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생인 두 딸 앞에서 나만의 인생을 살겠다고 밝힌 한 여성이 있다. 그녀는 “82년생 김지영이라는 영화를 보면서 내 삶을 되돌아 봤고, 고이 맘 한 구석에 접어놨던 내 꿈을 생각해 보는 계기가 되었다. 나도 엄마이자 아내이기 전에 한 사람 아니겠느냐?, 이제 나도 내 인생을 살아야겠다.”고 과감하게 인생 독립을 선언했다.

그래도 아직은 평범한 회사원이자 엄마로 살고 있는 전복순(47세, 인천시 남동구) 씨를 12월9일에 그녀의 집으로 찾아가 만났다. 그녀의 첫마디는 “이제 두 딸도 미성년자를 벗어나 성인이 되었으니, 내 인생을 되돌아보며 제2의 꿈을 가질 때가 되었지 않느냐?”고 되물었다. 그림입니다.원본 그림의 이름: 72년생 전복순씨의 모습.jpg원본 그림의 크기: 가로 960pixel, 세로 960pixel색 대표 : sRGB 말하는 목소리에서 이제 막 꿈을 가지기 시작한 아이처럼 눈빛이 반짝하는 모습이 느껴졌다. 말하는 목소리에 굳은 다짐이 보이는 듯 했다.

 

“나는 꿈을 꾸고, 이루고 싶습니다.”라고 말하는 전복순씨는 엄마가 아닌, 아내가 아닌 ‘나’ 인 삶을 살아가고 싶다고 두 손을 꼭 쥐며 이야기 했다. 이어서 그녀는 “한 번도 가보지 않았던 길이기에 불안하고, 도전에 대한 어떤 결과가 나올지 모르는 불안한 길이지만, 꿈을 향해 가슴 벅차게 달려가고 싶다.”고 이야기했다.

그리고 그녀는 자신의 인생 역정의 이야기를 ‘82년생 김지영’이라는 영화처럼 책으로 써보고 싶다고 이야기했다. 파란만장한 자신을 삶을 글로 쓰면서 자신의 나이 또래인 72년생은 또 다른 위로를 얻고 용기를 내는 발판이 되어주고 싶다고 한다. 그녀는 “경제적 여유가 있는 것도 아니고, 아직도 오직 살기에도 바쁜 인생이지만, 나만이 꼭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다.”고도 말했다. 그녀는 작가의 꿈을 위해 현재 다니는 회사마저 그만둘 것이라고 비장한 각오를 말했다. 그래서 그 이야기가 무엇인가 물었다.

 

사람을 좋아하는 강화 마니산 소녀

1972년에 강화 마니산 아래, 한 가정에서 7명의 언니와 오빠 한명을 둔 막내로 태어났다. 그녀가 태어난 집은 강화도에서는 손에 꼽히는 부잣집이었다. 막내이었기에 아버지 사랑도 듬뿍 받고 자랐다. 그러나 그 시절에 여느 집들도 마찬가지였겠지만, 부잣집이라고 예외는 아니었다. 막내이었기에 언니들 옷을 물려받아 입어야 했고, 남매들 중 뒷전이 되는 날이 더 많았다. 그녀가 초등학교를 다닐 때 어머니가 중풍으로 쓰러져 누운 탓에 학부모의 날이나 체육대회 날 등 부모들이 참석하는 학교 행사에 자신의 부모들은 늘 오지 못했다. 그날의 쓸쓸함은 평생 아픈 기억이라고 말한다. 그래도 당찬 성격 덕에 주변 사람들에게 웃음을 주는 어린이로 성장했다. 이때의 성격은 어른이 되어서도 계속되었다.

그녀는 사람들과 소통하는 것을 좋아하고, 그림 그리기와 구연동화에 소질이 있었고, POP 글쓰기 등 다양한 재주를 가지고 있었다. 이러한 재주를 이용해 많은 사람들에게 도움을 주면서 살아왔다.

첫 직장은 여행사였다. 이러한 그녀의 재주를 십분 발휘하여 사람들과 대화하고 웃으며 소통하는 직업에 매력을 느끼고 꿈을 펼치며 즐겁게 일했다며 “그 때 꽃을 가지고 매번 찾아오는 사람도 있었고, 여행을 매번 오는 사람도 있었어요. 제가 맘에 든다고 보러 오더라고요.”하면서 그녀는 소리 내어 호호하며 웃음을 터뜨렸다.

