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물을 지을 때 벽돌을 쌓는 일을 조적이라고 한다. 흔히 노가다, 막노동이라고 불리는 이 일은 ‘벽돌을 쌓는다’는 간단한 일 같지만, 일정한 간격으로 평평하게 쌓지 않으면 금방 무너질 수 있기에 섬세한 기술을 필요로 하는 작업이다. 지난 10일 경기도 안성에서 조적공으로 일하고 있는 이철희씨(46세)를 만났다.

 

“공장에도 다녔고, 악세사리도 팔아봤고, 화장품도 팔아봤어요. 저도 처음부터 이 일을 하고 싶었던 건 아니었죠.”

 

3남 2녀 5남매의 막내. 큰 형과는 13살 차이의 막둥이로 태어난 철희씨는 어려서부터 부모님의 사랑 받기가 힘들었다고 고백했다. 산에 벌목할 일이 있으면 일용직 노동을 하러 자주 집을 비우셨던 아버지, 시장에서 장사를 하시던 어머니. 끼니를 채우기도 벅찬 정도의 생활을 하던 그는 어린 시절을 이렇게 회상했다.

 

“부모님이 이른 새벽 일을 가시면서도 늘 밥을 해놓고 나가셨어요. 근데 제가 먹으려고 보면 매번 밥이 없었어요. 밥은 적은데 먹어야 하는 사람이 다섯이니 밥을 먼저 먹지 못하면 굶는 날도 많았죠.”

 

부모님은 매일 바빴기에 그를 돌볼 시간이 없었고, 주로 누나들이 그를 보살폈다. 누나들이 그에게 어머니였다. 반대로 두 명의 형은 그에게 공포의 대상이었다. 특히나 13살이나 차이나는 큰 형에게는 훈계라는 이유로 맞는 일이 일상이었다. 초등학교 3학년 때 큰 형에게 얻어맞아 이마가 커다랗게 부푼 적도 있었다. 뒤늦게 병원에 찾아가니 머리 속에 피가 찼다고 의사가 말했다. 수술을 통해 피를 빼냈지만, 폭력이 멈춘 것은 잠깐의 치료 기간뿐이었다.

 

“시골 동네에선 치료할 수가 없어서 기차 타고 대전까지 내려가기도 했어요. 수술이 가능한 병원을 수소문해서 겨우 찾았죠.”

 

집에 형들이 있으면 너무 무서워 집을 나왔고, 집에 혼자 있으면 너무 외로워서 집을 나왔다. 학교에 다니기 전까지 그는 아무 이유 없이 동네를 돌아다녔다. 일부러 사람들이 많은 길거리를 돌아다니다, 배고파지면 이웃집에서 밥을 얻어먹었다. 그러다가 형 누나들이 돌아올 시간에 맞춰 미리 집에 들어가는 것이 그의 하루 일과였다.

 

학교를 다닌 후에도 그 습관은 계속되었다. 학교는 갔지만 끼니를 챙겨주기 때문에 갔던 거였지, 특별한 이유가 있는 것은 아니었다. 부모님과 형들이나 누나들도 그의 성적과 학교생활에 신경 쓰지 않았다. 밥을 먹으러 학교에 가고, 이유 없이 거리를 돌아다니다 집에 오는 것이 일상이었다.

 

그 시기에 그는 길거리에서 친구들을 만났다. 무리 지어 동네에서 또래들에게 돈을 뺏고, 자전거나 오토바이를 훔치며 비행을 일삼았다. 그렇게 비행을 일삼아도 누구도 그를 혼내지 않았다. 그에게 교육이라는 명목으로 폭력을 가했던 큰 형도 시간이 지나면서 독립해 떠났기 때문이다.

 

“목표나 꿈 같은 것도 없었어요. 정말 생각 없이 살았죠. ”

 

고등학교에 진학했지만, 학교에 여러 번 정학당했다. 파출소를 들락날락거리고, 그의 어머니는 훔친 물건값을 변상하고 경찰들에게 사과하는 일이 다반사였다.

 

고등학교 3학년 때에는 시내에서 술을 마시다가 담임 선생님에게 걸려 길거리에서 얻어맞았다. 그렇게 맞다가 홧김에 담임 선생님을 때렸고, 일이 커질 것이 두려워 서울로 도망갔다. 누나가 그를 찾아 서울로 올라와 “이렇게 살 거면 차라리 떳떳하게 자퇴서 내라”는 말에 그대로 집으로 돌아와 자퇴서를 냈다.

 

“그 때도 누나 말을 듣고 뭔가를 결심한 건 아니었어요. 선생님을 때렸으니 어차피 학교도 제대로 못 다닐 것 같았고, 다니더라도 졸업 못할 것 같았거든요.”

 

자퇴하고도 정신 못 차린 것은 마찬가지였다. 가구공장, 석재공장, 길거리 악세사리 좌판 등 수많은 일을 했지만 불같은 성격과 쉽게 흥미를 잃어 6개월도 채우지 못하고 그만두기가 일쑤였다. 결국 그는 돌고돌아 자퇴 2년 만에 어머니가 장사하는 시장에서 어머니를 도와 일하기 시작했다. 험상궂은 얼굴로 시장에서 화장품을 팔았다. 지금의 아내를 만난 것도 그 때의 일이다.

 

“시장을 걸어가고 있는 아내에게 말없이 마스카라를 쥐여줬어요. 제 인생에서 가장 용기내서 한 행동이었죠.”

