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면해설방송을 진행 중인 이선영 아나운서
화면해설방송을 진행 중인 이선영 아나운서

여러 낯선 직업 중 ‘화면해설가’라는 직종이 있다. 화면해설가는 시각장애인들에게 영상을 설명해주는 직업이다. 이선영씨(40세)는 YTN에서 시각장애인을 위해 그들이 보지 못하는 세상을 들을 수 있도록 ‘눈’ 역할을 하는 화면해설가로 2년째 일하고 있다.

선영씨는 어린 시절 한 라디오 음악 프로그램을 듣다가 DJ의 목소리 매력에 푹 빠졌다. 이것은 그녀 인생의 전환점이 되었다. 그녀는 꿈을 꿨다. 많은 사람에게 위안을 주는 아름다운 목소리의 주인공이 되자. 선영씨는 자신의 인생 목표를 결정했던 그때를 이렇게 기억했다.

“어릴 적 라디오 DJ 목소리에 반해 방송인을 꿈꿨습니다. 그리고 교내 방송국에서 마이크를 잡은 것이 방송 일의 첫 시작이었죠.”

 

1부, 나의 목소리를 사람들에게 처음으로 들려준 곳

목소리로 사람들에게 도움을 주고 싶다는 꿈을 품은 선영씨는 방송과 예술로 특화된 동아방송예술대학교 방송연예과에 지원했다.

“이 대학에 무조건 입학할 거야!” 당차게 입시 원서를 냈지만, 면접장에 도착한 선영씨는 주눅이 들었다. 선영씨가 지원한 방송연예과는 연기자, 개그맨, 아나운서 등의 꿈을 가진 재원들이 모이는 곳이다. 면접장에는 예쁘고 멋진 지원자들이 수두룩할 수밖에 없었다.

“면접장에 온 지원자들을 보고 ‘나는 틀렸구나! 떨어지겠다. 이곳은 내가 올 수 있는 곳이 아니구나’ 하며 의기소침했던 기억이 생생합니다.”

주눅이 든 순간에도 그녀는 자신의 꿈을 되뇌었다. 오기가 났다. 여기까지 왔는데 면접을 포기하고 떠날 수는 없다고 마음을 먹는 순간 어디선가 힘이 솟구치는 것을 느꼈다. 그녀에게는 면접을 위한 비장의 무기도 있었다.

학과 특성상 지원자 대부분은 드라마 연기를 준비했을 것이고, 선영씨는 이 점을 공략할 전략으로 다른 지원자들과 차별화된 독특한 개인기를 준비했었다. 나름대로 경쟁력이 있는 전략이었다. 실제 라디오 프로그램에서 DJ와 게스트가 대화하는 스크립트를 구성했다. 이 스크립트에 자신의 지원동기를 일본어로 설명하는 플롯도 삽입했다. 그녀의 창의적인 구상은 ‘합격증’을 안겨주었다.

그녀는 대학에 입학하자마자 교내 방송국 아나테이너팀에 지원했다. 수습 국원이 된 후 방학 중 합숙은 물론, 학기 중에도 꾸준히 방송 교육을 받으며 꿈을 키워갔다. 하계 합숙을 거친 뒤 정국원이 된 선영씨는 본격적으로 교내 아나운서로서 마이크를 잡게 됐다. 아침, 점심, 저녁으로 교내 확성기에는 그녀의 목소리가 가득 울려 퍼졌다. 자신의 목소리를 많은 사람에게 들려준다는 것은 상상 그 이상으로 즐거운 일이었다.

평소에 튀지 않는 조용한 학생이었지만, 마이크를 잡는 그 순간 그녀는 누구보다 빛나는 사람이 되어갔다. 그녀의 교내 방송을 들은 한 성우 선배는 “선영이 방송 잘하네”라고 칭찬했다. 짤막한 칭찬이었지만 그녀는 그 칭찬으로 꿈에 대한 열정을 더욱 부풀릴 수 있었다.

“2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잊을 수 없는 최고의 순간이었어요. ‘내가 방송을 할 수 있겠구나!’하고 자신감이 차오르던 순간이었어요.”

 

1부를 마치고 2부로, 10년 차 교통캐스터 이선영

졸업 후 선영씨는 경기FM 라디오 방송에서 57분 교통캐스터로 일하며 방송계에 처음 발을 들였다. 이곳에서 방송 경력을 쌓은 뒤에는 한국도로공사로 직장을 옮겼다. 어린 시절 꿨던 꿈을 이룰 수 있는 직장이라고는 생각하지 않고 시작했지만, 선영씨는 이곳에서 열정을 불사르며 10년의 젊은 시절을 보냈다.

