 많은 것을 삼켜내었다. 그것이 오늘날 화가 하지혜의 존재이유이다. 그러한 존재가치는 자신의 경험체계 속에서 비롯된 견딜 수 없는 충동에 의해서 예술이라는 이름으로 발현되어 지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마치 자신의 삶이 학문과 예술의 관계처럼 폐와 심장의 상조에 의해 안정의 자리에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는 이제 예술가로서 예술 중의 예술, 표현의 찬연한 아름다움, 그리고 그림의 빛에서 발하는 광휘로움을 단순과 담백이라는 이름으로 토해낼 것이다. 이로써 모든 예술의 궁극적 목적인 살만한 가치를 일깨우고, 그것으로부터 더 없는 위안을 받게 될 것으로 보인다.

뿐만 아니라 자신의 내적인 의미를 보여주는 꿈의 세계를 향해 미지로부터 앎에 도달하게 될 것이다. 그의 그림에 나부끼는 풀과 나무와 구름, 하늘도랑의 여울 속에 깃들어 있는 음악이 세상 사람들의 귓가에 다가가고 있는 것처럼......

작가 하지혜는 시공을 초월한 개념적 정원을 그리는 작가이다.

정원으로서의 하늘은 이 작가가 지향하는 아름다운 세상에 대한 희망적인 메타포이며 대안이다.

이러한 메타포는 소통과 치유라는 과정에 대한 이야기로써 정원을 구성하는 요소들의 끊임없는 변화는 곧 생성과 소멸의 반복, 즉 윤회적인 메시지를 부여하는 것이다. 보편적 개념으로서의 하늘은 인간의 소망출구이자 신화적인 간접경험을 생산해내는 절대적 대상이기도 하다. 이 세상 우주만물은 끊임없이 변화한다. 우리가 살고 있는 건물도, 도로도, 사회와 시대도, 심지어는 내 자신의 몸과 정신까지 유무형의 모든 것은 이 시각에도 변화를 거듭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지혜는 영원과 불변이라는 키워드를 꺼내 들었다. 그것은 자신의 그림이 생산해내고자 하는 가장 중요한 메시지 즉 미학적 개념을 성립시키기 위함으로 분석할 수 있다.

그렇다면, 이 작가는 그의 예술을 통하여 어떤 철학적 이야기를 하고 싶어 하는 것일까. 그것은 단적으로 말하자면 ‘삶’이다. 조금 더 확장해본다면 ‘인(人)+간(間)’이다. 경계적인 관계성을 가진 이 어휘는 인간의 삶이 희로애락의 경계를 넘나들며 고통의 점철과 치유의 반복이 동반됨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러나 삶을 노래하고자 하는 그의 그림에는 그 어디에도 인간의 삶과 모습은 찾아내기 어렵다. 왜냐하면 자연과 그 현상이라는 매체를 통한 고도의 은유 방식으로 삶에 대한 치유를 이야기하고 있기 때문이다.

 

2

그렇다면 그의 그림에서 느낄 수 있는 조형적 가치와 미학적 가치는 어떻게 보아야 할까.

철학박사 심귀연의 지난 서평에서도 언급된 바와 같이 겹겹으로 쌓아올린 한지와 채색의 중첩은 인간의 삶에서 필연으로 만나는 고통과 그 기억으로 은유되고 있는 것이고, 그것은 미술학에서 말하는 조형론적인 시각의 확장해석으로 간주할 수 있다. 뿐만 아니라 창작자의 손길을 통해 화면에 부여되는 내적울림은 감상자의 시각적인 그것과는 차원이 다른 것으로써 오로지 창작의 과정에서만 느낄 수 있는 감성과 비논리의 세계인 것이다. 이러한 울림을 통해 발현된 조형성은 감상자의 경험체계와 상상력, 그리고 시시각각 변화하는 감정의 움직임에 따라 재해석되어 지면서 치유의 효과를 내는 것이다.

또한 그가 사용하는 한지나 물성적 질료들에 대한 관심은 이 작가가 전하고자하는 미학적 가치와는 깊은 관련성을 부여하기가 어렵다. 왜냐하면 이 작가의 예술적 목적은 미학적 가치에 있기 때문에 잡다한 요소들에게까지 갖가지 의미를 부여하는 것은 사족(蛇足)과도 같기 때문이다.

