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승지 경상북도 영주시 풍기를 가다(1)

제1승지 경상북도 영주시 풍기를 가다(1)

 

일, 여가, 시간의 균형을 맞추는 것이 중요한 시대다. 많은 학자가 100세 노후 시대를 건강하게 보내려면 여가시간을 활용해 자기계발을 하고 취미생활을 즐기는 것이 좋다고 주장한다. 내친김에 그동안 지친 몸을 힐링하고자 십승지 여행길 탐방에 올랐다.

 

남양주 영화촬영소에서 오후 12시에 출발한 차는 쉼없이 달렸다. 코로나 바이러스 때문에 강제 구금 3개월 여만에 달리는 고속도로는 거침이 없다. 교통 체증도 미세 먼지도 없다. 인생은 공평하다. 잃는 것이 있다면 얻는 것도 있다.

2시간이 조금 넘어서 풍기I.C를 통과했다. 톨게이트를 통과하는 순간은 늘 긴장된다. 어떤 도시일까? 어떤 사람들이 살고 있을까? 무엇을 먹을까? ...........그러나 그 긴장은 눈 깜짝하는 순간 사라졌다.

어느 가판장 앞에서 힘없이 흐느적거리던 조악한 입간판처럼, 또는 지하 주차장 앞에 서서 무표정하게 손을 흔들어 대던 가이드 같은 ‘환영합니다’ 때문이다.

디자인 한국은 언제나 가능한 걸까? 무슨 공산주의 국가도 아니고 전체주의나 집단주의도 아니고 어딜 가나 다 똑같다. 겨울이면 애고 어른이고 남자고 어른이고 다 흑돼지 마냥 검은 패딩을 입고 다닌다. 노란 거나 파란 거 입은 거 아무도 그 꼴 못 본다. 가방 하나 유행하면 전부 들고 다닌다. 다른 거 들고 다니면 다 쳐다본다. 뭘 봐? 노려보면 꺄르르 웃고 도망간다. 옷 사러 가면,

 

-이게 요즘 제일 잘 나가요

권한다.

-싫은데요.

-어머 왜요?

기겁을 한다.

-제일 잘 나가는데?.....

-(너나 입어....)

 

외계인 취급한다. 이러니 지방자치단체 기관들의 디자인도 온통 붕어빵이다. 전국 어딜 가나 돌담의 벽화를 볼 수 있고, 민속 마을을 볼 수 있으며 고택이 있다. 왜 그럴까? 뭐 국토가 워낙 작아서 어디나 다 똑같아서 그렇다고 하면 할 말 없지만 산 넘고 물 건너 허위허위 서너달씩 걸려 왕래하던 그 옛날에는 각 도마다 분명히 색깔이 달랐을 것이다.

 

땅은 살아 인간에게 영향력을 주고, 인간은 그 영향력을 받아 좋든 싫든 변하여 자신의 운명을 움직이는 것이며, 인간의 운명에 의하여 그 땅 또한 분명히 변하였을테니까.

 

지금도 풍수에 따라, 지역의 특성에 따라 약간만 포인트를 주어 디자인을 달리 한다면 훨씬 다양해질 수 있을 것이다.

디자인의 포인트는 ‘훅’에 있다. 무슨 대단한 것보다는, 아주 약간의 ‘훅’이란 의외성, 참신함, 대담함, 신선함, 기발함, 쌈빡함...뭐 그런 것.

예를 든다면, 돈 잘 벌어, 몸짱이야, 노래 잘 해, 매너 좋아, 잘 생겼어, 집안 좋아, 학벌 좋아, 성격까지 좋아... 이런 완벽한 남친의 훅은, 가난뱅이에 재투성이 신데렐라가 딱이고, 매킨토시 디자인의 훅은 한 입 깨문 사과일 것이다.

 

영주 풍기 금계리 대동여지도

 

경상북도의 최북단에 위치한 아이 러브 영주시는 해발 약 200m로 남북이 길고 동서로는 협소한 모양이다. 소백산맥이 서남쪽으로 뻗어 주봉인 비로봉(1,439m), 국망봉(1,421m), 연화봉(1,394m)과 죽령을 경계로 하여 도솔봉(1,315m)으로 이어진 소백산 산록 고원부지에 형성되어있다.

