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승지 경상북도 영주시 풍기를 가다 (3)

제1승지 경상북도 영주시 풍기를 가다 (3)

 

풍기마을을 내고향 처럼

 

문수면 적동 삼거리에서 무섬마을 가는 길로 들어서 산길을 오르고 내려가길 꼬불꼬불 하다보면 산속에 꼭꼭 숨은 새뱅이 마을이 나타난다. 작은 개울을 중심으로 양지쪽에 위치하고 있는 마을을 양지마라고 하는데 20여 가구가 살고, 양지마의 뒤쪽에는 음지마라는 마을이 있다.

 

지명유래에 의하면,

새배이·쇄배이·새뱅이·신방은 임진왜란 때 순흥 안씨와 영양남씨(順興 安氏 英陽南氏)가 입주하여 은거하던 곳이다. 현재 이곳은 영양 남씨의 집성촌으로 30호 정도가 살고 있다.

이 마을 입구 우측에 ‘석정’이란 이름을 가진 오래 된 샘이 있다. 반석(盤石)으로 둘러싸인 사방 1m되는 자연샘이다. 이 돌우물(石井)이 현재까지 주민들의 식수로 이용되고 있다. ‘석정’위에는 수백년 된 느티나무가 아기를 품듯 샘을 품고 있다.

안동 영가지에 의하면 <영가북방(永嘉北方) 70리에 화개지지(花開之地)가 곧 신방(新芳)이라>는 기록에 의하여 새뱅이라고 불렀다라고 한다. 주변 지형이 활짝 핀 꽃과 같다니 그 안의 마을은 촘촘하게 모여있는 꽃술이라고 할 수 있겠다.

 

월호리는 마을 뒷산 형국이 반달 같아서 붙여진 이름이다. 상월(上月)은 살림이 번창하다가 보름이 지나면 차차 가세가 기울어져 3대를 못 넘긴다고 하며, 정월 대보름날 달을 먼저 보면 그 해 운수대길하여 총각·처녀는 장가가고 출가한다는 전설이 있다.

파지리는 약 400년 전에 안동 권씨가 개척한 마을이다. 옛날 마을 뒷산 바위에 선녀가 가마를 타고 내려와서 이 바위 위에서 놀다가 갔다는 전설에 따라 그 바위를 가마바위라고 불렀다. 바위 밑에 마을이 이루어졌다고 해서 바우실이라 부르게 되었다.

 

성곡리에 있는 마을 뒷산을 주마산이라 부른다. 옛날 어떤 도사가 달리는 말을 소리쳐서 세웠는데 달리던 말이 그대로 큰 산이 되었다고 한다. 그래서 주마산(走馬山)이라 부르고, 이 마을을 달리는 말의 배에 두른 띠 부분에 위치한다 하여 배태라고 불러 왔다고 한다.

 

소백산 두 무길 중 하나인 금계천, 남원천 금계천 사이의 동네가 몸을 피신하기에 가장 좋은 곳으로 꼽혔다.

 

용감동에 산이 있다. 모양이 용이 누워있는 형상이라 와룡골이라 하였는데 마을이 커서 큰 마을 또는 대촌(大村)이라 하였다.

마을 한복판에 흐르는 석평천(碩坪川)을 중심으로 북쪽 산기슭 양지쪽을 양지마을, 남쪽을 음지마을이라 하였다.

이 마을은 예전에는 땅이 아주 메마른 곳으로 불모지였다. 그 때문에 일명 갱변마을이라고 하고 방아두들이라고도 하였다. 동쪽으로 큰 희나무와 노송이 있어서 희나무 고개라 하였으며, 영등 바위에서는 영등 제사를 올렸다고 한다.

 

용이 와룡청수에서 물을 마시고 여의주를 얻은 형상이라 하여 주성동이라 하였다. 다른 설에 의하면 약 340년 전에 광산김씨의 선조인 진현(振鉉)이란 사람이 다래 덤불을 헤치고 마을을 개척하면서 주성골이라 불렀다고 한다.

 

진밭 남동쪽에 있는 주막거리는 예로부터 진밭, 버드래이, 짤드매기, 점말로 가는 분기점이며, 풍기에서 예천으로 통하는 행인이 많아 객주집 비슷한 주막이 있어서 주막거리라고 불리어 왔다. 마을에 큰 노송이 있기 때문에 송정골이라고도 부르고 있다.