그래서 ‘돈 버는 것도 예술이고, 일하는 것도 예술이고, 좋은 사업을 하는 것은 최고의 예술이다’라고 말한 앤디워홀이나 ‘모든 인간은 예술가다’라고 말했던 요셉 보이스의 논지는 우리가 생각하는 그런 단순한 세계로서의 예술이 아니라 철학적 가치가 부여되었을 때의 얘기가 되는 것이다.

한편, 이 작가가 지향하는 또 다른 조형적 수단은 청색에 대한 관심과 해석이다. 이 작가의 청색은 자유와 희망이라는 보편적인 상징성을 초월하여 생명에너지의 근원적인 소스로서 단순한 블루의 카테고리를 뛰어 넘는다. 이러한 개념은 모든 것의 시발(始發)이 되는 것으로서, 인류발전의 기초적이며 가장 중요한 원천이 되는 것이 예술인 것과 다름이 없는 것이다. 그러한 그의 작업에 있어서의 근원을 따져본다면, 10년 전 그의 석사학위 청구전에서는 화획(畵劃)이라는 주제로 전시를 했었는데, 그림에 있어서 필획(筆劃) 즉 필흔(筆痕)이라는 것은 미술사가 시작되지 않은 시대부터 지금까지 수많은 작가들에 의해서 셀 수 없는 다양한 기법으로 구사되어 왔다. 다만 바탕의 질료에 해당할 수 있는 닥종이 그 자체가 물감을 대신하여 소조적(塑造的)인 방법으로 시간을 축적하듯이 쌓아올린 질료를 통해서 생성과 소멸이라는 이야기를 하고 싶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금세기는 미술이 형식의 역사였던 지난 세기와는 완연히 다른 관점에서 보아야하는 시대이다. 만약에 지난 세기의 관점에서 미술의 형식이 주요소라면 이 작가의 작업이 조형적인 시각에서의 평가가 주가 될 것이며, 미학적 평가는 뒤로 밀릴 것이다.

따라서 본 필자는 조형적 요소를 완성시키는 일체의 키워드에 집중할 필요성 보다는 시대와 사회가 요구하는 미학적인 관점에서 이 작가를 바라볼 것이다.

 

3

어찌됐건 그 후 10년이라는 시간동안 어떻게 변해왔는가가 이 작가를 바라보아야 할 핵심적인 관점이다. 그가 다루었던 모티브와 메시지는 일관성 내지는 항상성을 가지고 있다. 그가 유지해 왔던 또 하나의 일관성은 자연으로부터 얻은 모티브를 유지하며 그에 대한 연구를 지속하는 것이었다. 예술이 하나의 작품이라면 자연은 그 질료로써 다윈의 말처럼 ‘비약이 없는 자연 그 자체’를 존중하고 차용해온 것으로 볼 수 있는 것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본 하지혜는 자신이 자연의 한 꼭지로서 자연을 바라보며 자신과 어떻게 다른지 혹은 어떻게 같은지에 대한 자성으로 자신의 정체성을 회복하면서, 자신이 가장 잘 할 수 있는 표현방식으로 그림을 선택한 것이며, 창작의 주체로서의 자신은 스타일리스트와도 같은 입장을 견지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작가 하지혜는 지금 이 순간(Now here) 자연에 대한 스타일리스트로서 삶의 주체가 자신임을 명확히 하면서 그것을 실천해 가는 과정을 시작한 세상에 하나밖에 없는 독자적인 존재인 것이다. 그러한 그가 차용한 자연의 모티브는 대략 풀과 하늘, 그리고 구름이다. 이러한 모티브들은 전술한 바와 같이 사족에 불과할 수도 있지만 어떤 의미를 담고 있는 것인가.

작가 하지혜가 차용한 자연의 모티브들은 존재론적인 상징적 이미지로 은유되는 것이고, 자신이 저절로 나이를 먹듯이 혹은 죽지못해 살아왔듯이 모든 것은 저절로인 무위적인 자연성을 보여주고자 하는 요소들인 것이다.

따라서 이 작가가 표현하고자 하는 풀은 치유의 대체제로써 영원한 치유가 요구되는 어머니에 대한 사랑의 배려이다. 그러면서도 그 다음 치유의 대상은 곧 자기 자신이지만 이러한 치유효과는 모든 감상자와 공유로서 소통하고자 하는 핵심키워드이다. 또한 그의 하늘은 자신을 지켜봐주는 존재인 동시에 치유와 안식의 정원이며, 존재에 대한 규명을 부여하기 어려운 구름의 의미는 변화무쌍한 과정을 거듭함을 통해 비를 내리게 함으로써 새로운 생명을 생장시키는 물의 의미이자 치유 이전에 설움을 쏟아내듯 흘려보냈던 눈물의 기록이다.

