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문도 사건은 한국사 및 동아시아사적 사건인 동시에 세계사적 사건

 

한반도를 둘러싸고 발생한 거문도 사건은 해양세력과 대륙세력이 대결하는 동아시아판 그레이트 게임 개시를 알리는 서막이었으며, 한국사 및 동아시아사적 사건인 동시에 세계사적 사건이었다. 조선문제는 지역 문제를 넘어, 영·러의 그레이트 게임의 일환으로 국제 문제로 전환되었다.

방아(防俄)를 친아(親俄)로 해서 청나라와 일본을 견제하려던 조선책략적 이이제이(以夷制夷)의 역학구도속에서 추진된 한·러수호조약과 한·러밀약은 시효가 끝나 러시아의 극동전략 수정이 불가피했다. 러시아는 거문도사건을 계기로 한·러관계 및 극동정책을 전반적으로 재검토하게 된다.

영국함대의 거문도 주둔 사건으로 블라디보스토크 해군기지가 위협받는 상황을 고려, 한반도에서 부동항 확보가 어렵다고 판단한 러시아는 모스크바와 극동 아시아 육로 연결을 위한 시베리아 철도 건설을 구상하게 된 것이다.

1800년대 중앙아시아 여러 나라들을 확보하고 부동항을 찾아 인도로 진출하기 위해 아프가니스탄까지 넘보던 러시아 제국은 서쪽의 폴란드에서 동쪽 캄차카 반도까지 세력권에 넣었다. 그러나 판데사건으로 인도로 나가는 길이 좌절된 러시아는 블라디보스토크에 이르는 장대한 시베리아 횡단 철도를 놓으면서 극동지역에서의 영향력을 계속 굳히려는 국가전략을 추진했다.

시베리아 횡단철도가 완성되면 거대한 병력과 물자를 단기간에 신속하게 이동하고 배치할 수 있게 된다. 사실상 이로서 조선을 노리던 일본과 러시아는 대결이 불가피해졌다.

러시아 극동전략 수정의 단초는 라디겐스키 협약과 극동문제 특별회의였다. 텐진협약과 특별위원회의 구상은 그레이트 게임의 차원에서 보면, 러시아의 한반도에서 현재적 우위를 확보키 위한 전략으로서 타당성이 있었다. 하지만 다른 한편, 일본의 외교, 군사적 행보와 연계하여 본다면, 한반도에서의 러·일의 공조는 물 건너간 사안이었다. 왜냐하면 텐진협정으로 러·청 공조체제가 구축됨에 따라 일본의 한반도에서의 대청, 대러 견제력이 상실되고 말았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러시아가 대 조선 정책을 구상하고 있던 시기에 일본은 생존을 위한 자구책을 구상해야만 했다.

러시아의 시베리아 철도 건설 계획이 구체화 되자 이번에는 일본에 비상이 걸렸다. 시베리아 철도가 완성되면 유럽에서 극동까지 배로 45일 걸리던 이동이 철도로는 18일로 단축되기 때문이었다, 일본 군부는 “우크라이나 초원에서 풀 뜯던 기병대가 열차를 타고 3주 후면 헤이롱 강(黑龍江) 물을 마실 수 있게 되었다”면서 러시아의 동진(東進)에 대한 대책 마련에 부심했다. 뒷날 일본은 청·일전쟁에서 승리했으나 러시아 등 3국간섭으로 이 같은 우려는 현실화됐다. 승리 대가로 요동반도를 할양받았으나 프랑스와 독일까지 가세할 경우 일본 단독으로는 러시아와 맞설 자신감이 도저히 없었다.

 

이에 러시아가 만주와 한반도를 지배하는 것을 전략적 차원에서 용납할 수 없었던 영국의 이해가 들어맞은 결과 1902년 영·일 동맹이 체결되었다. 영·일 동맹은 일본이 러시아와 싸우게 될 때 만일 독일이나 프랑스가 러시아 편을 들어 전쟁에 개입할 경우 영국도 일본 편을 들어주겠다는 것이었다.