동쪽으로는 봉화군, 서쪽으로는 충청북도 단양군, 남쪽으로는 안동시와 예천군, 북쪽으로는 강원도 영월군과 접경을 이루고 있다.

<소백산 전경>
<소백산 전경>

소·태백권 교통의 중심도시로 전형적인 도농복합지역이다.

화엄종의 근본 도량인 부석사와 최초의 사액서원인 소수서원, 금성대군의 충절이 서려있는 금성대군 신단, 삼국시대를 읽을 수 있는 순흥벽화고분과 물 위에 뜬 연꽃모양의 무섬마을 등 많은 전통문화 유적과 얼이 깃든 곳으로 역사의 숨결을 느끼고 선비정신을 새길 수 있는 고장이다.

여기에 성리학의 시조이자 선비정신의 원류인 회헌 안향선생의 안자육훈(安子六訓)을 토대로 현대적인 선비정신 실천운동을 주도하고 있는 영주시는 명실상부한 선비정신의 중심지이다.

 

안자육훈(安子六訓)

(회헌 안향 선생이 국자학의 여러 유생에게 일러주는 글)

자식으로서는 효(孝)를 해야 하고,

신하로서는 충(忠)을 해야 하며,

예(禮)로써 집안을 다스리고,

신(信)으로 벗을 사귀고,

자기 수양은 경(敬)으로 하고,

일을 함에는 성(誠)으로 할 따름이다.

 

봉황산과 북부 산악지대에서 발원한 내성천은 봉화군을 관류하여 문수면 수도리에 이른다. 소백산 주봉인 비로봉·연화봉과 죽령계곡에서 발원한 남원천과, 국망봉에서 발원한 죽계천이 고현동에서 합류한다. 여기서 서천을 이루어 시가지를 감돌아 낙동강으로 유입된다. 토질은 대부분이 사질양토로 각종 농산물이 잘 자라며, 특히 북부 산악지대는 사양토이기 때문에 배수가 잘되어 인삼, 사과 등의 생육에 적절한 곳이다.

소백산 두 물길은 남원천과 금계천을 말하는데 이 사이의 동네가 몸을 피신하기에 가장 좋은 곳으로 꼽혔다.

특히 풍기는 조선시대 문종의 안태지로 은풍과 기천 두 고을의 이름을 개칭하였다. 십승지 마을은 한반도 남쪽의 내륙 깊은 곳에 자리한데다, 소백산맥이 북쪽에 병풍처럼 둘러쳐져 방패 역할을 해줌으로써 천혜의 요새를 이룬 땅이 되었다.

지금의 경북 영주시 풍기읍 금계리 일대다. 이곳은 지리적인 이점으로 거란이나 몽골의 침입과 임진왜란 및 6.25 전쟁 때도 큰 피해 없이 지나갔다.

십승지의 제일 첫 번째로 꼽힌 곳이 경북 풍기의 금계리 일대다. 이곳은 풍수지리에서 말하는 금계포란(鷄抱卵)형이다.

금계포란형 마을은 말 그대로, 닭이 알을 품은 모습의 마을이라는 말이다. 풍기는 소백산 자락에 위치해 있다. 조금 넓게 말한다면 양백지간(兩白之間)에 자리 잡고 있다고 봐야 한다. 태백산과 소백산 사이에 있다는 말이다.

예부터 한반도의 양백지간은 난리 통에 가장 안전하게 숨어 살 수 있는 승지(勝地)로 꼽혀왔다.

 

조선시대 도사로 이름났던 남사고는 이 양백지간을 가리켜 ‘가활만인지지(可活萬人之地)’라고 평가한 바 있다. ‘만인을 살리는 터’라는 것이다.

 

바위가 많은 산은 사람 몸에 비유해 뼈가 많다고 해 골산, 흙이 많은 산은 살에 비유해 육산(肉山)이라고 한다. 육산의 미덕은 풍성함과 부드러움이다. 풍기 쪽은 흙으로 덮여 있는 육산이다. 흙이 많으니 나무가 많고 굴곡도 부드러우며 먹을 것이 자랄 수 있는 토양이다. 그야말로 풍요(豊)로운 터(基)이다.

