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원 한국전력 빅스톰 안요한.

지난 8월, 제천에서 열린 KOVO컵에서 우승한 수원 한국전력 빅스톰. 지난 시즌까지만 해도 최약체였던 한국전력은 끈끈한 조직력을 앞세워 거센 돌풍을 일으켰다. 그것도 삼성화재, 현대캐피탈, 대한항공 등 전통의 강호들을 제친 것이라 상당히 의미 있는 결과였다. 당시 장병철(44) 한국전력 배구단 감독은 우승 후 인터뷰에서 고마운 사람들의 이름을 뽑을 때, 항상 한 선수의 이름을 빼놓지 않았다. 바로 센터 안요한(30)이었다. 장병철 감독이 그의 이름을 빼놓지 않았던 것은 바로 그의 우여곡절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 대학교의 에이스, 프로의 세계에 뛰어들다
안요한은 프로 지명 이전부터 많은 주목을 받았었다. 한양대 재학 시절 보여줬던 뛰어난 기량도 있었지만 온 가족이 모두 배구인이라는 점이 그 이유였다.
그의 아버지 안병만 씨는 여자청소년 국가대표팀은 물론 사우디아라비아, 아랍에미리트 대표팀 감독을 역임했었고, 어머니 권인숙 씨는 근영여고 감독을 역임했었다.
형인 안재웅 씨 역시 현대캐피탈에서 선수생활을 했었고, 은퇴 후 통역으로 변신해 현재는 스테파노 라바리니 여자배구대표팀 감독의 통역 역할을 맡고 있다. 이렇게 가족 모두가 배구인이라는 점은 안요한에게는 큰 이득이었다.
당시 인터뷰에서 그는 “팀에서 휴가를 받아 집에 가서도 배구 감독이신 아버지와 훈련을 했다. 남들 쉴 때 개인 레슨을 받았다”고 말했었다.
독한 훈련을 받은 안요한은 한양대 주전 레프트로 활약하면서 당시 박진우(당시 경기대, 現 KB손해보험), 이강원(당시 경희대, 現 삼성화재) 등과 함께 2012-2013 드래프트 최대어로 평가받았었다. 하지만 드래프트 당일, 운명의 장난이었을까. 안요한은 본래 1라운드 지명이 예상되었으나, 순번이 밀리며 2라운드 4순위로 한국전력의 유니폼을 입게 되었다.
상위 순번을 생각했던 건지, 지명을 받고 단상 위에 올라간 그의 표정에는 아쉬움이 진하게 묻어있었다. 그래도 그에게 거는 기대가 많았는지, 당시 한국전력의 감독이었던 신춘삼 감독은 “(1라운드에서 뽑힐 선수가) 2라운드로 밀려왔다. 복이 굴러 왔다고 생각한다.”고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 안요한의 앞에는 꽃길이 펼쳐질 것처럼 보였다.

- 초라했던 프로생활과 은퇴
하지만 안요한의 프로생활은 녹록치 않았다. 그는 원 포인트 서버(서브가 강해 기존의 주전 선수 대신 교체로 들어오는 선수)로 프로 데뷔전을 치렀다. 그와 동시에 그는 원래 포지션인 레프트보다 센터로 출장하는 횟수가 많아졌다. 서재덕이라는 걸출한 선수가 레프트였기에 안요한의 자리는 딱히 없었다.
그렇기에 그는 1m95cm라는 큰 신장을 토대로 센터로 많은 경기에 나서게 되었다. 여기에 13-14시즌을 앞두고 부임한 신영철 감독(現 우리카드 감독)은 당시 전광인을 영입할 가능성이 높아지자 안요한의 신장이 크다는 점을 활용해 그를 센터로 전환시키고자 했다. 그렇게 당시 안요한은 센터로의 포지션 변경을 차근차근 준비해나갔다. 하지만 결국 센터 전환은 취소되었고, 다시 레프트로 시즌을 준비하게 되었다.
허나 그런 그에게 어깨 부상이 다시 닥쳐왔다. 원래 대학 때도 다쳤던 곳이었는데, 프로에 와서 다시 재발한 것. 여기에 기대치에 못 미쳤던 실력 또한 그에게 괴로움과 부담감으로 연결되었다. 결국 이 여파로 그는 14-15시즌을 앞두고 은퇴를 선언했다. 은퇴 전 프로 통산 성적은 13경기 출전 13득점. 당시 최대어라는 기대치에 걸맞는 기량을 미처 다 펴보지도 못하고 은퇴를 하고 말았다. 당시 한국전력 또한 이를 매우 아쉬워하며 그에게 은퇴식을 열어뒀을 정도였다.

 

통역 시절의 안요한.
 

