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고래 싸움터의 새우, 약소국의 비애(悲哀)

 

당시 영국은 거문도 점거사실을 조선정부에 일방적으로 통보했다. 점거 이유로 ‘예측할 수 없는 일을 예방코자 거문도를 잠시 거수(居守)한다’는 것으로, ‘예방차원 선점 점령(preventive, preemptive occupation)’이라는 터무니없는 주장을 내세웠다. 약소국에 대한 일방적 주권 유린이었다. 이후 영국은 거문도 점령에 따른 주변국들과의 외교적 마찰 문제도 당사국인 조선은 제쳐두고 청나라를 통해 러시아와 협의를 진행했다.

조선 정부는 영국 부영사와 청나라 주재 영국 대리공사에게 강력히 항의하고, 또 미국 · 독일 · 일본에게 조정을 요청했다. 이에 각국 대표는 본국 정부로부터 훈령을 받지 못하여 명확한 답변을 할 수 없으나, 우선 조선과 영국 두 나라가 원만한 타협을 이루길 바랄 뿐이라는 회답을 보내왔다. 결국 조선정부는 사건해결에 주체적인 역할을 하지 못하고 청·영국·러시아 3국의 상호교섭에 의존하게 되었다.

 

한편, 조선은 4월 3일 정여창과 함께 의정부(議政府) 유사당상(有司堂上) 엄세영(嚴世永)과 교섭통상사무협판(交涉通商事務協辦) 묄렌도르프를 거문도 현장에 파견, 점령이유를 힐책했다. 이들은 당시 전라도 흥양(興陽: 현 고흥의 당시 지명)의 삼도(三島) 즉 거문도에 가서 영국 해군 함장인 막키이에게 불법 점거를 항의했다.

묄렌도르프는“영국 군함이 이 거문도에 깃발을 세워놓았다고 하므로 사람을 보내서 알아보려고 하던 차에 마침 중국 군함이 바다를 순찰하다가 마산포(馬山浦)에 왔으므로 조선국 임금이 정여창(丁汝昌)과 상의하여 윤선(輪船)을 붙여주어 왔습니다. 아까 보니 과연 귀 국의 깃발을 세워놓았는데 무슨 의도인지 알지 못하겠습니다.”고 항의했다.

이에 막키이는“이 깃발을 세운 것은 우리 수군 제독(水軍 提督)의 명령을 수행한 것입니다. 영국 정부에서 러시아가 이 거문도를 차지하려고 한다는 말을 들었기 때문입니다. 현재 영국이 러시아와 분쟁이 생길 기미가 있기 때문에 먼저 와서 이 섬을 잠시 지킴으로써 보호하는 데 도움이 되게 하려는 것입니다.”고 답했다.

묄렌도르프는“조선은 영국과 원래 우호조약(友好條約)을 맺은 나라이며 러시아와도 우호조약을 맺은 나라인데, 지금 귀 국의 군함이 조선 땅에 와서 국기를 세워놓는다는 것은 이치상 허락할 수 없으니, 귀 정부에 명백히 전달하여 이런 내용을 알게 한 다음 조선의 도읍에 들어가서 각국 공사(公使)들에게 조회(照會)하여 이런 내용을 알게 하여야 할 것입니다.”고 하자, 막키이가“나 역시 조선에서 이 일을 처리하기가 곤란하리라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원래 정부에 빨리 통지해야 할 것이었으나 우리 정부의 의사도 각하에게 명백히 알리지 못하였습니다. 나는 수군 제독의 명령을 받고 여기에 주둔하고 있으니 각하께서 나가사키(長崎島)에 가서 수군 제독과 상의하면 될 것입니다. 지난달 28일에 러시아 군함 1척이 여기에 왔는데 영국의 뜻에 대하여 많은 의혹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하였다.

이에 묄렌도르프가“귀 국이 조선 땅에다가 깃발을 세워놓은 것은 사리에 맞지 않습니다. 우리들은 명령을 받고 여기에 왔으므로 조사한 것을 즉시 돌아가서 우리 임금에게 보고할 것이니, 각하도 이 내용을 가지고 귀 수군 제독과 상의한 다음 빨리 귀 정부에 알려서 속히 처리해야 할 것입니다.”하자, 막키이는“그렇습니다. 모레 나도 나가사키에 가려고 합니다. 이 달 초하룻날에 영국에서 전보가 왔는데 영국 정부가 러시아 주재 영국 공사와 아프가니스탄 사건을 논의하고 해명하였다고 하였습니다. 우리 군함도 이제 분쟁한 일이 없었다는 것을 본국에 보고하겠습니다.” 고 답했다.