더군다나 풍기 쪽에서 보면 소백산이 서북방을 가로막아주고 있다. 겨울에 서북쪽에서 살풍이 분다. 소백산 줄기가 병풍처럼 바람을 막아준다. 소백산 줄기가 등을 막아주는데 전쟁이 나든, 전염병이 돌든, 태풍이 나든 무엇이 무섭겠는가.

알들은 닭의 품에서 그저 졸음에 겨울뿐이다. 터를 볼 때도 서북쪽이 터져 있거나 약하면, 외부 도적이 그 터의 재물을 뺏어간다고 보는데, 풍기는 1000m가 넘는 소백산이 아주 튼실하게 서북방을 방비해주고 있는 셈이다.

 

 

경상북도의 북단에 위치한 풍기는 소백산맥이 서남쪽으로 뻗어 주봉인 비로봉(1,439m), 연화봉(1,394m), 도솔봉(1,315m), 묘적봉(1148m)으로 이어진 소백산 산록 고원이다. 죽령계곡에서 발원한 남원천과, 비로사 계곡에서 발원한 금계천이 풍기읍 동부리에서 서천을 이루어 영주시내로 흘러들어 내성천이 된다.

'정감록'에 언급된 승지 가운데 풍기가 으뜸이라는데 이설이 없다. 그 가운데서도 정감록촌은 금계리. 삼가리, 욱금리 일대다. 금계리는 노인봉이 바깥 좌청룡, 공원산이 안 우백호를 형성했다고 할 수 있다. 넓은 성주들을 끼고 있는 공원산은 소백산의 기운을 최종적으로 품고 있는 산진처(山盡處)다.

 

 

금계리 가장 안쪽에 용천골이 있고, 금계중학교, 풍기향교, 경북항공고, 옛 풍기군 관아터였던 풍기초등학교가 차례로 자리 잡고 있다.

금계리 옆 동네인 백1리(희여골)에는 경남에서 이주한 창원 황씨들이 세거하고 있다. 풍기역을 지나는 중앙선철도 남쪽으로 풍기 읍내가 펼쳐있다. 금계1리 임실마을에서 재밭 마을까지 길가에 무궁화 나무가 심겨있어 인상적이다.

풍기는 인견과 인삼, 사과의 고장이다. 특히 사양토이기 때문에 배수가 잘되어 인삼, 사과 등의 생육에 적절한 곳이다. 일교차가 심한 지역으로 과일이 단단하다. 금계리 좌우로 야트막한 산들이 마을을 감싸고 있는데 사과나무 밭이 많다.

풍기인삼은 여름철 보양에 탁월하다. 소백산록에서 자라 타지방 인삼보다 조직이 충실하고 유효사포닌 함량이 매우 높다고 한다. 풍기 땅은 한국 인삼재배의 시발지다. 1541년 풍기군수로 온 주세붕(周世鵬)이 산삼의 씨앗을 받아와 직접 재배에 나선 곳이 바로 풍기다.

풍기는 동남쪽 영주시내로 가는 길 외는 삼방이 막혀있으나 서남쪽으로 보일 듯 말 듯 트인 곳이 있다. 좁고 긴 골짜기다. 봉현면에 있는 천부산과 용암산(자라봉) 사이로 난 고개(힛티재)를 지나 예천 감천까지 50리에 달한다. 부석-단산-순흥-풍기-봉현-감천(예천)을 거쳐 가는 931번 국도가 통과한다.

 

풍기로 들어서면 가장 먼저 보이는 것이, 풍기 인견 상가와 간판이다. 하늘하늘한 인견을 연상시키는 ‘산들바람’ 같은 상호가 정겹다.

사람이 거의 보이지 않는 한적한 길을 따라 달리면 풍기 향교가 보이고, 한동안 뉴스 단골 메뉴였던 동양대가 나온다. 그 동양대가 이 동양대였군. 학교는 자그마한데 그 주변에 학생들을 상대로 만들어졌을 법한 원룸들이 꽤 많다. 좋지도 않은 일로 인지도가 높아졌으니 참 학생들 입장이 난감했겠다싶다. 학생들은 보이지 않고 학교는 저 혼자 울적하다.

