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위상씨는 67 세의 나이에 새로운 도전을 하고자 대학교에 들어갔다. 불우했던 어린 시절, 가난에서 벗어나기 위해 수많은 일들을 해왔지만 좋아하는 일을 위해 무언가를 배우는 것은 처음이었다. 늦은 나이에 새로운 도전을 시작한 조위상씨는 좋아하는 것을 하기 위해 노력하는 모든 이들에게 응원의 메세지를 전하고자 했다.

6.25 전쟁과 가난한 유년시절

 조위상씨는 자신의 유년 시절이 되돌아 보기도 싫은 기억이라고 전했다. 그의 유년 시절는 불우했다. 6.25 전쟁으로 인해 살기 힘든 시절에 태어났고 일찍 아버지가 돌아가셨다. 장남의 직책은 무겁기만 했고 일찍부터 일을 시작할 수밖에 없었다. 유년 시절은 가난에서 벗어나기 위한 끔찍한 일상의 반복이었다. 기억에 남는 일도, 행복한 일도 없었던 그 시절을 떠올리는 것조차 두려웠다. 학교를 졸업하고 15 살, 사회생활에 뛰어들었다. 가장 먼저 시작한 것은 장사였다. 석유 풍유 장사, 라디오 월부 장사에 뛰어들었지만 어린 나이에 시작하다 보니 수익을 내지 못 했다. 돈을 벌지 못한다는 것보다 어른스럽지 못하다는 이유로 사람에게 무시당하는 것이 더 속상했다. 손님도, 납품업자도 15 살의 장사꾼을 좋게 봐주지 않았다. 그는 이때 장사를 접으며 기술을 배우고 경험을 쌓아 인정받을 수 있는 큰 장사를 시작하기로 다짐했다.장사를 시작하기 위해선 자본이 필요했다. 당장 큰 돈이 없었던 그는 서울의 한 공장에서 일을 시작했지만 근무한지 1 년만에 다리를 다쳤다. 돈을 벌기 위해서 열심히 노력했는데 현실이 따라주지 않았다. 다친 다리로 일을 할 수 없어 어쩔 수 없이 시골로 내려가 농사를 지었다. 장사를 하고 공장에서 일하며 사람과 늘 부딪혔던 그는 농사를 지으며 처음으로 마음이 안정되는 것을 느꼈다.

소 7 마리로 지은 공장

 농사짓는 것은 즐거웠지만 돈이 되지 못했다. 그의 마음 한 편에 큰 장사를 하고 싶다는 포부가 남아있었고 결국 돈을 벌기 위해 다시 서울로 올라갔다. 다행히도 한 편물 기계 회사에서 수리공 시술을 배울 수 있는 기회가 생겼고 한 상회에서 일을 할 수 있었다. 그곳에서 받은 월급을 모아 송아지를 한 마리씩 사서 직접 길렀다. 몇 년 동안 일해서 모은 소는 어느새 7 마리가 되었다. 소 7 마리를 판 돈으로 수출품 공장을 차렸다. 큰 장사를 하겠다는 목표에 한 발짝 다가왔지만 마냥 쉽게 굴러가지는 않았다. 그의 보세 공장은 물건을 가공해 납품하는 일을 했다. 한 회사와 계약을 하게 되면 그 회사에서 받은 표준규격을 바탕으로 무역회사에서 원자재를 산 후 물건을 가공하고 그 물건을 계약한 회사에 납품했다. 이 과정에서 계약서의 역할이 매우 중요했다. 그런데 조항일씨는 이 계약서를 읽지 못했다. 수출품 공장의 계약서는 전부 영어로 되어 있었는데 그는 영어를 몰랐다. 15 살 때까지 다닌 학교에서는 영어를 배우지 않았고 영어를 알 수 없으니 영어로 된 계약서를 읽지 못하는 것도 당연했다. 사무실 직원의 말만 믿고 영어로 된 계약서에 도장을 찍으니 자신이 초라하게만 느껴졌다. 까막눈이 된 것과 다름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인생에 있어 가장 큰 한이 영어를 배우지 못해 공장을 큰 무역 회사로 성장시키지 못한 것이라 전했다.