- 병역과 영어, 통역으로 코트 복귀
은퇴 후 안요한은 공익근무요원으로 군복무를 시작했다. 이때 그는 형이었던 안재웅 씨의  ‘그 시간 버리지 말고 영어를 배워보는 게 어떠냐’는 조언으로 영어공부를 시작하게 되었다. 개인과외로 시작해 다양한 영어공부를 한 그는 전역 후, 평택의 한 피트니스 센터에서 일을 하게 되었다. 공교롭게도 그 피트니스 센터에는 미군기지가 근처에 있었고, 그는 그 곳에서 주한미군들을 상대로 자신이 배운 영어를 쓰기 시작했다.
세월이 지나 2019년, 그는 한 통의 전화를 받게 되었다. 바로 친정팀 한국전력의 전화였다. 전화의 내용은 바로 그를 통역으로 채용해보고 싶다는 것. 형과 면식이 있던 권영민 수석코치의 추천을 받았다는 사실에 그는 의아했지만, 새로운 도전을 해보고 싶다는 일념에 이를 수락하며 통역코치가 되었다.
그는 외국인 선수 가빈 슈미트의 통역을 맡게 되었는데, 과거 선수였던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가빈에게 쉽게 통역을 해주었다.
당시 그는, “당연히 통역은 말이 잘 통하는 게 중요하긴 해요. 하지만 스포츠 통역은 조금 특별해요. 배구 관련 용어를 잘 알아야 하고 이해할 줄 알아야 해요. 예를 들면 감독님께서 ‘오늘은 1번이 안 된다. 좌우로 찢어라’라고 하셔요. 1번은 리시브를 뜻하고 찢으라는 건 좌우로 크게 때리라는 거죠. 이걸 일반 통역은 잘 몰라요. 같은 운동을 해서 바로 아는 거죠. 저는 이제 이걸 가빈에게 ‘리시브가 안 되니 높은 공 기다려라’라고 간단하게 말해줄 수 있는 거죠.”라고 말을 하며 선수 시절의 경험을 살린 통역으로 많은 칭찬을 받았다고 말했다.

- 다시 현역 복귀 그리고 컵대회 우승
그런데 시즌 종료 후, 그는 놀라운 제안을 받게 되었다. 바로 현역으로 다시 뛰지 않겠냐는 것. 가끔씩 선수들의 스파링 상대로 뛰던 그의 모습을 본 코칭스태프가 아직 경쟁력이 있다고 판단, 그의 현역 복귀 의사를 물은 것.
처음에는 “(6년 동안)운동을 오래 쉬지 않았나. 내가 팀에 피해를 주진 않을까 걱정됐다”고 회상할 정도로 망설였지만, “가슴이 뛰면 도전하라”는 아내의 조언을 듣고 이틀 후, 대화를 나눈 끝에 그는 현역 복귀를 선택했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7주 만에 17kg을 감량해서 새로운 도전에 대한 의지를 보였고, 입단테스트에 합격하며 센터로 다시 프로에 돌아오게 되었다.
“솔직히 나도 나를 못 믿었다. ‘과연 내가 될까?’라는 생각이 들었다”며 “감독, 코치님께서 자주 격려해주셨다. 내가 진짜 잘하고 있다는 착각이 들 정도였다. 감사드린다.”라고 그는 복귀 소식이 알려진 뒤 첫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그리고 그는 실력으로 보답했다. 제천에서 열린 KOVO컵 대회에서 주전 센터로 출장하면서 전 경기(준결승, 결승 포함 5경기)에 출전, 25득점을 기록하면서 건재함을 보여줬다. 특히 대한항공과의 결승전 경기에서는 전 세트 코트를 밟아 7득점에 공격성공률 100%를 기록했는데, 6년간 운동을 쉰 선수라고는 믿을 수가 없는 성적이었다. 비록 대회 MVP는 받지 못했지만, 더하면 더했지 덜하지 않은 성적을 기록하며 팀 우승에 보탬이 된 것은 사실이었다.

- “기적은 실패에서 찾아온다.”
"돌파구는 있습니다. 실패했다고 생각할 때가 성공의 시작이라고 생각하거든요. 좋은 기적이 일어날지도 모르는 것 같아요.“
컵대회 우승 후 MBC와의 인터뷰 말미에서 말한 내용이다. 그렇다. 안요한은 분명히 첫 번째 은퇴 전의 성적만 보면 실패한 선수다. 하지만 이러한 실패는 그를 더욱 단단하게 만들었고, 통역 일은 물론 다시 현역으로 복귀할 수 있게 된 계기가 되었다. 만약 그 실패를 통해 좌절하고 방황하기만 했다면 이러한 기회는 없었을 지도 모른다. 그렇기에 그의 두 번째 도전은 어느 선수의 복귀만큼 매우 의미 있는 도전이라 할 수 있다.
안요한은 정규리그가 시작된 이후에도 센터로 출장하면서 좋은 경기력을 보이고 있다. 비록 최근 현대캐피탈과의 트레이드로 ‘국가대표 센터’ 신영석이 팀에 합류하면서 출장 횟수가 줄었지만, 여전히 안요한은 팀이 가장 필요로 하는 순간에 투입되어 좋은 경기력을 보이고 있다. “코트에 다시 서는 건 특권과 같다. 프로 무대를 다시 밟을 수 있다는 게 너무 기쁘다”는 그의 말처럼 안요한이 보여줄 기적은 아직 많이 남아있다.
또한 다음 달에 그는 한 아이의 아빠가 된다. "12월에 출산 예정인데, 기대가 되고. 저도 계속 선수를 해서 제 아들한테 보여주고 싶은 마음도 크고요."라고 말한 그의 인터뷰처럼 그의 아들에게 좋은 아빠, ‘실패를 통해 만들어진 기적’을 많은 이들에게 보여주길 바란다. 끝으로 그의 각오를 듣고 이 기사를 마치도록 하겠다.
“주전이든 백업이든 상관없다. 팀이 원하는 바를 최대한 열심히 하겠다. 코트에 나오지 않는다면 정말 열심히 파이팅을 외치면서 다른 선수들을 도와주겠다. 코트에 투입된다면 분위기를 띄우고 싶다. 주어진 자리에서 최선을 다하겠다.”

이태훈, trancex7@naver.com

저작권자 © 한국도시환경헤럴드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