인간에게 있어서 자연이라 함은 자연을 따르는 것이 곧 선(善)에 도달하는 것이고, 행복을 구현하는 것이며, 우울함에서 탈피하는 것이다. 그러면서도 자연은 비논리이고 구도적인 입장에서는 신(神)이자 신의 예술이기도 한 것이다. 그러기에 자연은 신의 작품이며, 역사는 인간의 작품인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자연의 섭리는 때로는 슬픔을 요구하기도 하지만 그 슬픔 뒤의 공허함을 갖기도 하므로 자연을 누리는 우리들에게 슬퍼해서는 안 된다고 말 할 수도 없는 것이다. 독일의 화가 에른스트와 프랑스의 사상가인 몽테뉴는 ‘자연의 진실과 단순은 언제나 중요한 예술의 궁극적인 기초이며, 그러한 자연이 우리에게 가장 먼저 권고하는 것은 화해’라고 피력하면서 자연과 예술 그리고 인간의 상관관계를 역설하였다. 이러한 패러독스는 작가 하지혜가 지향하는 예술세계이며, 그럼으로써 인간과 자연의 합일화에 도달하려는 노력의 과정이자 그가 걸어가야 하는 길이 될 것이다.

 

▲ 하지혜, 구름 풀-1

61 x 61cm, 한지에 채색, 2023

 

▲ 하지혜, 구름에 유카리 레몬 선인장

41 x 32cm, 한지에 채색, 자개, 2020

 

▲ 하지혜, 구름위로 피어올라

60.6 x 60.6cm, 한지에 채색, 2022

 

▲ 하지혜, 시원한 바람타고 둥둥-1

61 x 61cm, 한지에 채색, 2023

 

▲ 하지혜, 쓰담쓰담

73 x 60.5cm, 한지에 채색, 2020

 

작가노트 | 하늘이 전해준 위로

하늘은 나의 안식처다.

오롯이 내 스스로 해결해야 하는 감정에 직면할 때 항상 고개를 들어 하늘을 바다라보곤 한다. 그저 바라보고 있는 것만으로도 공감과 위로를 때로는 해결 방향을 그려주기도 했다.

내가 받은 위로의 감정들은 작업에 고스란히 녹아들었다.

하늘은 언제나 그곳에서 나(우리)를 지켜봐 주고 위로를 건내는 내편이었다.

시시각각 변화무쌍한 하늘은 매일 다른 얼굴로 나의 기쁨도 슬픔도 함께 나누는 친구 같은 존재였다. 나에게 위로를 주는 하늘이야 말로 아낌없이 주는 작업의 소재이자 이유가 되었다.

하늘의 푸른 색은 푸른위로의 밑바탕이 되었다.

블루는 누군가에게는 차가운 색일지 모르지만 나에게는 충분히 따뜻했다.

작업 속 획과 같은 선들은 불완전하나 독립적이며 고립되지 않고 선들은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조화를 이룬다. 마치 우리가 살아가는 사회처럼 말이다. 구름풀의 형상은 지금을 살아내는 나(우리)의 모습과도 같다.

둥둥 떠오른 구름풀들은 우리가 사는 세상과도 같다.

넓은 의미에서 작업의 화면은 자연이다.

그것은 외적인 자연의 재현이 아니라 나에게 어떠한 에너지를 준 자연의 반영인 셈이다.

새로운 자연, 새로운 형상과 주관적인 해석이다.

이러한 작업의 과정 자체가 일종의 수련이라고 하지만 고행에 가깝다.

호흡을 조절하고 손끝에 온 신경을 집중하여 작업을 하면 어느새 마음도 숙연해진다.

우리의 삶도 정해진 틀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반복적인 삶을 살아간다.

가끔의 여행이 큰 위로가 되듯 나와 우리의 투영인 풀들도 둥둥 떠올라 여행길에 오른다.

그곳은 내가 바라는 안온한 안식처, 파라다이스다.

 

▲ 하지혜, 초록정원4

45.5 x 53cm, 한지에 채색, 2023

 

▲ 하지혜, 토닥토닥

50 x 50cm, 한지에 채색, 2020

 

▲ 하지혜, 통영구름-2

30 x 90cm, 한지에 채색, 2020

 

▲ 하지혜, 푸른위로-7

80.3 x 65.1cm, 한지에 채색, 2023

 

▲ 하지혜, 푸른위로-10

53 x 45.5cm, 한지에 채색, 2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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