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무릉도원 봉화에서 노닐다

봉화의 구석구석(1)

 

사제(沙堤)

이 마을은 1450년경에 平時署令(평시서령) 挑村(도촌) 李秀亨(이수형)이 개척한 마을이다. 그 후손 우계 이씨들의 집성촌이다. 벼슬을 버리고 초야에 묻혀 살며 중국의 산촌 지명을 쫓아 武陵桃源(무릉도원)이라 부르다가 이수형 선생이 도학을 숭상하여 마을 명칭을 도지미(道知味)라고 고쳐 불렀다. 그러다 어느해 낙화 암천이 수해로 범람하여 주민들이 모래로 제방을 막고 큰비가 오면 모래 제방을 근심하였다하여 사제로 불리어지게 되었다고 한다.

 

김댕이(金塘)

옛날 마을이 형성되기 전, 서쪽 산 밑에 작은 연못이 있었는데 그 위치가 서쪽에 있다하여 陰陽五行說(음양오행설)에 의하여 金字(금자)를 따서 金塘(금당)으로 명명되었으나 오랜 세월이 흐르는 동안 어원이 변하여 김댕이 또는 짐댕이로 불리어지고 있다.

 

신흥리(놋점거리)

조선조 중기 때, 맹씨 성을 가진 사람이 이곳에서 처음으로 유기(놋그릇)을 만들기 시작하였다. 전성기에는 전국 수요의 절반 가량을 이곳에서 생산하였다. 유명한 안성유기도 이곳으로부터 전래되었을 정도로 번창하여 새로 일어선 마을이라 하여 신흥리라 불렀다.

이 마을에서는 쇳물을 녹여 일정한 틀에 부어 만드는 주물식 제작방법과, 쇳물을 덩어리로 만들어 처음부터 두들겨 만드는 방자식 방법을 써서 유기를 만들었는데 각 지방 사람들이 많은 돈을 지불하고 그 기술을 배워 갔기 때문에 한국유기, 즉 놋점으로 유명하였다.

그 후 일제시기에 놋그릇 징발과 근세의 연탄사용으로 유기의 부식과 플라스틱 및 스텐제품의 출현으로 쇠퇴하여 간신히 그 명맥을 유지하여 왔다. 최근에는 옛것을 선호하는 현대인의 욕구로 주문이 쇄도하여 생산량이 날로 증가 추세에 있다.

 

선돌(立石)

원래 마을 한쪽 초당골에 함양 여씨들이 살았으나 약300년 전에 권상중 선생이 안착하여 안동 권씨들이 집성을 이루어 살았다. 마을이 地蛛結網(지주결망)의 형상, 즉 거미가 줄을 쳐 마을을 감고 있는 형상을 하고 있다. 마을 입구에 모복암, 복부바위, 탕건암과 사복암이라는 큰바위가 서 있어 立石(입석)이라 부르다가 선돌(서 있는 돌)로 바꾸어 부르게 되었다.

 

구무고개, 구구목, 구현(龜峴)

1560년 경부터 마을이 형성되었다고 전하며 중마 북쪽에 위치한 마을이다. 예전에 닭을 치는 양계장이 있었다고 하여 구구목이라고 했다. 또 옹기를 구운 구멍이 있었다고 구무 고개라하고, 산에서 보면 마을이 거북처럼 생겼다고 해서 구현(龜峴)이라고 한다. 이곳은 물야면 북지3리 동막 부락과 연결되며 안동 권씨가 집성촌을 이루어 살고 있는 마을이다.

 

토일(吐日), 토곡(吐谷), 묘곡(卯谷)

닭실 동쪽에 위치하고 있으며 吐日(토일)이란 이름은 새벽에 둥근 해가 마을 앞에 있는 산에서 토해내듯이 솟아오른다고하여 붙여졌으며, 또한 일출시간인 묘시(卯時)쯤 되면 해가 이 마을 골짜기에서 솟아나기 때문에 卯谷(묘곡)이라고도 한다.

사그막골

토일 부락의 남쪽에 위치한 마을로서 沙器幕(사기막)이 있었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옛날 어느 시골 장날에 스님이 만냥 짜리 쇠(지관이 묘 터를 잡을 때 쓰는 磁針<자침>)을 사라고 외치며 다니는데 한사람이 사겠다고 나서자 둘이서 재산으로 가 명당을 잡아놓고 왔다.

