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자가 임신했을 때, 매일 지하철로 50분 거리의 학교로 출근해야 했다. 광역버스는 지하철보다는 자리를 잘 잡을 수 있는 편이었지만 급정거할 수 있어 지하철을 선호했다. 지하철을 타면 분당선과 신분당선을 갈아타야했기 때문에 동선도 길고 아침마다 사람도 꽉꽉 들어차 힘들었다. 하지만 지하철을 계속 타고 다닐 수 있었던 이유는 ‘믿는 구석’이 있었기 때문이다.

지하철에는 분홍색으로 표시 된 임신부 배려석이 있다. 버스에도 임신부 배려석이 있는 경우가 있긴 하지만 먼 길을 가는 광역버스는 한 번 타면 계속 앉아 가는 경우가 많아 다른 승객에게 자리를 양보하는 경우가 적은 편이다. 하지만 지하철은 서서 가는 사람도 많고 매 정거장 많은 사람이 타고 내리기 때문에 버스에 비해 유동성이 많은 편이다. 그만큼 임신부를 위해서가 아니더라도 자리를 양보하는 경우도 많이 보게 된다. 지하철 임신부 배려석은 벽면과 바닥에도 표시가 되어 있어 알아보기도 쉬운 편이다.

임신 초기에는 배가 많이 나오지 않아 임신부인지 아닌지 구별이 어려워 배려를 받기 힘들 수 있다. 실제로 많은 초기 임신부들이 배려를 받지 못한다고 호소한다. 필자는 보건소에서 받은 임신부 배려 가방고리가 눈에 잘 띄도록 가방에 달고 노약자석과 임신부 배려석을 이용했다. 젊은 사람이 노약자석에 앉아 있다 보니 의아하게 보는 눈길을 받을 때도 있었지만 임신부 가방고리를 확인하고는 수긍하시는지 아무런 제재 없이 이용할 수 있었다. 노약자석과 임신부 배려석에 자리가 다 차있을 때는 임신부 배려석 근처에 서 있으면 임신부 가방고리를 발견하고 양보를 받은 적도 많았다. 물론 가방고리를 보고도 그것을 알아보지 못해서이든 다른 이유에서이든 양보 받지 못한 적도 있었지만, 감사하게도 임신부라는 것을 알게 되면 승객들은 기꺼이 양보를 해주시는 편이었다.

 

임신 중기를 지나 배가 눈에 띄게 불러 오면서부터 출산까지 3개월여 동안은 정말로 과장 없이 매일 양보를 받았다. 특히 중년의 아주머니들께 양보를 많이 받았다. 본인도 임신하고 힘들게 아이를 품고 낳은 경험이 있어서 그러신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어린 학생들보다는 연세가 많으신 어른들이 더 챙겨주셨다. 가장 민망할 때는 백발이신 할아버지나 할머니께서 노약자석에서 필자를 부르셔서 자리를 양보해주실 때였다. 할아버지 할머니께서도 노약자이신데 앉아계신 자리를 양보 받아 앉는다는 게 참 죄송스럽고 민망해 사양할 때도 많았는데 그러면 억지로 끌어다 앉혀주기도 하셨다. 젊은 대학생들이나 직장인들에게도 양보를 많이 받았다. 한번은 임신부 배려석에 직장인으로 보이는 남자분이 앉아 핸드폰을 하고 있었다. 그분도 아침부터 피곤하겠지, 하는 생각으로 조금 떨어져 서 있었는데 옆에 있던 중년의 아저씨께서 그 남자분에게 “여기 임신부가 있으니 자리 좀 양보해달라.”고 하셨다. 고맙게도 젊은 남자분이 오히려 민망해하며 자리를 양보해주어 편하게 앉아 갈 수 있었다.

 

막달이었던 어느 날, 일을 마치고 집에 돌아가는 길이었는데 임신부 배려석까지 차 있었다. 그날은 배도 묵직하고 다리도 붓고 너무 힘들어 임신부 배려석에 앉은 남자분에게 “어디까지 가시냐”고 물었다. 임신부 우선 배려석이니 일어나 달라고 하기에는 배려를 강요하는 것 같아 서로 불쾌할 수 있으니 나름대로 돌려 물은 것이었다. 그 남자분은 처음에는 “네?”하시며 의아한 표정으로 보다가 내 배를 보더니 화들짝 놀라며 “아, 앉으세요!”하고 양보해 주셨다. 아마도 그 남자분도 임신부 배려석이라는 인식은 하고 있었던 것 같다. 내가 먼저 말을 걸기는 했지만 기꺼이 양보해주셔서 얼마나 고마웠는지 모른다. 이렇게 필자는 분당선과 신분당선의 승객들에게 수많은 양보를 받고 드디어 건강한 아기를 출산 할 수 있었다. 그때가 2016년. 아이는 벌써 28개월이 되었다. 필자는 지금도 지하철 승객들이 내 뱃속의 아기를 지켜주고 키워주었다고 생각한다.

 

가끔 여전히 많은 분들이 임신부 배려 앰블럼을 알아보지 못하거나 알아보더라도 배려해주지 않아 임신부들이 어려움을 겪는다는 기사를 접할 때가 있다. 실제로 가장 조심해야할 때는 임신 초기이기도 한데 배가 많이 나오지 않아 가방고리를 걸고 나가도 양보를 받지 못해 힘들다는 친구들의 이야기도 많이 듣게 된다. 그럴 때는 ‘나는 참 운이 좋았다’고 다시 한 번 감사하게 되기도 하지만, 배려 받지 못해 속상한 임신부의 마음과 배려를 강요당해 기분이 나빴다는 비임신부인 시민들의 마음이 떠올라 안타깝다. ‘배려’라는 것은 우러나와서 하는 것인데 왜 ‘의무’처럼 강요되어야 하는 것이냐고 말씀하시는 분들도 있다. 물론 그 말도 일리는 있다. 하지만 가끔은 아무 조건 없이 다른 사람을 위하는 행동이 그 자체로 의미 있고, 필요할 때가 있다. 굳이 ‘저출산’이라는 말로 통계자료를 꺼내 배려를 강요할 근거를 댈 필요도 없다.

 

단지 생명을 품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양보 받은 임신부가 느낀 고마움은 태아에게 그대로 전해진다. 그리고 그 태아는 뱃속에서부터 그런 사랑과 긍정에너지를 많이 받고 태어나 또 세상을 밝게 하는 존재가 되어줄 것이다. 나 역시 내 아이가 자라면서 “너는 사람들의 배려로 태어나고 자란 아이”라고 가르칠 것이다. 그런 이야기를 듣고 자란 아이는 어른들에게 배운 양보와 배려를 실천하는 다음 세대의 어른이 될 것이다. 내가 한 한 번의 양보, 그 덕분에 지금 함께 웃기도 하지만, 우리 다음 세대가 살아갈 사회가 밝아진다면 그 자체로 해볼 만한 아름다운 일이 아닐까?

 

저작권자 © 한국도시환경헤럴드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