1997년, 같은 여행사 직종의 사람을 만나 11월29일 결혼식을 올린다. 같은 직종은 사람을 만났기에 더욱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 행복한 길이 열릴 줄 알았다. 신혼을 즐길 새 없이 1998년 11월 27일 자녀를 출산하며 아내의 삶, 엄마의 삶이 시작되었다. 아이를 키워야 하기 때문에 자연스레 좋아하는 일이었던 여행사를 관뒀다. 육아에 전념했다. 그녀에게 육아는 독박이었다. 당연히 같이 하는 일이 아니었다. 남편이 도와주면 고마운 일로 여기는 것이 당연시 되었다. 2000년 11월 1일 둘째 딸을 출산하면서 자신의 꿈은 더욱 멀어졌다. 꿈을 꿨던 시절은 상상도 할 수 없었다. 길거리를 걷다 마주치는 짧은 치마에 긴 생머리 여자들을 보면 부럽다는 생각을 떨쳐낼 수가 없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두 딸을 보며 자신은 어렸을 적 누리지 못한 모든 것들을 그녀들에게는 누릴 수 있도록 해주겠다는 엄마의 삶으로 살게 되었다. 그때를 생각하는 그녀의 눈가에 엷은 물기가 돌더니 “그 때 제 꿈은 두 자녀가 잘 자라는 거, 그거뿐이었죠. 어떻게 제 꿈을 꾸겠어요.”라고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두 딸이 초등학교에 들어가자 모든 학교 행사에 빠지지 않고, 참석했다. 그것은 자신이 어렸을 때 한 번도 학교에 오신 적 없었던 부모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때마다 자신의 어린 가슴이 너무도 아팠기 때문에 자신의 딸들에게는 그런 아픔을 주지 않겠다는 생각뿐이었다.

자신의 아이들 기를 살려주기 위해 학부모회를 들어가 열심히 활동했고, 어린이들의 등하교 때 교통 봉사를 하는 녹색어머니회 활동을 하면서 내 딸들이 “우리 엄마야! 멋있지?”라는 이야기를 할 수 있게 온갖 정성을 다 부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고 한다. 초등학교에 들어가서인지 조금씩 대들고 거짓말을 하는 자녀들을 보며 삶이 다 무료해지는 시기가 왔다고 했다. ‘나는 지금 뭐하고 있는 거지’ 라는 생각이 들 때 쯤, 자녀가 다니고 있는 초등학교에서 방과후 교사를 뽑는다고 했다. “내가 강사가 되었을 때, 자식에게 피해를 주면 어쩌지?” 라는 생각에 휩쓸려 많은 시간 고민했고 또 고민했다고 한다. 그러나 경제 사정도 좋지 않았고, 무엇보다 두 딸이 엄마가 학교에 왔을 때 자랑스러워 하는 모습을 보며 도전했고 결과는 나쁘지 않았다고 한다. 아이들을 가르치며 소통하는 강사로써 행복했다고 했다. 이후에 직접 하진 못했지만 자녀에게 동화구연, 그림그리기, 댄스스포츠, 하모니카, 바이올린, 등등 여러 예체능을 알려주면서 꿈을 다시 접었다고 한다.

두 자녀가 대학까지 진학하며 어엿한 성인이 되었을 때, 내 주변엔 그 무엇도 남지 않고 공허함만 남았다고 한다. 자녀들이 들으면 서운할테지만 20년 세월 모두 자녀에게 바쳐 나에게 남은 건 아무것도 없었으며, 마냥 서로 사랑하며 죽을 때까지 함께할 줄 알았던 남편도 이혼하며 나 혼자 텅빈 집에 남았을 때 차가운 공기만 몸을 감싸고 있는 것처럼 느껴져서 삶을 포기하고 싶었다고 이야기했다.

“엄마, 하고 싶은 거 없어? 이제 다 성인인데 엄마 인생 살면 좋겠는데 잘 생각해봐. 뭘 하고 싶은지” 라고 말하는 첫째 딸의 말이 머릿 속에서 잊혀지지 않는다고 한다. 처음엔 듣고 ‘나쁜년, 다 키워놨더니 저런 이야기를 하네’ 라는 생각이 들었고, 여유있는 사람이나 그럴 수 있는 거지 살아가기 바쁜데 이제 와서 어떻게 내꿈을 찾나. 라는 생각이 수도 없이 들었다고 한다. 딸 아이가 나가면서 주말 시간 비워놓으라고 영화 보러가자고 했고, 그래도 매번 혼자있을 나를 생각해주니 자식 잘 키웠다고 생각을 하며 영화관에 갔을 때, ‘82년생 김지영’이라는 영화를 처음 접했고, 그 날 이후로 자신을 돌아보고 꿈을 생각하게 된 계기가 되었다고 한다. “내 모습을 보는 거 같았는데, 나도 내 삶을 살기에 아직 늦은 건 아니지 않을까”

곰곰이 생각해보기 시작했고, 1997년 아내의 삶으로, 1998년 엄마의 삶으로 살아왔고 23년이 흐른 지금 나는 뭘하고 싶은지에 대해서 많이 고민했다고 한다.

전복순씨는 사람들과 소통하는 것을 좋아하며 자신의 삶에 대한 이야기를 할 때 사람들이 집중하고 리액션을 하며 듣는 것에 기분이 좋다고 한다. 자신이 제일 기쁜 순간을 생각하니 나의 삶의 이야기를 글로 써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고, 제2의 인생을 꿈꾸고 있는 전복순씨 또래 사람들에게 희망을 주기 위해 차근차근 기록해나가고 있다고 한다.

 

김혜리기자 khr_1127@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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