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 디즈니플러스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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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월 9일에 인천소방서에 26년째 근무 중인 문혜남씨(54세)를 만났다. 혜남씨는 청라 119안전센터 3팀장으로 화재 현장에서 팀원 열 명을 데리고 지휘하고 민원 등의 사무 업무를 총괄하는 일을 하고 있다.

 

가족들과 직장 동료 사이에서도 짠돌이라 불리는 그는 어디서나 돈을 아껴 쓰기로 유명하다. 그는 자신이 돈을 아껴 쓸 때마다 주변 사람들은 공무원이면서 그렇게까지 해야겠냐고 타박을 준다고 말했다. 그가 유일하게 큰 돈을 쓰는 경우는 가족의 건강을 위한 건강식품이나 안마기 같은 건강용품을 살 때이다.

 

“돈 벌려고 들어갔죠. 내가 기술이 있어요? 뭐가 있어요? 집이 장사를 하니까 월급쟁이 한 명은 있어야죠.”

 

구수한 목소리에 장난기 서린 얼굴을 한 혜남씨는 특별한 이유가 있어 소방관이 된 것은 아니라고 말한다. 그가 소방관이 된 이유는 예상보다 간단했다.

 

“제가 소방관이 된 이유는 봉사 정신이 있어서도, 특별한 계기가 있어서도 아니에요. 굳이 말하자면 소방관이 안정적인 직업이니까 소방관을 선택했죠.”

 

축구선수를 꿈꿨던 소방관

어릴 적 혜남씨의 꿈은 축구 선수였다. 용돈을 모아 동대문 인근 스포츠 전문 상가에 가서 가죽으로 된 서경 축구화도 샀었다고 어린 시절 꿈을 말하는 그의 눈빛은 초롱초롱 빛났다. 그는 매일 아침 집 뒷산인 남산에 올라 드리블 연습을 하며 축구 선수의 꿈을 키웠다.

 

혜남씨가 초등학교 시절 남자아이들은 방과후가 되면 축구하려고 운동장에 모이곤 했다. 그때 혜남씨는 축구 게임에 끼워줄 아이들을 선별하고 관리하는 역할을 했다. 그가 친구들 사이에서 축구를 제일 잘했기 때문이다.

 

“제가 학교에서 축구왕으로 불렸어요. 학교가 끝나면 축구 하고 싶어 하는 애들이 많거든요. 그 애들한테 ‘너는 끼고 너는 빠져있어라’하고 관리하는 게 바로 저였어요. 다들 저랑 같은 팀에서 경기를 하고 싶어 했거든요”

 

혜남씨는 사남매 중 셋째아들이다. 혜남씨가 중학교에 접어들 때 부모님이 하시던 장사가 어려워지면서 첫째 누나가 동생들을 모두 도맡아 키우게 되었다. 그는 동생들을 돌보느라 자신을 돌볼 겨를도 없는 첫째 누나를 보며 자랐다.

 

혜남씨도 더는 축구를 할 수 없게 되었다. 그의 성적은 하위권이었고, 가정 형편이 어려워진 그에게는 안정적인 일자리를 얻기 위해 공부에 매진하는 것이 우선이었다. 결국 그는 축구를 포기해야 했다.

 

혜남씨는 대학 입시를 앞두고도 미래의 직업을 선택하지 못했다. 딱히 하고 싶은 직업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는 다른 이유 없이 취업률이 높은 소방학과에 지원했다.

 

“제가 고등학생이었을 때는 점수별로 대학이나 학과를 선택하던 시대였는데, 갈 수 있는 학과 중에 취업률이 가장 높은 곳이 경찰이랑 소방 관련 학과였어요. 그때 내신은 15등급이었는데, 저는 7등급 정도 됐거든요. 근데 경찰은 맨날 범인이랑 싸우니까 가기 싫었고, 그다음으로 취업률이 높은 학과가 소방학과였기 때문에 지원하게 됐죠.”

 

다사다난한 소방 일, 바라왔던 월급쟁이로 사는 삶

자신의 직업에 대해 깊게 생각해본 적 없던 혜남씨에게 소방관은 드라마에서처럼 멋있고 명예로운 직업이었다. 하지만 현실은 드라마와 달랐다. 소방관 중에는 솔선수범해 불을 끄는 용감한 사람도 많았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들도 많았다.

 

주택에 불이 났다는 신고를 받고 다른 팀원들과 화재 현장에 최초로 도착한 혜남씨가 방호복을 입고 화재 진압에 들어가려는데, 소방차 주변에 방호복을 입은 채 서성이는 동료 신입 팀원을 발견했다. 화재 현장에 들어가는 게 무서워서 소방차 주변에 숨어있던 것이다.