교통캐스터로 일한 선영씨의 업무는 전국 CCTV를 보며 교통상황을 파악하고 정리해 1분 내로 상황을 전달하는 것이었다. 생방송으로 진행되기 때문에 ‘긴장감’은 언제나 짝꿍처럼 따라다녔다. 하지만 그러한 심적 부담감은 순발력과 전달력을 길러주는 좋은 영양제가 됐다.

그러나 긴장감 외에도 그녀를 힘들게 하는 것이 또 있었다. 바로 사고 현장을 지켜보는 것이다. 추돌사고, 화재사고, 동물 교통사고 등 여러 교통사고 현장을 보면서 실시간으로 사고 소식을 전달해야만 했다. 그중에서도 교통사고로 목숨을 잃은 아이에게 다가가지 못하고 망연자실하고 있는 어머니의 모습은 잊고 싶어도 잊을 수 없는 안타까운 기억이다.

 

2부에서 3부로, ‘도전’이 새로운 일을 만든다

방송인으로서 꿈을 펼치던 선영씨가 잠시 주춤했던 시기가 있다. 그녀는 결혼 때까지 아나운싱 일을 놓아본 적이 없었다. 하지만 세 아이의 어머니가 되어 처음으로 방송을 떠나게 됐다.

방송을 떠나게 된 시기에는 방송에 대한 허전함을 지울 수 없었다. 바쁘고 힘든 육아 생활 속에서 ‘엄마’라는 행복감은 대단했지만, ‘방송하던 이선영’이 그립기도 했다.

결국 선영씨는 방송에 복귀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방송하던 이선영’을 다시 찾고 싶은 갈망 때문이었다. 그녀는 자신이 무엇을 할 수 있을까를 고민했다. 그 순간 자신의 인생은 늘 도전의 연속이었고, 도전하면 큰 성공은 아니었지만, 조그만 만족감이 자신에게 돌아왔었다는 생각이 또 다른 도전을 마음먹게 했다.

“‘‘경단녀’라는 말은 내가 포기하지 않는 한 내 사전에 없는 단어다’라는 말을 실현하고 싶었습니다. 나이를 잊고, 열정을 이어온 ‘목소리’에 진지한 사람으로 기억되면 좋겠네요.”

‘경단녀’가 된 선영씨를 일으켜줄 사람은 그 누구도 아닌 바로 ‘자신’이었다. 그녀는 “누가 날 써주지 않는다면 내가 만들면 되지”라는 생각에 유튜브 채널을 개설했다. 평소 책이 주는 재미와 감동을 좋아했던 그녀는 ‘책’을 소재로 하는 유튜브 콘텐츠를 제작했다. 유튜브 채널을 운영하는 일은 생각만큼 쉽지 않았다. 하지만 그녀는 조급해하지 않았다. 그녀가 열정을 다해 한 일은 언제나 그녀에게 선물 같은 기쁨을 주었기 때문이다. 현재 그녀는 자신의 속도에 맞춰 천천히, 그러나 꾸준한 유튜버가 되기 위해 노력하는 중이다.

“다양한 경험이 중요하다고 생각하고, 새로운 일에 도전하는 것을 좋아해요. 또 도전은 새로운 일을 만들어주기도 하죠.”

유튜버로서 다시 방송 일을 하는 데에는 다양한 지식과 실무가 필요했다. 생각이 인생을 바꾼다는 격언처럼, 도전하고 노력하면 무엇인가 이루어진다는 그녀의 생각이 ‘새로운 도전을 좋아하는 이선영’을 만들었다. 그녀는 유튜브 방송이 아니더라도 그녀의 ‘목소리’가 필요한 곳이라고 부르면 어디든 달려갔다.

도전이 안겨준 조그만 성공으로 2018년 ‘청렴컨텐츠 공모전’에 참가해 그녀는 ‘강연 부문’ 우수상을 받았다. 이 도전은 그녀에게 자신감과 함께 더욱 큰 도전 정신을 안겨줬다. 이것이 계기가 되어 현재 그녀는 국민권익위원회 청렴연수원의 행사 ‘청렴라이브’에서 3년 넘게 진행자로 일하고 있다. 그녀의 도전은 한 곳에 그녀를 머물지 않게 하고 언제나 새로운 일을 만드는 중이다.

