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거문도 사건, 동북아판‘그레이트 게임’

 

최초로 한반도 동해안 영해를 실측(實測)한 러시아는 부동항 확보 차원에서 거문도의 전략적 가치에 주목했다. 1854년 푸티아틴 제독이 이끄는 러시아 함대 파라다호(號)는 22일에 걸쳐 한반도 남해 거문도를 비롯해 동해안 전역을 실측하고 지도를 제작했다. 그들은 거문도에서 정박하며, 석탄 저장소 설치 가능성 등도 조사했다. 후에 이 자료가 러시아의 조선경략(經略)의 기초자료가 되었음은 물론이다.

이를 토대로 종래의 쿠루젠시탄의 지도와 영국 해군성지도가 대폭 수정되었으며, 마침내 ‘고요한 아침의 나라’는 만방(萬邦)에 속살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당시 이러한 러시아의 움직임을 영국과 일본 등 주변 열강들은 예의주시하고 있었다.

 

‘거문도 사건’은 영국과 러시아의 영토 팽창 과정에서 조선이 본격적으로 국제정치에 등장하는 계기이자, 영토가 침탈당한 세계사적 사건이었다. 조선을 비롯해 주변의 청나라와 일본은 물론, 영국 러시아 독일 등 서구열강 등 7개국이 자국의 이해에 따라 허허실실(虛虛實實)로 적극 개입했다.

영국은 크림반도를 통해 러시아를 공격하려 했지만 당시 프로이센 총리인 비스마르크가 길목을 막았다. 극동에서도 러시아 영향력이 강화되면서 러시아의 함경도 영흥만 점령 계획설이 나돌자 영국의 러시아 견제는 불가피했다. 이 때 러시아의 남진정책 저지를 위한 조선반도의 전략적 가치를 주목, 러시아 함대를 견제한다는 명분으로 거문도 무력점령이 국가적 과제로 떠오른 것이다. 영국 내각은 1885년 거문도 선점권 확보를 의결하고 당초 크림반도 진출계획을 바꿔 블라디보스토크를 공격하기로 한다. 그 계획의 실천이 바로 거문도 점령이었다.

영국 해군의 거문도 강점이 국제정치 속에서 러시아와 중동에서 벌어진 사태에 따른 세력 균형을 맞추려고 갑작스럽게 이루어진 것처럼 이해하지만 영국은 오래전부터 거문도 강점을 준비해왔다.

1877년 홍콩에 주둔한 영국 해군 중국본부(China Station) 본부장이었던 라이더 제독은‘러시아를 견제하고 중국과 일본을 상대로 하는 무역을 보호하기 위한 해군 거점으로 거문도를 점령해야 한다.’는 보고서를 올린 바 있다.

 

전격적인 거문도 불법 점거로 중앙아시아 지역에서 경쟁하던 영국과 러시아의 대결이 극동에서도 치열한 경쟁이 벌어지기 시작한 것이다. 러시아가 아프가니스탄 국경의 판데(Pandjeh)를 침공하여 인도로 가는 통로를 위협하는 극도의 긴장된 전시상황 하에서, 영국은 러시아 남하 저지전략으로 거문도 점거를 선택했다. 남진(南進)하는 러시아와 대영제국의 싸움이 한반도 거문도에서도 펼쳐진 것이다.

 

허를 찔린 러시아는 영국의 거문도 점령에 대해 민감한 반응을 보였다. 러시아는 블라디보스토크 항구에 들어오는 외국 선박을 격침하겠다고 선언했다. 러시아는 청나라가 영국의 거문도 점령을 시인한다면 러시아도 한반도의 제주도나 원산을 점령하겠다고 위협했다. 또 영국의 선제 행동에 대해 조선에 본격 출병을 할 수 있다고 으름장을 놓았다.

전쟁이 벌어질 경우 단순한 국지전이 아니라 글로벌 차원에서 사활을 건 거대한 전쟁으로 번진다는 엄중한 상황 앞에서 러시아 황제는 망설이지 않을 수 없었다. 결국 시간이 지나면서 영국과의 전면전만큼은 너무 무리하다는 생각에서 러시아 황제는 육군이 판데 너머로까지 행동하지 말라는 훈령을 내렸다. 그러나 영국 쪽에선 결국 러시아 육군이 판데를 넘어 아프가니스탄 쪽으로 침공할 것으로 내다보았고, 나머지 나라들도 그런 판단을 했다.