 

“드라마에 나오는 소방관은 다 밝고 활기차고, 성실한데 뭐든지 다 잘하고, 명예롭잖아요. 실제 일하면서 그런 캐릭터를 가지고 있는 사람은 백 명 중의 한두 명 본 것 같아요. 다 같은 사람이고, 힘들고 무섭지만 내 일이니까 버티는 거죠.”

 

혜남씨는 신입 팀원이 그 일로 많이 혼났지만, 한편으로는 같은 신입으로서 공감이 됐었다고 말했다. 그도 당시 마음 한편에는 불 앞에서의 두려움이 있었기 때문이다.

 

“저도 당연히 무섭죠. 제가 무슨 슈퍼맨인가요? 아직도 현장에 나가는 차 안에서 긴장을 바짝 하고 있어요.”

 

혜남씨는 아직도 현장에 나갈 때마다 바짝 긴장한다. 위험한 현장에서 일하게 되면 사고가 자주 일어나기 때문이다.

 

특히 위험물이 있는 공장이거나 야간 또는 어두운 환경일 때 사건, 사고가 자주 일어난다. 인터뷰하기 전날에도 검단동의 한 공장에 불이 나 네 시간 동안 화재 진압을 했다.

 

터널 안에서 일어난 화재는 더 위험하다. 바다 밑을 통과하는 해저 터널인 북항 터널에서는 매달 다섯 번 이상 교통사고가 난다. 트럭이 빠르게 달리다 터널 안에서 구조 활동을 하는 대원을 못 보고 덮치는 경우도 있었다.

 

소방관을 그저 돈을 벌기 위한 직업으로만 생각했던 혜남씨에게 소방 일은 생각보다 더 힘든 일이었다. 게다가 혜남씨는 신입이라 월급도 적었다. 생명이 오가는 위험한 일을 하면서 일에 대한 두려움도 생겼다.

 

2018년 5월 인천 연안부두 선박 화재 현장에도 혜남씨는 출동했다. 연안부두 선박 화재는 인천항에 정박 중이던 파나마 국적의 오토배너호 5만t급 차량 화물선에서 화재가 발생한 사건이다. 이로 인해 배에 실려 있던 중고차 1,460대가 모두 타버렸다.

 

3일 내내 세 개 팀이 교대하는 방식으로 혜남씨는 화재진압에 참여했다. 무려 72시간 동안 화재진압을 하느라 현장에서 숙식을 해결해야 했다.

 

소방관들을 위해 마련된 휴게 천막은 좁고 시끄러워 제대로 쉴 수도 없었다. 그는 마당에 있던 중고차 중 가장 크고 좋은 차를 골라 그 안에서 먹고 자며 숙식을 모두 해결했다. 그나마 날씨가 춥지 않았고, 빵이나 라면 등의 음식은 공급이 잘 되어 다행이었다.

 

인천 연안부두 화재는 혜남씨에게 가장 고된 경험 중 하나이다. 그는 중고차 안에서 자면서 일을 그만두고 집에 가고 싶다는 생각을 수십 번이나 했다. 집에서 자고 있을 아내와 아들이 절로 생각났다.

 

혜남씨가 소방 일을 하며 괴롭고 힘든 일만 겪었던 것은 아니다. 2000년 4월 강원도 동해안 산불 화재 사건에서 혜남씨는 소방 일에 대해 경이로움을 느꼈다. 강원도 동해안 산불 화재는 고성군에서 시작된 산불이 8일 동안 삼척, 강릉을 거쳐 경상북도 울진까지 번진 대한민국에서 가장 큰 규모의 화재다.

 

당시 산불을 진압하기 위해 전국 각지에서 소방력이 동원되었다. 강원도 산불에 투입된 전국 소방인력만 3,251명, 소방차는 872대일 정도로 단일 화재로는 역사상 최대 규모의 전국 소방력이 동원되었다. 그도 인천에서 출동해 강원도로 향하던 중 각지에서 출동해 고속도로를 꽉 채운 소방차들을 보게 된다.

 

“산불을 진압하러 가는 소방차가 도로를 1km 이상 꽉 채우면서 사이렌이 울리고 반짝반짝하는 장관이 아직도 기억에 생생해요.”

 

그때의 일을 회상하는 그는 그날 본 수많은 소방차를 ‘장관’이라고 비유했다. 소방 일을 하면 주로 참혹한 현장이나 정신없는 분위기 속에서 일할 때가 다반사다. 산불을 진압하기 위해 달려온 소방차들 사이에 있던 혜남씨에게 이 광경은 자신의 일이 가장 아름답게 보였던 순간이다.