 

엄세영과 묄렌도르프는 곧바로 나가사키로 가서 영국측과 외교교섭을 추진했다. 4월 6일 영국의 수군 제독(水軍提督)에게 편지를 보냈다.

 

“우리나라 대군주(大君主)께서는 아세아 동부 해상에 주둔하고 있는 귀 국의 병선(兵船)이 우연히 우리나라 거문도에 이르렀다는 소식과 아울러 귀 제독이 거문도에 주둔하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그리하여 우리나라 대군주께서는 중국의 제독 군문(軍門) 정여창(丁汝昌)이 2척의 군함을 가지고 바다를 순찰하다가 마산포(馬山浦)에 이르렀다는 것을 아시고, 우리나라 대군주께서는 군문 정여창에게 우리나라에 특파(特派)한 관원들을 데리고 섬에 가서 정형(情形)을 조사하여 보라고 특별히 청하였습니다. 우리들은 해도에 당도하여 즉시 귀 국의 병함(兵艦) 6척과 상선(商船) 2척이 해도 안에 정박하고 있는 것을 보았으며, 동시에 해도의 높은 산꼭대기에 귀국의 깃발이 세워진 것을 보았습니다. 본관(本官)들이 곧 귀 국의 비어선(飛魚船)에 가서 그 까닭을 물으니, 그 선주(船主)가 말하기를, 이 것은 바로 귀 제독의 명령을 받은 것이라고 하면서 귀 제독이 현재 일본 나가사키에 머물러 있다고 하였습니다. 본관들은 다시 군문 정여창과 가부를 토의하고 나가사키에 가기로 하였는데 다행히 임금의 윤허를 받아 이달 5일 아침에 나가사키에 도착하였고, 본관들은 그 즉시로 귀 제독을 면회하였습니다. 면담한 여러 가지 건(件)은 다 주상(主上)의 명령을 받은 것이므로 귀 제독의 대답을 청합니다. 이미 우의(友誼)를 맺은 나라인데 벗이 된 나라의 땅을 점령하고 있는 것은 누구의 명령에서 나왔으며, 또한 무엇 때문입니까? 엄세영과 묄렌도르프인 본관들은 귀 제독이 즉시 처리하여 조약관계가 있는 각 나라들로 하여금 거문도가 조선국의 땅이라는 것을 모두 알도록 하는 것이 타당하다고 생각합니다. 이 편지를 살펴보고 회답해 주기 바랍니다.”

 

4월 10일 미국 대리공사 푸우트가 통리교섭통상사무아문(統理交涉通商事務衙門)에 보낸 회답 편지에,“거문도인 해밀턴 섬 문제에 대하여 조선 정부에서는 몹시 경계하고 있는데, 나의 생각에는 영국이 해밀턴 섬을 영원히 점령하려는 것이 아니며 영국 정부도 이 섬을 이용하자는 의사가 없다고 봅니다. 지금 북경(北京)에 있는 영국 공사 편지를 보니, 그 의도가 조선의 영토를 점령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고 오직 자신을 방어하는 데 이용하려는 것일 뿐입니다. 지금 영국이 군함(軍艦)을 거문도에 보냈으나 아직 한 번도 조선에 대한 우의(友誼)를 저버리려는 의사가 없었으니, 조선 정부도 영국의 행위에 대하여 강력히 규탄할 수 없다고 봅니다. 바로 지금 영국과 러시아 간에 사변이 생길 것인데 러시아가 만약 영국에서 해밀턴 섬을 점령하여 지키고 있다는 말을 듣는다면 러시아도 역시 여기에 뜻을 둘 것이니, 각하(閣下)는 블라디보스토크 해군 사령장관(海軍 司令長官)에게 편지를 보내 각하의 본의를 표시해야 할 것입니다. 사령 장관이 만약 긍정적으로 검토한다면 더욱 축하할 만한 일입니다. 각하가 이 중대한 문제에 대하여 문의하여 주었으니, 우리 정부도 이 문제에 대하여 우의를 다할 것입니다.”고 하였다.

5월 25일 고종은 “거문도를 다른 나라 사람이 제멋대로 차지하고 아직 철수하지 않으니 참으로 개탄할 일이다.”고 하며 대책을 논의했으나 병력도, 재정도 열악한 조선 정부로서는 속수무책이었다. 고종의 한탄에 심순택이“영국과 러시아가 서로 버티다 보니 그렇다고 들었는데, 아직 언제 철수할지 알 수가 없어 매우 걱정입니다.”고 하였다.

