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승지 경상북도 영주시 풍기를 가다(2)

윤기 좔좔 풍기 금계마을 

 

 

동료의 고함 소리에 정신이 돌아와 육체를 끌고 터덜터덜 길에 오른다. 

  

-이런 동네 살면 정말 좋겠다... 

  

편리함과 수익성이 포인트가 되는 도심지의 주거환경을 다시 한번 돌아서 생각한다. 답답하거나 엉킨 문제가 있을 때면 찾는 곳이 커피숍이나 술집일 수밖에 없는 곳에서 탁 트인 하늘과, 바람과, 흐르는 물이 있는 곳 한복판에 있으니 다 부질없어 보인다. 

  

-사는 게 무언가. 어떻게 살아야 잘 사는 것일까. 이렇게 바득바득 사는 것이 옳은가... 

  

성내2리는 죄수(罪囚)들을 가두어두는 옥사(獄舍)가 있어 옥대가리(獄垈街里) 옥대거리라 하였다. 1975년 이 마을에서 새마을 사업으로 마을 안길을 확장하다가 당간장식 용두가 출토되었다고 한다. 성내4리는 옛 풍기군의 역대 수령(郡守)들의 선정비를 비롯하여 많은 비석들이 거리를 메웠다 하여 비집(碑集)거리, 비치(碑置)거리라 하였다. 

이 마을 서쪽에 옛 풍기 성 (城)의 서문(西門)이 세워져 있어 서문거리, 서문박 거리라 부르고, 금계리 마을에서 흐르는 냇물에 다리를 놓아 그 다리를 유다리라 했으며, 현재 풍기소방서 옆 부지에 다리를 복원하였다. 

  

동부4리는 속칭 구름밭(雲田)마을이라 한다. 

구름밭의 유래는 동문 밖에서 이 마을까지가 풍기장터(市場)였는데 풍기장날이면 여러 곳에서 장꾼들이 구름같이 모여 들었다고 하여 구름밭이라 하였고, 또 풍수설(風水說)에 의하면 이중 어느 곳에 운중선좌(雲中仙坐)의 명당(明堂) 자리가 있어 구름밭이라고 한다는 전설이 있다. 

마을마다 한두 군데 열리던 시장은 보통 물류가 유통되는 중심지에서 열렸다. 교통이 여의치 않던 시대였으므로 걸어서 다닐 수 있는 거리여야 하는 제한적인 부분이 크기 때문이다. 이런 시장은 물물을 교환하는 경제의 거점이 되기도 사람들이 모여서 서로의 근황을 전하고 새로운 소식을 접하는 ‘광장’으로서의 역할도 하였다. 이런 이런 시장의 전통은 지금까지 ‘5일장’으로 이어지고 있다. 

욱금리는 장선리를 경계로 소백산 밑까지 전부인 큰 마을로, 마을의 형태는 냇물을 사이에 두고 양지쪽 본 마을과 음지쪽 영전 마을이 분리되어 있다. 양지쪽 마을에 욱양서원(郁陽書院)이 있어 그 서원의 이름을 따서 욱금리라고 하며 음지 마을에는 영전사(靈田寺)가 있어 영전말, 영전, 영전마을이라 했다고 한다. 

  

금계1리는 옛 풍기군 서부면 구교리이다. 풍기향교(豊基鄕校)가 처음 이 마을에 창건(創建) 되었다가 1735년에 교촌리 현 위치로 이건(移建) 되었다. 금계2리는 속칭 장생이, 장시이, 장선이, 장선동이라 불리어 왔다. 그 유래는 마을 지형이 긴 배(船) 모양 같다 하여 장선이라고 이름하였다. 또 일설은 이 마을에서 오랫동안 마음씨 좋은 착한 사람들이 많이 나서 번성하라는 뜻에서 장선(長善)으로 불렀다 한다. 이 마을에는 금선정과 욱양서원이 소재하고 있다. 