 

버드나무 그늘이 좋아서 유음동(柳陰洞) 또는 버드래미라 칭하였다. 버드나무 둘레가 약 10m가량 되며 높이도 약 20m정도 되는 큰 버드나무가 있어 여름의 휴식처가 되었으며 인근 마을의 힘센 장사들이 모여 씨름하는 장소로도 이용되었다고 한다.

 

태장리에는 고려 충렬왕, 충숙왕, 충목왕 세분의 안태지(安胎地)가 있다. 태는 삼공(三公)을 말하고, 장은 곳을 말한다.

 

석교리는 하천 건너 지형이 고양이 몸체형이고 고양이가 쥐있는 곳으로 건너오지 못하게 600년간 돌다리를 놓고 돌다리로만 건너 다니게 한데서 생긴 지명이다.

 

배점리는 조선 선조때, 무쇠쟁이 배순(裵純)이 국상을 당하자 상복을 입고 소백산 위에 올라가서 삼년 동안 임금과 나라를 위하여 통곡 망배하자 충신 정문이 1615년에 내려졌는데 배충신이라 하고 망배하던 산봉을 국망봉이라 칭하게 되었고 나라에서는 무쇠점을 주었다. 그 연유로 배점이라 부르게 되었다.

 

구들은 거북이 모양이라 하여 귀두(龜頭)들이라 하였으며, 또한 아홉 언덕에 학이 춤을 추고 놀았는데 그 중 가장 높은 봉우리가 지금 구구리 뒷산 무학봉(舞鶴峰)이었다고 한다.

 

대지리로 가는 뒷골의 지형이, 병 주둥이가 병목처럼 생기고 병 밑 부분이 큰 마을을 이루고 있어서 흡사 병과 같아 병산으로 불렀다. 행정구역 개편 시 동리 뒤편에는 좌우로 군자봉과 옥녀봉이 솟아 있으며, 앞산이 병풍을 두른 듯 아늑하게 마을을 감싸고 있어서 병산(屛山)으로 고쳐 부르게 되었다.

 

좌석리 마을 한 중간 논바닥에는 앉은 바위라는 큰 바위가 있다. 옛날 마귀할멈이 소백산에서 반지를 잃었는데 그 반지를 찾아 산을 파 내려가자 골짜기가 생겼다. 그러자 땅 속에서 나온 큰 바위가 골짜기를 굴러내려 오다가 자리에 멈추어서 자리를 잡았다 하여 앉은 바위라고 불렀다. 이 바위를 중심으로 윗마을을 上座石, 아랫마을을 下座石이라 부르고 있다.

 

큰 바위로 된 절벽이 있는데 죽령 다음으로 영남과 충북, 강원, 서울 등지로 통하는 주요 통로였다. 상인이 말에 짐을 싣고 이곳을 지나는데 갑자기 광풍으로 절벽에서 굴러 떨어졌는데 말이 죽지 않았다고 하여 마락이라고 하였다. 또 조선시대 금성대군과 단종사이에 왕래하던 밀사가 말에서 떨어진 곳이라 하여 마락이라고 하였다는 설도 있다.

 

남대리는 순흥으로 귀양 온 금성대군이 단종복위를 위해 이곳에서 자주 밀사를 모의하였으나 실패하자 그를 애석하게 여긴 백성들이 이곳에 정자를 짓고 남대궐이라는 현판을 붙인 것에 연유한 것이다.

 

보계(寶溪)·보교(寶轎) 마을의 골이 깊어 水源(수원)이 좋으며 가뭄에도 개울의 물이 마르지 않아 농사에 흉풍이 없는 곳이며 이 작은 개울이 보배스럽다고 해서 보계라 칭하였다는 설이 있다. 또 산이 사방으로 둘러싸여 마치 가마처럼 되어 있다고 해서 寶溪라고도 전해 오고 있다.

 

보계실(寶溪室)·원보계(元寶溪) 보계는 원래 보계암이 있어서 연유된 것이라고 하며 寶溪란 극락정토 즉 고뇌가 없는 곳을 일컫는다. 마을 깊숙이 산 속에 방같이 둘러 싸여 있어 이곳을 보계실이라 한다. 옛날에는 實字가 든 곳은 避難室(피난실)이라 한다. 지금도 이곳을 원보계라 부르고도 있다.

 

남산은 면소재지 남동쪽에 위치한 구릉으로 형성된 마을이다. 이 울창한 풍치림을 이루고 있으며 구릉 남동쪽에 인가가 30여 가구 모여 있고 경치가 빼어 난 마을이다.

