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례자들에겐 ‘평화로운 쉼터’로, 음악가들에겐 ‘하모촌’으로 불리는 쉼터 운영자이자 하모촌 지킴이 하모니카 연주자 장만수(69) 씨

순례자 편화의 쉼터, 하모니스트에겐 배움의 장 ‘하모촌’ “태어나 결혼을 해서 부양할 가족이 생기기 전 까지가 제1의 인생입니다. 결혼 후 가족 부양을 위해 직장 생활로 접어들어 어느덧 정년을 맞아 퇴직할 때까지의 직장생활이 제2의 인생이지요. 이제 퇴직 후 언제가 될지 모르는 죽음의 순간까지를 제3의 인생이라 말할 수 있습니다. 제3의 인생이 행복해야 잘 살았다고 말할 수 있는 겁니다.”

삶이 괴로워 술로 풀었던 시절도, 결국 우울증이라는 병으로 약이 없으면 견딜 수 없었던 시절까지 하모니카가 명약이 될 줄은 미처 몰랐다.

“어린 시절 외삼촌을 그리워하며 불기 시작한 하모니카가 제 인생의 동반자가 될 줄은 몰랐습니다. 앞으로 문화적으로 소외된 지역을 돌며 하모니카를 전파하는 멋진 제3의 인생을 만들어 가고 싶습니다.”

제1의 인생: 찌그러진 하모니카

하모니카와 처음 만나게 된 건 장만수 씨의 제1의 인생 초등학교 2학년 시절이었다. 1951년 전남 화순에 태어난 장 씨는 외삼촌으로부터 하모니카를 선물 받은 뒤 하루도 빠짐없이 하모니카를 불었다. “당시 6·25 참전 용사이자 상이군인이던 외삼촌이 미군으로부터 건네받은 찌그러진 하모니카가 평생의 친구가 될 줄은 생각도 못 했어요. 그때부터 낮이고, 밤이고 하모니카를 불어댄 것이 지금까지 오게 됐어요.”

특히 배고픈 시절이었던 학생 때 하모니카 연주에 더욱 매진했다고 털어놨다. 장 씨는 “중학교 시절 가수 최희준의 ‘하숙생’을 연주하면 동네 어르신들이 자장면을 사주곤 했다”며 “매번 ‘하숙생’만 연주하면 자장면을 얻어먹을 수 없었기 때문에 레퍼토리를 다양하게 하려고 다른 노래들도 연습했어요.”

그는 그러면서 “얼굴도 잘생기고, 하모니카를 기가 막히게 불 줄 아니 순천공고 시절 여학생들의 마음을 사로잡아 학생회장에 당선되기도 했다”며 과거를 뽐냈다.

제2의 인생: 하모니스트 ‘경찰관’ 장만수

장만수 촌장의 제2의 인생은 경찰관 복무 시절이다.

1976년 9월 순경으로 경찰 생활을 시작한 이후 대학생들의 시위를 진압하다 장애를 얻게 되었다. “시위대가 던진 돌에 맞아 이마가 찢어졌어요. 또 버스와 버스 사이에서 미처 피하지 못하고 팔이 끼여 온몸이 부서지는 아픔도 경험했습니다. 그 일 이후 지체장애 5급 판정을 받았고 2년에 걸쳐 병원 생활을 했어요. 그러면서 우울증까지 얻었습니다. 지금은 약을 끊을 정도로 회복됐지만, 세 번에 걸쳐 자살을 기도할 정도로 우울증이 심했어요.”라고 털어놨다.

이런 장 씨를 오늘로 이르게 한 것 역시 하모니카였다. “이 작은 하모니카가 내 목숨도 건졌는데, 다른 사람들의 목숨도 구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했어요”

달동네라고 불리던 서울 성북구 정릉 4동 대일파출소에서 1985년부터 자원 근무를 시작한 장 씨는 곧바로 자신의 결심을 현실화하기 시작했다. “하모니카 교실을 열고 지역주민들과 호흡하길 기다렸어요. 처음엔 지역주민들로부터 오해를 많이 받았고 하모니카를 배우러 오는 사람들도 거의 없었어요.” 그러나 이후 노인 방범대 결성, 학교 예절 수업 등 다양한 활동을 계기로 주민들이 그의 진정성을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장 씨의 노력으로 마을에는 놀라운 변화가 일어났다. “알코올 중독과 도박중독이 심했던 주민들은 손에 술대신 하모니카를 들기 시작했고, 마을 어린이들이 모인 놀이터와 골목 곳곳에서도 하모니카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어요.”