금선정에서 쉬엄쉬엄 걷다가 삼가 펜션마을 입구에서 황토집을 발견하였다. 널찍한 마당에 조형물이 예사롭지 않아 주인도 없는데 들어가 구경하다가 주인을 만났다. 이 동네 토박이란다. 첫인상으로는 프랑스 유학파 화가인 줄 알았다. 

 
 

영주 풍기 금계리 대동여지도 

 

영주 풍기 금계리 대동여지도
영주 풍기 금계리 대동여지도

십승지의 땅값은 오르는 중인가? 

  

-여기가 십승지로 알려져 부동산 값이 많이 올랐나요? 

  

한눈에 봐도 여느 지방의 쇠락한 마을 모습이 아니다. 집들이 다닥다닥 붙어 있지 않고 멀찌감치 떨어져 있으며 대개 마당과 텃밭이 있는데 관리가 잘 되어 있다. 펜션 마을은 특히 어지간한 별장들에 견주어도 떨어지지 않을 세련된 건축물이다. 가끔 운동을 하거나 개를 끌고 산책하는 사람이 지나가는데 현지인인지 외부인인지 구분이 안 간다. 그러나 대개 관광객은 티가 나는 법. 멋스러운 디자인의 운동복을 아무렇지 않게 걸치고 개를 끌면서 경보를 하는 관광객은 없다. 현지인이라 거다. 막연히 시골이라 생각하고, 수더분하고 인심 좋은 마을 사람들을 생각한다면, 당신은 필경 앞뒤로 꽉 막힌 사람이다. 펜션이 아닌 일반 주택들도 보수가 잘 되어 있고 마을 곳곳에 윤기가 흐른다. 

  

-글쎄..그건 잘 모르겠어요. 의외로 십승지에 대해서 모르는 사람들이 많아요. 그냥 경치가 좋아서 들렀다가 너무 좋다고 며칠씩 머무는 분들도 계시니까. 

  

의외였다. 풍수에 관한 관심이나 책들이 쏟아져 나온 게 꽤 되었는데. 

  

-여기 오는 분들은 ‘십승지’에 대한 관심으로 오는 분들이 많은 줄 알았어요. 그래서 그 영향으로 부동산도 상당히 가치가 오르지 않았을까 생각했는데. 

- 그건 별개예요. 원래 여기가 다 대농이고 하다보니까 작은 땅들은 별로 안 나와요. 그리고 ‘십승지’에 대해서는 내가 오히려 열심히 설명을 해줘요. 

-원래 여기에서 오래 사셨나요? 

-나는 여기 토박이지. 친정이 여기니까. 여기 이 집에서 나고 자랐어요. 펜션한지는 한 20년 되었고. 

-동네가 너무 좋은데 혹시 작은 집 나온 거 있을까요? 땅값은 얼마 정도 하나요? 

-대농이 많아서 시골치고는 땅값은 원래 비싼 요새는 한 평당 60만원 정도.우리 집 건너 편에 저 하얀 집이 100 평 정도 되는데 내놓았다고 한 것 같아요. 

  

과수원이나 인삼밭을 하는 대농들이 많은데 일손이 없어서 힘들단다. 그래서 외국인들이 많이 들어와 일하고 있다고. 보통 이런 펜션이나 식당을 하는 이들이 농장이나 인삼밭과 도매를 투잡으로 많이 한다고 하니 년수익은 물어보기가 겁나서 안 물어봤다. 펜션은, ‘노는 이 이 잡는다’고 안팎으로 집을 가꾸는 취미생활을 즐기면서 하는 듯. 마당에 있는 큼지막한 괴석도 인도인가 인도네시아에서 다 수입한 희귀한 암석들이라고. 

1박 예약을 하고 돌아나왔다. 작가, 화가, 유명한 정신과 의사가 가끔 와서 글도 쓰고 힐링도 하고 장박한단다. 1박에 7만원. 주방 공용. 욕실 딸린 황토방 하나. 