 

물구지촌을 돌아보며

 

물구지촌은 양지바르고 따뜻한 마을이며 물이 맑고, 호수처럼 생겼다고 하여 물구지라 불렀다. 아무리 춥고 바람이 부는 날이라도 따뜻한 마을이라 한다. 마을 앞에 성황당이 있고 동민의 길복을 기원하고 풍년을 빌기 위하여 지금도 음력 정월 보름날에 고사를 지낸다고 한다.

 

동리에서 북쪽으로 약 150m 지점에 탑이 있었다. 탑을 세운 연유는 지형이 蛇頭形(사두형)으로 생겨 당시 뱀이 많아서 사람의 왕래가 곤란하여 소통책으로 사두형의 목을 자르고 수로를 낸 후 蛇頭(사두) 지점에 탑을 세우고 지명을 塔坪(탑평)이라 하였으니 그 후부터는 뱀이 없어졌다고 한다. 지금은 탑이 없어졌으나 탑이 섰던 자리는 남아 있다.

 

산의 형상이 花釜之形(화부지형)으로 부근이 지면보다 높아서 흡사 꽃봉오리가 피어 있는 모양으로 보이며 그 꽃봉오리 안에 동네가 자리를 잡고 있으므로 이라 화부동이라 한다. 한편 이는 풍수지리설에 의해서 명명된 것이라고도 한다. 이 동네는 연안 김씨의 세거지이며 옛날부터 만석거부로 양반이 행세하며 살아 오던 곳이다.

 

마을 앞산의 지형이 萬甲藏身之形(만갑장신지형)과 같다고 하여 만갑이라 하였다 한다. 옛날 도승이 이 동네를 지나가다가 앞산을 바라보며 절을 네 번 하고 지나갔다고 한다. 그래서 만갑 앞들을 四拜(사배)들이라고도 한다. 도승이 네 번 절을 한 이유는 앞산의 지형이 萬甲藏身之形으로 장군이 태어날 묘 터가 한자리 있다고 생각한 때문이었다고 한다.

 

봉구촌이 생기기 전, 매봉산의 형상이 매 모양으로 생겨 새가 살지 못했다고 한다. 동네가 생긴 후 사람들이 숲을 가꾸니 새들이 날아와서 살았다고 한다.

 

영주초등학교와 영주여자고등학교 뒤편에 영주의 진산(鎭山)이라 일컫는 해발 276m의 우람한 산봉우리가 있는데, 이 산을 『철탄산』이라 부른다.

이 산줄기 형상이 마치 남쪽을 향하여 달리는 말의 형상으로 쇠를 삼키는 힘찬 말과 같다고 하여 무쇠 철(鐵) · 삼킬 탄(呑)자를 써서『철탄(鐵呑)』이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구성새마을금고 앞 골목을 따라 가면 대한불교조계종 포교당 절 뒤편에 낮은 산이 있는데, 이곳이 ‘구성공원’이다.

조선을 건국한 태조 이성계가 왜적의 침입을 막기 위하여 각 고을마다 성(城)을 쌓도록 하여, 당시 영천 고을에서는 이 봉우리를 요충지로 여겨 흙과 돌로 성을 쌓았는데, 이 형상이 마치 거북이를 닮았다고 하여 거북이 구(龜)자를 써서『구성산성(龜城山城)』이라 불렀다고 한다.

 

지금도 공원의 동남쪽 경사진 벼랑에는 그 옛날 성벽의 일부가 남아 있음을 볼 수 있다. 영천군지에 의하면, 당시 성의 둘레는 1,281척, 높이는 9척 이었으며, 성 안에 우물이 하나 있어 아무리 가물어도 마르지 않았고, 또한 무기를 보관하는 군창(軍倉)이 있었다고 한다.

왜정시대에 일본이 각 고을마다 민족의 역사적인 유적지의 의미를 잊게 하기 위하여 공원(公園)이란 이름을 붙여서 놀이터로 만들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한편, 공원 가학루 남쪽 기슭에 진주 강씨 집안의 오래된 무덤이 있는데, 이곳은 풍수에서 와우형(臥牛形)으로 구성산성의 남쪽 봉송대 방향 산줄기가 소의 머리이며, 이 무덤이 소의 배에 해당하여 소가 포근하게 누워있는 명당터로 알려지고 있다.

 

공원 아래에 있는 포교당 입구에서 공원으로 올라가는 계단 왼편에는 조선 고종 임금의 장인인 여성부원군(驪城府院君) 민치록, 영천군수(榮川郡守)의 유애비(遺愛碑)외 다섯 점의 비석이 세워져 있다.