자기 자신을 위해 일을 시작하다

 스스로의 한계에 공장을 접겠다 결심할 즘, 수출품 공장이 사양길로 접어들었다. 그는 미련 없이 공장을 접고 경기도 여주로 내려와 다양한 장사를 시작했다. 옷 가게부터 도자기 공장, 부동산, 도축업 등 다양한 장사를 시도했다. 어렸을 때부터 여러 일들을 경험해 본 그는 사업 아이템을 찾는 안목과 치고 빠지는 타이밍을 예측하는데 능숙했다. 덕분에 그가 시도한 모든 장사들이 좋은 수익을 냈고 안정된 삶을 살 수 있게 되었다. 그러다 문뜩 사람을 상대하는 일에 지친 자신을 발견했다. 15 살 때부터 지금까지 끊임없이 일하며 사람을 만났던 그는 어 이상 사람을 상대하는 장사를 하고 싶지 않았다. 큰 장사를 하겠다는 포부를 가지고 열심히 달려왔는데 이제는 장사가 싫어져 버린 것이다. 인생의 목표를 잃은 그는 한동안 방황했다. 늦은 나이에 장사 말고는 시작할 수 있는 일이 없다고만 생각했다. 그 무렵 조항일씨는 아내와 함께 집 앞의 남은 공간에서 작은 농사를 짓고 있었다. 농사라고 하기에도 애매한 정도였지만 가족들에게 건강한 먹거리를 주겠다는 다짐을 가지고 열심히 임했다. 좁은 땅에 다양한 먹거리를 키웠는데 그 중에는 복숭아도 있었다. 그런데 복숭아를 먹은 가족들이 평이 너무 좋았다. 지인들에게 직접 키운 복숭아를 선물하면 다들 너무 맛있다며 놀라워했다. 그는 이때 자신이 키운 작물을 다른 사람들이 맛있게 먹는 것을 보며 행복하다는 생각을 했다. 그리고 몇 년 전 농사를 지으며 즐거웠던 경험을 떠올렸고 식물과 접하는 일을 하고자 결심했다. 처음으로 돈을 위한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을 위해 일을 시작했다.

67 세의 나이에 대학교에 입학하다

 그렇게 모든 일을 정리한 후 복숭아 과수원을 시작했다. 처음엔 나무 몇 그루로 시작했던 복숭아 과수원의 나무가 점점 늘어나더니, 지금은 5000 평 규모의 과수원이 되었다. 물론 이 과정이 쉽게 이루어진 것은 아니었다. 복숭아 과수원에 관련하여 남들보다 지식을 쌓고자 대학에 입학했다. 영어를 몰라 무역 회사를 차리지 못했던 것을 반복하고 싶지 않다는 생각도 대학 입학의 원인이 되었다.. 대학에 입학할 당시 조위상씨의 나이는 67 세였다. 마이스터 대학을 다니며 공부를 하고 시험을 봤다. 늦은 나이에 대학을 다니며 공부를 하는 것이 쉽지는 않았지만 다른 농가들과 지식을 공유하는 값진 시간이 될 수 있다고 믿었다. 특히, 일본의 한 복숭아 농장을 견학은 과수원 관리 환경, 청결 문제에 관해 배울 수 있는 경험이 되었다. 대학의 교육 과정을 열심히 수료하여 67 세의 나이에 개근상을 받기도 했다. 조위상씨는 학교에서 쌓은 지식을 토대로 여주 복숭아 연구회장직을 맡았다. 대학에서 배운 지식을 바탕으로 현재 가지고 있는 10 개의 복숭아 품종을 우수하게 키워내는 것이 현재 조위상씨의 목표이다. 또한 지역 농가들에게 품종 관련 교육을 실시하고 유용한 품종을 보급하고자 노력중이다.

 조위상씨는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쉬지 않고 일하는 원동력이 ‘가난’이라고 말했다. 어렵게 살았던 자신의 유년시절을 자식에게 똑같이 되돌려 주고 싶지 않다는 마음을 가지고 앞만 보며 달려온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조위상 씨에게 ‘일’이란 가난에서 벗어나기 위한 수단에 불과했다. 그런데 복숭아 과수원이 조위상 씨가 해왔던 많은 일들의 종착점이자, 불우했던 경험에서 비롯된 조급함을 해소해 주는 존재가 되어줬다. 앞으로의 미래를 물어보는 질문에 잠시 고민하던 조위상씨는 지금까지 쉴 새 없이 달려왔지만 앞으로는 좋아하는 과수원 일을 마음 편히 하고 싶다고 말하며 늦은 나이에도 새로운 일에 도전하는 모든 이들을 응원한다는 말을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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