 

그 뒤로 둘 사이는 빠르게 진전되었고, 어느새 그녀의 뱃속에는 아이가 생겼다. 그의 나이 22살 때 이야기였다. 그때 철희씨는 무언가 거대한 책임감 같은 것을 느꼈다고 한다. 아무런 생각 없이 살 때와는 완전히 달라진 느낌이었다. 더 이상 지금처럼 살면 안 되겠다고 생각했고, 당시 20살이었던 아내와 결혼을 결심했다.

 

화장품 판매를 확장시켜야겠다고 결심한 순간도 그때였다. 화장품이 여름엔 뜨거워서 깨지고, 겨울엔 얼어서 깨지기 일쑤였지만 당시엔 장사 수완이 좋았기에 그는 무리하게 빚을 내서라도 화장품을 대량으로 구매해 판매를 확장했다. 결국 사고는 일어났다. 당시 1500만원 어치의 화장품 중 500만원 어치가 얼어서 깨져버린 것이다. 엎친데 덮친격으로 IMF가 터졌다. 나라 경제가 급격하게 침체되었다. 그 시기 첫째 아이가 태어났다.

 

힘든 상황 속에서 그가 빚을 감당할 수 있는 방법은 ‘카드깡’뿐이었다. 신용카드를 만들고 돌려막기 시작했다. 그러나 사업이 한 번 휘청이자 나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IMF가 끝나니 시장 화장품을 대체할 브랜드 화장품이 생겨났고, 대형 마트가 들어서기 시작했다. 돌려막는 신용카드가 8개까지 불어났다. 결국 그의 화장품 판매는 큰 빚을 남긴 채 신용불량자로 마감됐다.

 

화장품 판매를 그만둔 당시 그는 군대도 가지 못한 상태였기에 일단 군 복무부터 마치기로 했다. 부양할 가족이 있었기에 공익근무를 할 수 있었지만, 공익 생활을 하며 번 돈으로는 생계가 막막했다. 결국 누나들의 가족, 어머니와 함께 세 가족이 한 집에 살았다. 총 9명이 같은 집에 산 것이다. 이마저도 전세를 구하기가 힘들어 몇 번이고 이사를 다녔다.

 

제대 이후에 돈이 급했던 그는 곧바로 둘째 형을 따라 막노동 판에 들어갔다. 작업이 없거나, 눈 비가 오면 일을 못했기에 많이 일하면 한 달에 28일, 적게 일하면 한 달에 5일을 나갔다. 수입이 들쑥날쑥이었다. 막노동을 무시하는 일부 사업자들은 일부러 대금을 늦게 주는 경우도 많았다. 그는 이 시기를 전쟁과 같았다고 회상했다.

 

“일터에서는 아저씨들한테 혼나고, 대금은 받기 힘들고, 그마저도 일이 없으면 못 나갔죠. 집에 돌아오면 아내와도 싸웠어요. 안정적으로 돈을 주는 직장도 있는데 왜 막노동을 나가냐는 거였어요. 그 당시에는 둘째 아이도 있어서 생계가 빡빡했죠.”

 

가구공장, 석재공장에 근무하며 그는 ‘기술이 없으면 발전 없이 단순 노동에 머물 수 밖에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아내와 매일 같이 다투는 상황 속에서도 그가 막노동 일을 택했던 것은 조적 기술을 배우면 공장에서의 월급보다 큰돈을 벌 것이라는 믿음 때문이었다. 매일 5시 반에 일어나 모두 잠든 새벽에 집을 나오고, 해가 떨어질 때 집에 돌아오는 반복적인 일상. 과거라면 금방 포기했을 일상을 그는 가족에 대한 책임감으로 버텨냈다.

 

“매일 막노동을 하고 집에 돌아오면 아내와 다퉜지만, 다음 날 아침이면 눈을 뜨고 일을 나갔어요. 그 새벽에 애들 자는 얼굴만 봐도 몸이 저절로 일터로 향했거든요.”

 

시간이 지나도 일이 안정적이지 못한 것은 변함이 없었지만, 한 해 한 해 지날수록 일당이 점차 오르기 시작했다. 경제가 발전하며 건물을 짓기 시작하니 건설 일도 늘어났다. 그러나 일을 하는 도중 다치는 일도 많았기에 아내는 여전히 그가 하는 일을 반대했다. 하지만 매일 새벽 일을 나가는 모습에 그의 신념을 인정하기로 마음을 바꿨다고 한다.

 

그렇게 철희씨는 현장에서의 기술을 익혔다. 일을 시작할 때부터 함께했던 둘째 형과 계속 일하고 싶었지만, 결국 독립을 결심했다. 자신이 일을 관리해 처음으로 받았던 수익이 일용직으로 일을 배우면서 받았던 돈에 비해 6배가량 많았다. 갚을 엄두도 내지 못했던 빚 역시 조적 일을 하며 전부 갚았다.

 

아이가 생기기 전, 철희 씨는 어릴 적을 회상하며 “오늘 뭐 할지만 생각하며 살았던 시간”이라고 말했다. 부모의 사랑을 받아본 적이 없었고 막내로 자랐기에 자신이 누군가를 책임진다는 건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그런 그가 바뀐 것은 아이가 생긴 뒤였다.

 

현재 그는 신용불량자에서 벗어나 번듯하게 자신의 집에서 어머니를 모시며 살고 있다. 수입이 안정적으로 바뀌었음에도 그의 일상은 변하지 않는다. 여전히 기상은 새벽 5시 반. 해 뜨기 전에 집을 나와 해가 지면 집에 돌아온다. 의미 없이 집 밖을 나서던 어릴 적과는 다르다. 청년 시절에는 금방 포기해버렸을 지겨운 일상이지만, 지금의 그는 20년째 이런 생활을 이어나가고 있다. 그를 움직이게 하는 책임감이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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