 

구성공원 정상에 높다란 누각이 있는데, ‘가학루’다.

영천군지에 의하면, 이 누각은 본래 조선시대 영천군 동헌의 문루로 영주초등학교(옛 영천군 관아 터) 뜰에 있었는데, 1923년 군수 전성오가 구성공원으로 옮겨 세웠다.

이건기에 의하면, “이 누각은 옛 동헌의 바깥 문루로서, 학교 운동장을 넓힘에 있어 부득이 철거해야 할 사정이므로, 이건위원회를 구성하여 관민이 물력을 내어 구성공원에 옮겨 세웠다.”고 한다.

가학루 전면 편액은 해강(海岡) 김규진의 글씨이며, 후면 편액은 소우(小愚) 강벽원의 글씨이다.

 

구성공원 입구 오른편에 대한불교조계종 포교당이 있는데, 고려 공민왕 20년(1371년) 군수로 부임한 하륜이 이곳에 『향서당』을 세워 고을 선비들이 공부를 하고, 고을 원로들이 모여서 풍속과 질서를 바로잡는 일을 의논하면서 풍류를 즐기던 곳으로 사용하였다.

왜정시대 일본인들이 이곳을 절로 사용하다가, 약 90여 년 전 이 향서당 건물을 뜯어서 석공 임무소 자리로 옮겨 불상을 모시고 포교당으로 사용하였다.

그 후, 이 건물을 영천군 봉향면사무소로 사용하다가 1940년 11월 1일 영주면이 읍으로 승격되어 영주읍사무소로 사용하게 되자, 포교당은 다시 지금의 자리로 다시 옮겨졌으며, 옛 향서당 건물은 석공 임무소 사무실 증축으로 없어지고 말았다.

기독병원 앞 길 건너편 골목으로 약 50m 쯤 가면 구성공원 산자락에 커다란 바위가 우뚝 솟아 있는데, ‘불바위’다.

옛날 이 바위 봉우리에서 북쪽을 바라보면 뒤새 마을이 있는데, 이곳에 원인 모를 화재가 자주 발생하여 민심이 흉흉하였다고 한다. 그러던 어느 날 유명한 풍수장이가 이 고을을 지나다가 이 바위를 쳐다보고

“저 바위 봉우리가 활활 타오르는 불꽃 형상을 하고 있어 고을에 화재가 자주 발생한다.”

고 하였다. 이 말을 들은 사람들이

“풍수장이에게 불이 나지 않게 하는 방법을 알려주십시오.”

하고 간청하였더니,

“바위 서편 아래에 널따란 못을 파서 물을 가득히 채우면 불기운이 약해져서 고을이 평안해진다.”

라고 하였다. 그래서 고을 사람들이 동원되어 바위 서편 아래에 넓고 깊은 못을 파서 물을 가득히 채워 놓았더니, 그 후부터는 고을에 큰 화재가 발생하지 않았다고 한다.

당시 바위 아래 파 놓았던 못은 고을 서쪽에 있다고 하여 서녁 서(西)·못 지(池)자를 써 서·지(西池)라고 불렀는데, 1961년 7월 11일 영주 대홍수로 인하여 없어지고 지금은 단독주택이 들어서 있다.

또 다른 이야기에 의하면, 이 바위 봉우리가 마치 짐승의 뿔(각角)을 닮은 형상이라고 하여 뿔바위라 불렀다고도 한다.

 

국도유지사무소를 지나 창진교를 건너서 중앙선 철길을 건너 약 400m 쯤 가면 큰 마을이 있는데, 이곳이 창부마을이다.

이 마을은 조선시대 관리들이 지방으로 출장가면서 말을 갈아타던 창보역(昌保驛)이 있었던 곳이라 하여 마을 이름을 『창보(昌保)라 불렀는데, 오랜 세월이 지나오면서 발음이 변하여 창부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영천군지에 의하면 당시 창보역에는 역리(驛吏) 26인 · 노비 13인 · 대마 1필 · 중마 3필 · 하마 10필이 있었다고 한다. 지금도 옛날 창보역에서 말을 키우던 마장(馬場)터 흔적이 중앙선 철길 옆 논 가운데에 둔덕을 이루어 남아 있다.

 

약수동 창부마을 창진부녀회 수퍼마켓에서 아지동쓰레기매립장 방향으로 약 700m 쯤 가면 오른편에 인삼밭이 있다.