당시에는 마을이 어렵고 생활이 어려워 나쁜 길로 빠지는 학생이 많았음에도 다들 성공해서 잘살고 있다. “큰 도움을 준 게 아닌데도 먼저 찾아오고 연락해오는 친구들을 보면 하모니카에게 감사할 따름”이라고 겸손하게 말했다.

3의 인생: 순례자 평화의 쉼터 ‘하모촌’ 촌장 장만수

장 씨는 경찰관 재직시절, 아팠던 몸과 마음을 치료하고자 처인구 이동면 묵리 문수산 자락 깊은 계곡에 직접 설계한 산장을 건축했다. 우연히 찾아 들어온 그곳은 김대건 신부의 사목활동지이자 순교 후 유체 이장 경로 중 일부인 수난의 길임을 알게 되었다. 그 후 용인성당을 찾아 세례를 받고 자신의 산장을 ‘하모촌’으로 명명했다. 이곳을 지나는 순례자에겐 쉼터가 되어주고 하모니카를 배우러 오는 하모니스트에게는 가르침을 주었다. “세례를 받고 덤으로 사는 인생이라고 생각하니 차츰 몸이 좋아지더라고요. 그러다 순례자들이 화장실조차 없이 걷는 것을 보고 화장실을 설치한 것이 하모촌의 시작이네요.”

장 촌장이 설계하고 직접 지은 하모촌 입구에는 순례자들이 커피나 물을 마실 수 있는 무인카페가 설치돼 있다. 그의 나눔은 하모촌에서 그치지 않았다. 장 촌장은 아마추어 연주자를 넘어 2007년 이후 독학하며 하모니카 연주자로 본격적인 음악 생활을 시작했다.

2013년 제1회 서울국제하모니카 페스티벌에서 독주부문 3위를 하며 탄력이 붙었다. 이때부터 제자들을 양성했는데, 이듬해 2회 대회에서 독주부문 1위, 제자와 함께한 합주부문에서 2위를 하며 하모니스트로서 이름을 전국에 알렸다.

하지만 장 촌장은 연주자로서만 아니라 경찰 재직시절처럼 노인복지관이나 복지시설 등을 찾아 재능을 나누는 데에도 힘을 기울였다. “하모니카는 배우기도 쉽고, 즐겁고 건강하게 살 수 있다는 게 가장 큰 장점이에요. 민요부터 트롯, 팝, 재즈까지 모든 장르를 연주할 수 있는 매력을 갖고 있어요. 개인적으론 하모니카를 만난 게 큰 행운이에요. 재능을 나눠주고 갈 수 있어서” 경제적인 부담 없이 여생을 지인들과 즐겁고 행복하게 살 수 있다는 말도 빼놓지 않았다.

“하모촌은 순교자의 숨결이 남아 있는 역사적인 곳으로 내가 묻힐 곳이지만, 무엇보다 순례자들의 평화로운 쉼터로 계속 이어지길 바랍니다.”하모촌이 어떤 곳으로 기억되길 원하나요?

 하모촌 한쪼에 여성 적가들의 전용 전시공간인 하모&리 갤러리가 10월 31일 정식으로 개관했다. 갤러리 옥상에는 작고 멋진			야외 연주공간에서 연주를 선보이는 장만수 하모니스트.

끝으로 장 씨는 앞으로 버스를 타고 경기도와 강원도 등을 다니며 하모니카를 전파하고 싶다는 소망을 내비쳤다. “70세가 되면 25인승 버스를 개조해 이동하는 하모니카 교실을 만들고 싶다. 경기·강원지역 중 문화의 혜택을 받지 못하는 곳에서 소외된 채 살아가고 있는 이들에게 하모니카를 가르쳐줌으로써 꿈과 행복을 전파하는 ‘유쾌한 사람’으로 기억되고 싶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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