 

“요즘 영국과 러시아가 아프가니스탄 경계 문제로 분쟁이 일어나게 되어 러시아 군함이 블라디보스토크에 집결되자 영국 사람들은 그들이 남쪽으로 내려와서 홍콩을 침략할까봐 동양함대를 파견하여 3월 초하루에 거문도를 검거한 다음 포대를 쌓고 그들이 오는 길을 막았다.”

 

조정대신들이 모여 갑론을박, 첩보수준의 설왕설래만 있을 뿐이었다.

 

조선을 청나라 속국으로 파악하고 있던 러시아는 청나라에 거문도 불법점거 사건 중재를 요청했다. 당시 방대한 해외식민지를 바탕으로 성립된 대영제국은 식민지를 연결하는 교통로가 생명선이었기 때문에 러시아의 남하와 해양진출을 저지하는 것이 통상과 교역의 자유를 확대하는 첩경이었다.

반면 러시아 역시 발칸반도에서 터키의 억압을 받고 있는 기독교인들을 보호하고, 연해주의 발전을 위해 접경국 조선과의 통상증진을 모색한다는 목적을 가지고 발칸반도와 한반도로 남하하면서 유라시아 대륙 전반에 걸친 영·러 대립구도가 성립되었다.

러시아 해군상 쉐스타코프 제독은 아프가니스탄 국경문제를 둘러싼 영·러 대립을 해결함으로써 거문도 사건의 해법을 찾고자 했다. 그는 거문도를 직접 시찰하여 영국의 제독들과 소통한 경험 그리고 한반도 항구들을 탐사한 결과에 따라 한국에서 부동항 획득을 포기하기로 결정했다. 특히 러시아 연해주 지역을 방어하는 러시아 군사는 1만8천 명 정도로 빈약했다. 러시아 극동해군도 영국 함대에 대항하기에 역부족이었다.

 

영국도 서울주재 영국총영사 W.G. 에스턴을 통하여 협상을 조선에 제의했다. 즉 거문도를 영국의 급탄지로서 임차교섭을 하되 금액은 1년에 5,000파운드 이내로 하고 싶다는 것이었다. 거문도 점령에 대한 비난이 고조됨과 동시에 4월말부터 아프가니스탄 문제에 관한 영국·러시아 간의 긴장이 완화되고, 8월 2일 아프가니스탄 협정이 조인되자 영국은 거문도점령의 명분이 없어졌다.

 

영국 해군도 거문도가 군항 내지 급탄소로서 적당하지 못하다는 결론을 내리고, 외무성의 정치적 타결만을 기다리게 되었다. 국제동향을 예의주시하던 영국 외상 로즈베리는 1886년 3월 다른 나라들이 거문도를 점령하지 못하도록 하는 보장만 해주면 거문도에서 철수할 의사가 있음을 밝혔다. 그해 8월 28일과 9월 2일에 열린 회담으로 청의 이홍장과 주청 러시아 공사 라디젠스키는 영국군이 거문도에서 철수한다면 러시아는 조선영토를 침범하지 않겠다는 3개조의 조회장(照會章)을 공동으로 발표했다.

영국 주요 언론들이 연일 러시아와 전면전이 불가피하다고 보도하는 가운데 영국과 러시아의 전쟁위기가 고비를 넘기면서 아프가니스탄 판데 사건을 둘러싼 영국과 러시아는 길고 긴 협상에 들어갔다. 1887년 여름, 판데를 중립 지대로 남겨 둔다는 데 9월 10일 협상이 타결, 아프가니스탄 판데 사건을 마무리 지었다. 그러나 아직도 아프가니스탄을 둘러싼 열강들의 각축은 지금도 현재 진행형이다.

한편 영국과 러시아 협상이 조인됨에 따라, 청나라의 이홍장은 이때가 거문도 문제를 해결할 적기로 판단해 적극 중재에 나섰다.

그 결과 이홍장은 청나라 주재 러시아 공사로부터 ‘러시아는 한국의 영토를 어느 지점도 점령하지 않겠다’는 약속을 받아 영국에 통보했고, 1887년 2월27일(고종 24년), 22개월여 만에 영국 함대는 거문도에서 철수했다. 거문도 사건은 한반도 주변국들의 외교 전략에도 크고 작은 영향을 미쳤다.

판데 사건 등 러시아 남진에 골머리를 앓던 영국은 동북아에서 1902년 일본과 전략적 동맹을 맺어 러시아 견제를 위한 동맹국을 확보했다. 일본 또한 러시아를 제어할 영국과 합력하면서 조선반도 병탄을 위한 국가전략 실천에 한걸음 다가갔다. 영국도 후유증이 컸다. 판데 중립지대화 합의로 사건은 종결됐으나 영국 국민들은 강경론을 부르짖던 보수당에게 몰표를 던져 정권이 뒤바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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