소문을 들은 안동 권씨들이 그 스님을 잡아다가 묘 터를 내놓으라고 강요하자 이에 화가 난 스님이 九蛇爭蛙(구사쟁와)의 나쁜 터를 잡아주고는 20년 뒤에 와보니 권씨들이 망하기는 커녕 더욱 흥하고 있었다.

이에 묘터를 확인해본 결과 그곳은 九龍爭珠(구룡쟁주)의 명당이었다는 전설에 의해 사동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송생이(松生)

해방 전에는 약 30여 호가 사는 큰 동네였으나 6.25이후 타동네로 이주하여 현재는 3농가가 살고 있으며, 골이 깊고 질이 좋은 소나무가 많이 자생한다하여 송생이라 붙여진 지명이다. 임진왜란 때는 송씨들의 피난처였다고 하며 송이가 많이 나기도한다.

두릉골(杜陵谷)

마을 형상이 두견새의 등과 같으며 마치 새가 나래를 펴고 앉아있는 형국이라 하여 두릉골이라 불리어지고 있다. 또한 이곳에는 관찰사를 지낸 물암 金隆(김륭)이 학문을 연구하기 위하여 건립한 두릉 서당이 있다.

소지골ㆍ소주골ㆍ소지(小地)ㆍ소주곡(小注谷)

1370년경에 이 마을(현재6반)에 작은 연못이 있었기 때문에 부르게 된 이름이다. 긴 골을 따라서 형성된 마을이 마치 소죽통처럼 생겼다고 하여 소주골이라 불렀다고 하기도 한다. 적덕2리의 주민들 대부분이 이 소주골 안에서 생활하고 있다. 소주골은 산은 높지 않지만, 산세가 좋아 옛부터 8명산 12골이란 말이 전해지고 있는데 이를 뒷받침하듯이 여러 문중 재사(齋舍) 수십 개소가 있었으며 현재도 여러 문중의 재사가 남아 있다.

옹기골

일제치하인 1940년경 인근 지역 붉은댕이의 흙을 파다가 옹기를 구워서 옹기골이라 하였다. 꾸준히 옹기 제작을 하였으나 지금은 각종 금속 제품과 유리제품에 밀리고, 옹기 굽는 기술을 전수 받을 사람이 없어 1992년부터 생산이 중단되었다. 당시 옹기를 굽던 가마터와 요는 현재도 보존되어 있다.

 

안더구(內得耳)

해저1리 높은 산에서 해저3리를 보면 지형이 동물의 귀 모양을 하고 있어

"得耳(득이)"로 불렀다. 구전과정에서 변하여 현재는 더구로 부르고 있다. 이와 같은 형태의 마을이 두개로 안쪽에 위치한다고 안더구라고 부르게 되었으며, 70~80년 전에 구씨가 상당히 많이 살고 있었다. 현재는 한가구도 살고 있지 않다.

송내

옛날에 웃동네와 아랫동네를 솔밭으로 경계를 짓고, 마을 전체가 솔밭으로 둘러 싸였기 때문에 솔안(松內<송내>)이라 한다. 원래 전주이씨들이 세거한 마을이며 조선조 眞一濟(진일제) 柳崇組(류숭조)의 후손들이 안착한 곳이며, 진일제 사당을 보유하고 류씨들 7호가 살고 있다.

매방산은 586m로 지방에서 비교적 높은 산으로 산의 기가 강하여 무당 등 무속이 많이 행하여지는 신산이다. 매배이는 매봉산 남쪽 기슭에 위치한 아담하고 자그마한 마을로 매방산에서 유래되어 매배이 또는 매봉이라고 한다.

망년(亡年)

이 마을은 1560년에 안동 권씨가 개척하였다. 이 마을에 90살이 넘게 장수하고 있는 노인이 15명이나 되어 세월 가는 것을 잊고 산다고 하여 망년이라고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꽃내ㆍ골래ㆍ花川(화천)

조선조 중종 때, 무안박씨 중시조인 박전이 죽은 후 부인의 꿈에 나타났다. 그가 이르기를

‘내가 흐르고 뒷산에 산당화가 피는 곳을 찾아 정착하라’

하여 부인이 아들을 데리고 이곳에 안착하였다. 봄이면 산당화가 만발하여 그 꽃잎이 마을 앞 냇물에 떨어져 꽃내라고 부르던 지명이 세월이 흐르면서 변형되어 골래로 불리었다.

 

두남(斗南) 김덕기(金德起)

건국대학교 부동산학박사

동국대학교 법학박사

현) 건국대학교 부동산 대학원 겸임교수

현) 법무법인 하우 부동산∙ 금융 수석 전문위원

현) 박문각 부동산 풍수 강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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