 

예상치 못했던 트라우마, 처음 느낀 내 일의 책임감

혜남씨에게 소방관은 ‘안정적인 직업’이었다. 그는 소방관은 사람을 구하고 살리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죽음에 대한 트라우마는 그가 전혀 생각해보지 못했던 두려움이었다.

 

혜남씨는 소방관이 된 지 1년 채 안 됐을 때 처음으로 인명 피해가 있는 화재 현장을 겪은 뒤 트라우마가 생겼다.

 

“아직도 그 생각을 하면 3~4일은 잠자다가 꿈을 꿔요.”

 

인터뷰 내내 밝은 표정으로 말하다 처음으로 그늘진 그의 얼굴에서 이 일이 그에게 얼마나 괴로운 기억인지 알 수 있었다. 혜남씨는 트라우마가 생긴 후 일에 대한 회의를 느꼈다. 아무리 돈을 벌기 위해서라지만 왜 이렇게까지 고통 받으며 이 일을 해야 하는지 의문이 들었다.

 

소방관에게 PTSD는 피할 수 없는 숙명이다. PTSD는 심각한 외상을 겪은 후 나타나는 불안 장애로, 실제 소방공무원의 PTSD 유병률은 19~23%로 일반 인구보다 5배 높은 수준이다. PTSD를 겪은 소방관이 트라우마로 인해 휴가를 내는 경우도 많다.

 

그는 일뿐만 아니라 일상에서도 고통을 받았다. 밤에 잘 때마다 꿈을 꾸고 자신이 구조한 사람이 살았는지 죽었는지도 몰라 수시로 생각이 났다.

 

사건이 일어나고 두 달도 넘게 지났을 때 혜남씨는 편지 한 통을 받았다. 자신이 구조했던 사람 중 한 명이 보낸 감사 편지였다.

 

“나는 봉사 정신이 투철한 사람도 아니었는데, 편지를 읽고 나니까 내가 여기서 오래 버텨야겠다는 생각을 했어요.”

 

그는 지금까지 소방 일을 하며 초등학생이 단체로 쓴 편지나, 인터넷으로 감사의 글을 받은 적이 몇 번 있었다. 하지만 혜남씨는 이때 받은 감사 편지가 가장 기억에 남는다고 말한다. 힘들게만 생각했던 자신의 일이 얼마나 사람들에게 필요하고 가치 있는 일인지 깨달았기 때문이다.

 

중요한 건 내 일의 가치를 찾는 것이다

그는 동료들과 당직을 서다 배고플 때가 되면 피자를 배달 시켜 먹는다. 한 판만 시키자는 그에게 동료들은 늘 “내라고 안 할 테니 두 판 시키자”라고 말한다. 그제야 그는 편한 마음으로 피자를 먹을 수 있다.

 

“사람들이 저에게 짠돌이라고 말하지만, 저는 가족한테는 돈을 아끼지 않아요. 조카들한테도 꼭 용돈을 챙겨줘요. 여유로운 조카한테는 조금만 주고, 어려운 조카한테는 많이 챙겨주거든요. 또 이렇게 미리 모아놔야 나중에 퇴직하고 아들을 잘 키우죠.”

 

혜남씨는 어릴 때 가정 형편이 어려워서, 신입 때는 월급이 적어서, 그리고 지금은 가족들의 미래를 위해 짠돌이로 살 수 밖에 없다고 말한다. 어려운 가정 형편에 도움이 되고 싶어 소방관이 됐을 때처럼, 혜남씨에게 일 순위는 언제나 가족이다.

 

“1월에 직장동료랑 가족과 함께 제주도로 여행 가기로 했는데, 저는 따로 11월에 간다고 하고 가족이랑 갔다 왔어요. 숙소 값이 11월에 더 싸거든요. 누나가 저한테 너는 그렇게까지 돈을 아끼냐, 대체 왜 그러냐 잔소리하더라고요. 그런데 1월에 가족들이랑 제주도에 또 가기로 했어요. 저희 어머니도 가고 싶다 하셨거든요. 동료들한테는 비밀로 해야 해요.”

 

그는 아직도 돈을 벌기 위해 소방관을 한다고 말한다. 하지만 예전과 다른 점이 있다면, 봉사 정신을 가지고 일을 한다는 것이다. 그가 찾은 봉사라는 일의 가치는 그가 일을 포기하지 않고 계속하게 하는 힘이다.

 

“처음에는 남을 돕는다거나 봉사를 하는 데에 관심이 없었어요. 지금은 화재 현장에 가면 현장을 전체적으로 둘러보고 ‘저 사람 다치면 안 되겠구나’라는 생각이 가장 먼저 들어요. 가족을 위해서 돈을 벌려고 직장에 나가는 거긴 하지만, 이런 마음이 없었다면 지금까지 버티지 못했을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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