옛날 이곳 논 가운데서 약물이 샘솟아 피부병에 효험이 있었다고 하여 동네 이름이 약수동이라고 한다.

고바우골 제궁고개를 넘어 약 700m 쯤 가면 안정면 오계리 보치골과 이어지는 넓은 들이 있는데, 이곳이 고바우골이다.

옛날 이 곳에 큰 부자가 살았는데 어느 날 해 질 무렵, 한 스님이 찾아와서 시주를 청하자

“우리 집에 늘 나그네들이 많이 찾아오니 제발 오지 않도록 해주면 시주를 하겠다.”

고 부자가 말하였더니, 스님이

“ 마을 앞산에 있는 커다란 바위를 깨트리면 소원이 이루어진다.”

고 말하자 부자가 바로 하인을 시켜 바위를 깨트려 버렸다고 한다.

그 후부터 이 부잣집의 가세가 기울어 마을을 떠나버렸는데, 바로 그 바위가 벼를 보관하는 창고(고庫)였으므로 부자가 망하게 되었다고 하여『고바우골』이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안정 방향 비상 활주로를 따라 약 1km 쯤 가서 왼편 농로를 따라 600m쯤 가면 산 아래 줄포라는 작은 마을이 있다. 마을 앞 물가에 줄(茁)이 많이 자라고 있었다 하여 줄 줄(茁) · 물가 포(浦)자를 써서 마을 이름을 줄포라고 붙였다고 한다.

시외버스터미널에서 중앙선 철길 위 고가도로를 지나가면 서천을 가로지른 긴 다리가 있는데, 서천(西川)에 있다 하여 『서천교』라 부른다. 이 다리는 왜정시대 신작로가 개설되면서 처음 세워졌는데, 영주에서 풍기 · 단양 ·서울로 가는 모든 차량들이 이 다리를 건너다녔다.

 

서천교를 건너 풍기방향으로 약 500m쯤 가면 제일고등학교가 있는 마을이 있는데, 도화동이다.

옛날 이곳은 풍기 고을로 가는 길목으로 주막(酒幕)에 작부(酌婦)들이 많아 이들을 복숭아꽃에 비유하여 도화(桃花)라고 불렀다고 하여 마을 이름을『도화동』이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제일고등학교를 지나 풍기방향으로 약 500m쯤 오르막 고개가 있는데, 이 고개가 나무고개다. 고려 공민왕 때 군수로 부임한 하륜(河崙)이 풍수지리에 밝았는데, 고을 산천을 둘러보고 서쪽이 허실하여 고을에 재난이 많이 일어나고 인재가 나지 않으므로, 이 고개 주변에 나무를 심어 숲을 이루게 하였다고 하여 나무고개라 부르게 되었다.

또 다른 이야기에 의하면, 도화동마을에 복숭아꽃을 찾아오는 나비들이 많아 나비고개라 불렀는데, 이 나비가 나부, 그후 나무로 변하여 나무고개라 부르게 되었다고.

풀방구리 제집 드나들 듯 영주의 이곳저곳을 돌고돌아 다시 풍기역 앞으로 돌아온 건 이미 밤이 늦어서였다. 그래도 읍내건만 사방은 어둡고 역사만 불이 환하다.

역사 가까운 식당에서 영주 한우숯불구이를 시켰다.

밑반찬이 나오는데 남도정식처럼 화려하지는 않지만 입맞에 맞아 고루 먹었다. 명당의 기운은 없던 밥맛도 돌게 하는지 두 그릇이나 비우고 황토방으로 향했다.

전국 방방곡곡 쭉쭉 뻗어 있는 길 따라 번성하고 있는 편의점에서 캔맥주를 골라 나오면서 보니, 편의점 앞 간이테이블에서 캔맥주를 즐기는 젊은이들과 다양한 연령의 사람들이 여럿 보였다. 낮에는 어디에도 보이지 않던 사람들이 어디에서 나타났는지 도통 모를 일이다.

 

 

김덕기 법학박사/부동산학박사 

- 연세대학교 이학사 

- 성균관대학교 문학 석사 

- 건국대학교 부동산학 석사·박사 

- 동국대학교 법학 박사 

- 전) 법무법인 하우 부동산·금융 수석 전문위원 

- 현) 건국대학교 부동산 대학원 겸임교수 

- 현) 동국대학교 법학대학 일반대학원 겸임교수 

- 현) 부동산포털 한국도시환경헤럴드 발행인 

- 현) 법률사무소 두남 고문 

- 현) 주식회사 두남씨앤디 대표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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