 

3부에서 4부로, 누군가의 ‘눈’이 되어 주는 화면해설가 이선영

“영상을 소리로 바꾸는 일은 언제나 새롭고 재밌습니다. 또 뉴스를 실시간으로 시청하며 하는 일이라 새로운 뉴스와 언제나 함께한다는 매력도 있죠.”

“목소리가 필요한 곳이 있는데, 한번 해볼래?”라는 한 선배의 제안으로 선영씨는 화면해설가 일을 시작했다. 갑작스럽게 받은 제안이었기에 준비할 틈도 없었지만, 그동안 열성적으로 임했던 아나운싱 경력에서 탄탄하게 쌓아온 실력 덕분에 곧바로 현장에 투입될 수 있었다. 물론 이 일을 시작할 때, 두려움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처음에는 낯설고 두렵기도 했는데, 이제는 인생에서 큰 의미가 되어버렸습니다.”

오랜 방송 경력을 지닌 선영씨더라도 화면해설가의 일은 쉽지만은 않은 일이었다. ‘화면해설가로서 시각장애인들이 장면을 쉽게 이해하고, 그들의 머리에 영상이 그려지도록 설명할 방법은 무엇일까?’ 이는 늘 그녀의 머릿속을 맴도는 고민이다. 이 고민은 단순한 직업으로서의 사명감을 넘어서 그들의 눈이 되어 주어야겠다는 사명감 때문에 주어지는 중압감으로 다가왔다.

“시각장애인들의 ‘눈’이 되어 주어야 한다는 부담감과 잘 만들어진 방송이 내 목소리로 지저분해지면 안 된다는 생각에 걱정이 많았습니다.”

화면해설가 일은 그녀에게 초조함을 안겨주기도 했다. 화면해설가는 대부분 홀로 작업한다. 생방송을 진행하려면 뉴스에 나오는 소식들을 곧바로 요약하고 혼자 해설 원고를 작성해야 한다. 가끔씩 그녀는 ‘내가 헛일을 하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에 휩싸인다고 말한다.

“나는 이렇게 열심히 하는데, ‘누가 듣고는 있나?’ 하는 생각이 들면 무기력해져요.”

혼자 일하는 힘겨움과 그녀의 무력감에 휩싸인 그녀를 구출시켜 준 것은 어느 날 YTN으로 걸려온 시각장애인의 한 통의 전화였다.

“YTN의 화면해설방송을 잘 듣고 있어요. 감사합니다.”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뿌듯함이었다. 자신의 목소리가 필요한 사람에게 도움을 줬다는 사실은 그녀의 가슴을 벅차게 만들었다.

 

마지막 5부, 여전히 도전을, 하지만 천천히.

대학생 시절부터 자신의 목소리로 다양한 도전을 해온 선영씨의 열정은 아직 식지 않았다. 그녀는 여전히 목소리가 필요한 곳에 도움을 주는 사람을 꿈꾼다. 지금도 꾸준히 스피치 강의를 하며 자신이 필요한 곳에 도움을 주고 있다.

“최고가 되려고 하지 말고, 길이 하나라고만 여기지 말고, 빨리 이루려고 초조해하지 말아요.”

그녀는 지금 또 다른 꿈을 꾼다. 그것은 그녀의 일본어 소통 능력을 더욱 키워 해외특파원에 도전하고 싶다는 포부다. 하지만 그녀는 조급해하지 않는다. 그녀는 자신의 속도에 맞춰 천천히 노력하다 보면 그런 일이 자신에게 찾아올 것이라는 믿음이 있다. 꿈을 이루기 위해 사회에서 고군분투하는 청년들에게 인생의 선배로서, 함께 무언가에 도전하는 사람으로서 따뜻한 조언과 응원을 건넨 것이다.

『이선영』이란 이름의 책을 내고 싶다고는 포부도 밝혔다. 자신이 겪어온 삶 속 고통과 기쁨 그리고 영광이 누군가의 인생 길잡이가 될 수 있기를 바라면서 자신의 이야기를 엮어내고 싶다고 말한다. 그러나 자신의 이야기는 아직 미완성이고 아직도 도전하고 이루고 싶은 일들이 있어 이것들을 해가면서 언젠가는 그 책을 완성하겠다고 말한다. 언젠가 발간될 그 책을 펼쳐본다면, 누구라도 도전을 사랑하는 선영씨와 함께 ‘새로운 도전’을 그려볼 수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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