  

백1리는 백야리(白也里)였으며, 속칭 희야골이다. 마을 뒤에 호랑이와 모양이 흡사한 두 개의 바위가 동서로 마주보고 있어 그 바위 이름을 동호암, 서호암이라 하고, 이 한쌍의 백호가 서동, 부서(婿東, 婦 西)의 형상(形 象)으로 위치하여 혼례식을 올렸다는 전설에 따라 백호의 백자를 따서 백야리라 하였는데 지금은 이 바위들이 없어졌다. 

백2리는 속칭 미안, 뫼안, 모내(暮內), 산내라고 불렀는데, 좌우로 산이 둘러 싸였다 해서 붙여진 것으로 희야골 마을 남쪽 산너머에 위치하고 있다. 마을앞 들을 미안들이라 하고 1934년에 죽령으로 통하는 우리나라 5번 국도가 개통 되었으며, 도로변에도 민가 몇 채가 있었다. 

백신2리는 백야리 구역으로 웃마을, 아랫마을 바깥마을로 산재해 있는 마을로서 속칭 웃마을을 흰물내기, 백수동(白水洞)이라 부르는데, 이 마을 뒷산에 넓은 바위가 있어 그 바위를 덮쳐 흐르는 물이 몹시 하얗게 보인다는데서 유래한다. 

마을 앞에 수령이 약 90여년 되는 느티나무 한 그루가 마을의 수호목으로 숱한 애환을 겪으면서 지금까지 마을을 수호(守護)하고 있다. 

  

우우실, 우이실은 백신2리의 중심이 되는 마을로서 지형이 흡사 큰황소의 귀를 닮았다는 뜻에서 우이실이라 불렀다고 한다. 

서부1리는 북문리였는데, 옛 풍기성을 사방으로 쌓아 놓고 동서남북으로 4대문이 있었다. 이 마을은 성북문 밖에 자리한 마을임으로 북문리라 하였다. 이 북문은 순흥 방면으로 드나드는 문으로 당시는 이 북문이 풍기 4대문 중 가장 출입이 많았던 문이었다고 한다. 

창락2리는 속칭 곰수골, 웅수동(熊水洞)이라고 했는데 산세가 곰 모양처럼 생겼다 해서 지어진 이름이라는 설과 산세가 너무 험준해서 곰이 많이 살았다고 곰수골이라 했다는 설도 있다. 또 이 마을을 대사동(大寺洞)이라 함은 마을 북쪽에 큰 사찰인 유석사(留石寺)가 있으므로, 이름을 대사동이라고 한다는 설과 의상대사(義湘大師)가 절터를 찾아 이곳에서 쉬어 갔다고 해서 대사동이라고도 한다. 

  

전구2리는 전고리(前皐里)였는데 왜정때인 1914년 행정구역개폐로 순흥도호부가 격하(格下)되고 영주군으로 편입과 동시 풍기면 전구2 동으로 개칭되었다. 이 마을은 도솔봉 바로 밑 첫마을로 뒷산 봉우리에 옥녀라는 선녀가 내려와 바위 위에서 베를 짰다고 하여 그 바위를 베틀 바위라 이름하고, 그 산봉우리를 옥녀봉이라 하고, 이 옥녀봉 밑에 마을이 형성되었음으로 마을 이름을 옥동이라고 하였다. 

  

문수면 승문1리는 마을이 산으로 둘러싸여 외부에서 보면 잘 보이지 않는 아늑한 마을로서 마치 막을 쳐 놓은 것 같다하여 막현(幕峴)이라고 하였으며 부근에는 장군봉(將軍峰)·장막 등의 지명이 있고 난(亂)을 피할수 있는 곳이라고 알려져 6.25 당시 피난민들이 이곳에서 난을 피하기도 한 곳이다. 승문2리는 마을 앞을 흐르는 냇물이 여러 해에 걸쳐 흐르는 동안 흙은 파여 흘러가고 돌만 많이 남게 되자, 돌 많은 내라는 뜻에서 돌내로 전해 내려오는 동안 돌내가 도래로 발음되어 오늘에 이르렀다고 한다. 