그 이면엔 미국도 영국 편을 들기로 되어있었다. 일본이 러시아와 싸운다 해도 독일과 프랑스가 함부로 나설 입장이 아니었고, 일본은 마음 놓고 러시아에 선제공격을 가할 수 있었던 것이 러·일 전쟁이었다.

바로 이 러·일 전쟁 이후 조선은 을사늑약을 맺어 일본 보호국으로 전락하게 된다. 거문도 사건의 여파는 이처럼 조선에 크고 작은 영향을 미치며 결국 일본의 조선 병탄의 전주곡이 된 셈이다.

 

1868년 메이지 유신으로 개방과 개혁으로 세계 5대강국이 된 일본은 국민개병제(國民皆兵制) 등 서구의 군사제도인 징병제도를 도입하여 끊임없이 군비확장을 국책으로 추진하였다. 이런 막강한 국력을 바탕으로 조선을 병탄할 기회를 노리고 있었다.

거문도에서 영국군이 철수한 2년 뒤, 1889년 발포된 이토 히로부미의 메이지 헌법에 따라 구성된 제1의회 중의원(衆議院)에서 1890년 12월 6일, 총리대신 야마가타 아리토모(山縣有朋)가「주권선(主權線)」,「이익선(利益線)」을 개념화한 외교정략을 담은 국가전략 구상을 밝힌 시정방침 연설은 바로 이 같은 문제의식에서 출발했다.

 

“생각건대, 국가독립 자위의 방도에 두 길이 있는데, 첫째로 주권선을 수호하는 것, 둘째로 이익선을 보호하는 것이다. 그 주권선이란 나라의 강역(疆域)을 말하고, 이익선이란 그 주권선의 안위에 밀접한 관계가 있는 구역을 말하는 것이다. 대체로 나라로서 주권선 및 이익선을 갖지 않는 나라는 없지만, 현하 열국(列國) 간에 들어서서 일국(一國)의 독립을 유지하는 데는, 단지 주권선을 수호하는 것만으로는 결코 충분하다고는 말할 수 없는 것으로, 이익선도 반드시 보호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으로 안다.”

 

독립자위(獨立自衛)를 위해서는 자국(自國)의 주권선 뿐만 아니라 안보상 밀접한 관계에 있는 이익선 까지 방어해야 한다는 얘기다. 일본 육군의 아버지와 군략가로 평생 이토와 라이벌 관계에 있었던 야마가타는 조선을 이익선으로 설정한 것이다. 주권선은 절대로 침해당해서는 안 되는 주권영역인 일본의 국경을 뜻하고, 이익선은 주권선의 안위와 밀착관계에 있는 구역, 곧 일본의 이익과 관계되는 경계선인 한반도를 의미했다.

일본은 이익선인 조선이 침범되면 주권선인 일본열도도 위험해진다고 보고, 1888년 1월, 대정부 의견서에서 일본 국방상의 주적을 러시아로 상정했다. 코르프-지노비에프회담에서 한반도정책을 구안(具案)한 바로 이듬해인 1889년에 일본은 종래의 조선정책을 전면 수정하고 마침내 대러 강경방침을 확정하기에 이르렀던 것이다. 내면적으로는 러시아와의 대결을 불가피한 것으로 생각하고 있어 일·러 전쟁의 씨앗이 잉태되고 있었다.

 

거문도 사건 당시 중개역할을 했던 청나라는 영국 철수를 자신들의 노력에 의한 것으로 주장하며 조선에 대한 종주권을 내세워 내정간섭은 더욱 심화되었으며, 조선의 국제적 위상은 한없이 추락했다. 이 사건 이후, 조선의 자주외교 노력이 강화되고 일본과 미국에 최초로 공사관이 개설됐다.

19세기 후반 세계적 차원에서 대결하던 영국과 러시아가 한반도에서 충돌함으로써 전통적 동북아 국제질서 재편을 결과했고, 조선을 본격적인 국제정치의 틀로 편입시켰다. 주변국인 청과 일본, 러시아의 대립은 물론 거문도 사건이후 미국, 독일 등의 서구열강의 동아시아 이권쟁탈과 맞물리면서 조선은 열강들의 각축장이 되었다. 결국 영국의 불법적인 거문도 점령은 외세에 의한 한국 강점의 시발점이 된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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