동양대를 지나 마을이 보이는 쪽으로 달려가니 농촌체험마을을 지나 눈이 번쩍 뜨이는 풍광이 나타난다. 풍기 인삼개삼터길이다. 옛날 지명 용천동이다. 신라시대 용천사라는 절이 있어 그 이름을 따서 용천동이라고 부르게 되었다고 전해오며, 마을 뒤 산의 지형이 용이 등천하는 형세라 하여 생긴 이름이라고 한다.

현재 용천사는 조선 중종 때 소실되어 없어졌으며 용천동 아래 마을은 1541년 주세붕 선생이 풍기군수로 부임하여 부계밭 앞들에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가삼을 장려한 곳으로 풍기인삼의 시원지이며 오늘날까지 500년 전통을 이어오고 있다고 한다.

길을 따라 걸어가면 울창한 숲속에서 새소리가 끊임없이 들려오고, 청명한 바람이 불어온다. 팥빙수 만들려고 미세하게 갈아놓은 얼음들이 바람 속에 섞여서 불어오는 것처럼 쨍한 바람을 맞아보았는가. 풍기의 그 소백산자락 바람이 딱! 그랬다. 바람 한 올 한 올이 마치 칼날처럼 살아서 시퍼렇게 씻겨주는 것 같았다. 기어이 민낯까지 벗겨줄게. 말갛게 씻고 가. 동글동글한 애기사과들이 말을 건넨다.

바람에 영혼까지 탈탈 털고 내려오니 금계 저수지를 중심으로 스키장 리조트나 정자동 카페 거리에서 본 듯한 펜션들이 툭, 툭, 알맞은 거리두기로 앉아 있다.

금계 저수지는 소백산의 영봉 비로봉에서 남쪽으로 계곡을 따라 내려오면 있는데 1.5킬로미터에 걸쳐 장선 마을을 감싸고 있다. 계곡은 좁고 걸어서 내려가 볼 수 있을 만큼 낮지만 노송이 우거져 감탄이 절로 나온다.

계곡 중간 정도에 금선정이 있는데 이 주변의 경관이 빼어나다. 이 고장의 대표적 유학자인 금계 황준량(1517~1563)이 금선대라 칭하였다고 전한다. 이후 1756년 부임한 풍기군수 송징계가 금선대란 세 글자를 바위벽에 새겼으며, 황준량의 후손들이 정자를 지어 금선정이라고 이름을 붙였다. 이 계곡을 금선 계곡이라고 부르는 것도 여기에서 유래하였다.

 

정조 5년(1781)에 이한일이 풍기 군수시설에 금선계곡의 금선대에 정자가 세워진후 금선정이라는 이름이 붙였다

 

<정조 5년(1781)에 이한일이 풍기 군수시설에 금선계곡의 금선대에 정자가 세워진후 금선정이라는 이름이 붙였다.
<정조 5년(1781)에 이한일이 풍기 군수시설에 금선계곡의 금선대에 정자가 세워진후 금선정이라는 이름이 붙였다.

계곡을 흐르는 물소리와 노송을 흔드는 바람 소리, 그 속에서 가끔씩 들리는 새소리를 들으며 앉아 있으니 내가 누구인지, 여기가 어디인지 잠시 잊어버렸다. 멍 때리기. 이런 곳에서 누군가는 명상을 즐기고 누군가는 추억에 젖으련만 단세포인 나는 아무 생각이 없다. 그저 머릿속이 터~엉 비고, 가슴도 터~엉 빈다. 유체이탈을 한 것처럼 몸은 물가의 너른 바위 위에 빨래처럼 뉘여놓고, 정신은 바람을 따라 춤을 추며 십승지 중의 제 1승지를 돌아다닌다.

 

 

 

 

 

김덕기 법학박사/부동산학박사

- 연세대학교 이학사

- 성균관대학교 문학 석사

- 건국대학교 부동산학 석사·박사

- 동국대학교 법학 박사

- 전) 법무법인 하우 부동산·금융 수석 전문위원

- 현) 건국대학교 부동산 대학원 겸임교수

- 현) 동국대학교 법학대학 일반대학원 겸임교수

- 현) 부동산포털 한국도시환경헤럴드 발행인

- 현) 법률사무소 두남 고문

- 현) 주식회사 두남씨앤디 대표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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