  

풍기읍 금계리 풍수산도
풍기읍 금계리 풍수산도

 

풍기읍 금계리 풍수산도 

 
 

버드랭이·유릉·유천은 전주 류씨(全州 柳氏)가 이곳에 묘를 쓰게 된데서부터 유천(柳川)이라 불렀다. 한편 류자(柳字)를 따서 버드랭이라고도 부르게 되어 지금에 이른다. 

  

점골·점촌은 동편 산 모퉁이에 위치한 4,5가구의 소집단 자연 부락이 형성된 후 이 마을에 처음으로 주막이 생기게 되자 점골이라고 지어졌다 한다. 

걸가는 냇가에 4,5가구가 살게 되자 내가 있는 마을이란데서 유래되어 오는 동안 거렁가에서 걸가로 불리게 되어 지금에 이르고 있으며 현재 8가구의 농가가 특용 작물을 재배하고 있다. 봇목 냇물에 의하여 흙이 파여 골을 이루게 되자 보를 설치하고 수로를 만들어 농사 짓기가 편리해졌다. 이 때 보 입구에 4,5가구의 농가가 형성되자 이웃 사람들이 보의 목에 있다 해서 봇목이라고 했다. 

  

만방1리는 한정이·한정이라고도 하는데 돌과 돌 사이에서 흘러 나오는 샘물이 여름에는 차고 겨울에는 따뜻하며 물맛이 좋고 그 물이 차다하여 한정이라고 일컫게 되었다. 

  

자마이·자만은, 지형적인 잇점으로 임진왜란 때 은거지(隱居地)였다고 한다. 그 후 인근에 산재해 살던 난민들이 피난처로 생각하고 모여 살다 보니 큰 동리가 형성되어 골 안에 주택이 꽉 차게 되었다하여 자만(自滿) 또는 자만(者滿)이라 부르게 되었다. 

  

종릉이·종릉은, 조선 태종 때 사람으로 경주 부윤 등을 지낸 류빈의 능이다. 그의 본관은 전주다. 대개 ‘능’은 왕이나 왕비, 왕족의 무덤을 말하는데 그는 왕족이 아닌데도 불구하고 ‘능’을 붙인 이유는 무엇일까. 

조선 태종이 등극 전 류빈과 함께 21명의 친구와 동갑계를 맺고 친교를 하다가 왕위에 올랐다. 그후 이들 중 18명이 공신에 올랐고 그 후 류빈이 죽자 태종이 나라의 국풍으로 하여금 지금의 자리에 장사지내게 하였다. 그리고 임금과 같은 예우로서 그 묘를 종릉으로 봉했다. 

묘터가, 소백산의 옥녀봉이 충주에 있는 탄금대를 바라보고 있는 형상이라 하여 옥녀탄금형이라 하였다고 전해지고 있다. 류빈의 묘소에 대한 형국은 전주 보첩에 자세히 전한다. 

  

‘...묘 뒤의 산맥이 기운을 묶음이 크게 얽혀 있어 끊어진 것 같으면서도 이어진 것 같아 혈을 맺음이 우뚝하여 넉넉하며 청룡 한 가지가 둘러 안아 넉넉하며 이에 내안이 머리를 든다. 조금 낮았다가 다시 일어난 모양은 정신이 정직한 것으로써 술사가 패옥사라 이르며 외백호는 높고 씩씩하다’ 

  

이 묘터는 묘 뒤에 옥녀봉이 다소곳이 솟아있고, 평평하고 단정한 목성이 있다. 이런 곳에서는 재상과 후백이 태어난다고 하였다. 

  

'동아시아 풍수의 미래를 읽다'는 지리학, 종교학, 생태학, 건축학, 환경학 등 전공이 다양한 학자 13명이 쓴 논문집이다. 

그중 조인철 원광 디지털대 동양학과 교수가 집필한 '건축과 도시에 대한 현대 풍수의 모색'은 많은 현대인이 갖고 있는 선입견을 반박한 논문이다. 

그는 풍수는 경험과학이며 통계과학의 전통지식이라고 규정한 뒤 미신적인 측면인 '귀'(鬼)를 제거하고 '기'(氣)의 흐름만 파악한다면 오늘날 터를 잡는 데도 충분히 적용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옥한석 강원대 지리교육과 교수는 논문 '환경풍수의 연구 방법론'에서 명당을 과학적으로 분석한다. 

특정 장소의 위치와 산세, 물길뿐만 아니라 기온, 강수량, 일조량, 풍향, 풍속 등 기후도 명당을 결정하는 요소임을 밝힌다. 

  

논문 '인류 보편적 가치로서의 풍수'를 쓴 박수진 서울대 교수는 

"풍수가 현대지식을 넘어서거나 우월하지는 않다“ 

라면서도 

"현대과학에서 미처 파악하거나 해결하지 못하고 있는 문제에 대해 풍수는 다양한 측면에서 새로운 대안을 제시한다“ 

고 지적한다. 

사람들과 이야기 하다보면 흔히, ‘다르다’고 말하는 것을 ‘틀리다’라는 비판으로 받아들이는 경험을 한다. 서로 살아 온 인생이 달라서 생각이나 의견이 다르다는 것조차 받아들이지 않거나 인정하지 않을 때, 그럴 때면 프랑스의 사회적 가치를 나타내는 말 ‘똘레랑스’를 생각한다. 

‘똘레랑스’는 ‘나’와 ‘너’의 다름, 차이를 인정하고 존중한다. 서로 신념이나 의견이 다를 수 있다는 것을 인정하고 존중하는 것이다. 이견이나 차이에 대한 의지적인 인정에서 끝나지 않고, 이견과 차이의 존중을 위해 적극적으로 투쟁하는 의무까지도 포괄하는 개념이다. 그래서 볼테르는 다음과 같은 경구를 남겼던 것이다. 

  

“나는 당신이 말한 것에 동의하지 않는다. 하지만 나는 당신이 당신의 의견을 말할 권리를 위해서는 죽도록 싸울 것이다” 

현대 과학의 집약체라고 할 수 있는 건축에서 해결하기 어려운 문제를 풍수적인 측면에서 접근하여 대안을 제시할 수 있다는 생각은 얼마나 신선한가. 건축이든 풍수든, 어떤 한 공간을 오랜 사유와 작업 끝에 비로소 거주할 수 있는 특별한 장소로 만드는 것임에 틀림없다. 인간이 더 나은 삶을 살기를 바라며 잘못된 것은 고치고 모자란 것은 더하고 넘치는 것은 덜어내는 작업을 하는 것이다. 

그래서 하이데거는 ‘인간이 존재한다는 것은 거주한다는 것이다’라고 하였고 풍수의 근본은, 망인의 삶의 정서가 깃든 곳에 정성스레 모시는 것이며, 후손들의 마음을 한군데로 결집시켜 화목을 도모하기 위한 것이다. 

  

내일은 마을을 하루 더 돌아볼 예정이다. 

언제 이런 호사를 누려 볼 것인가. 내가 존재한다는 것은 내가 어디에 머무를 것인가를 찾는 것이 아닐까? 

사람을 살리는 땅을 찾아서 오늘도 나는 간다. 

 

 

김덕기 법학박사/부동산학박사 

- 연세대학교 이학사 

- 성균관대학교 문학 석사 

- 건국대학교 부동산학 석사·박사 

- 동국대학교 법학 박사 

- 전) 법무법인 하우 부동산·금융 수석 전문위원 

- 현) 건국대학교 부동산 대학원 겸임교수 

- 현) 동국대학교 법학대학 일반대학원 겸임교수 

- 현) 부동산포털 한국도시환경헤럴드 발행인 

- 현) 법률사무소 두남 고문 

- 현) 주식회사 두남씨앤디 대표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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