러시아는 조선 정부에 대해서도 영국에 항의할 것을 요구했다. 이에 조선 정부는 청나라를 통해서 영국에 항의하고 청나라 정부도 중간 알선에 나서게 되었다.

점령초 청은 러시아에 대한 방비와 조선에 대한 종주권을 국제적으로 보장받으려는 목적으로 영국의 거문도 점령을 묵시적으로 인정했다. 영국은 당초 청나라와 교섭하여 거문도를 조차할 계획이었으므로, 3월 14일에 거문도 협정안을 제시했다. 그러나 북양대신 이홍장이 이 사건으로 러시아와 일본이 각각 조선 내의영토점령을 요구하고 나설 경우 국제분쟁으로 커질 것을 우려해 영국의 거문도 조차에 반대하면서 조선정부에 통고했다.

이어 북양수사 제독 정여창에게 군함을 이끌고 조선으로 가 조선 정부가 신중히 대처토록 하고, 조선 관리와 함께 거문도를 방문해 영국군 동정을 살핀 뒤 나가사키로 가서 영국 제독과 만나도록 지시했다.

동시에 조선 이재황에게 서신을 보내 영국의 거문도 점령 경위를 설명하고 톈진 조약 체결을 통보했다. 서신 마지막 부분에서 이홍장은 조선이 군비(軍備)에 힘쓸 것을 당부했다. 당시 이홍장의 서신내용은 다음과 같다.

 

‘귀국의 제주 동북쪽으로 100여 리 떨어진 곳에 거마도(巨磨島)가 있는데, 그 섬이 바로 거문도(巨文島)입니다. 바다 가운데 외로이 솟아있으며 서양 이름으로는 해밀톤〔哈米敦〕섬이라고 부릅니다. 요즘 영국과 러시아가 아프가니스탄〔阿富汗〕경계 문제를 가지고 분쟁을 일으키고 있습니다. 러시아가 군함을 블라디보스토크(해삼위:海蔘葳)에 집결시키므로 영국은 그들이 남하하여 홍콩〔香港〕을 침략할까봐 거마도에 군사와 군함을 주둔시키고 그들이 오는 길을 막고 있습니다.

이 섬은 조선의 영토로서 영국 사신이 귀국과 토의하여 수군을 주둔시킬 장소로 빌린 적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잠시 빌려서 군함을 정박하였다가 예정된 날짜에 나간다면 혹시 참작해서 융통해 줄 수도 있겠지만, 만일 오랫동안 빌리고 돌아가지 않으면서 사거나 조차지(租借地)로 만들려고 한다면 단연코 경솔히 허락해서는 안 됩니다.

구라파(歐羅巴) 사람들이 남양(南洋)을 잠식할 때에도 처음에는 다 비싼 값으로 땅을 빌렸다가 뒤에 그만 빼앗아서 자기소유로 만들었습니다. 거마도는 듣건대 황폐한 섬이라 하니, 귀국에서 혹시 그다지 아깝지 않은 땅으로 볼 수도 있겠지만 홍콩 지구 같은 것도 영국 사람들이 차지하기 전에는 남방 종족 몇 집이 거기에 초가집을 짓고 산 데 불과하였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점차 경영하여 중요한 진영(鎭營)이 되었고 남양의 관문이 되고 있습니다. 더구나 이 섬은 동해의 요충지로서 중국 위해(威海)의 지부(之罘), 일본의 대마도(對馬島), 귀국의 부산(釜山)과 다 거리가 매우 가깝습니다. 영국 사람들이 러시아를 방어하기 위한 것이라고 변명하지만 어찌 그들의 생각이 따로 있지 않을 줄을 알겠습니까?

이토 히로부미는 이전에 나와의 담화에서 영국이 만약 오랫동안 거마도를 차지한다면 일본에 더욱 불리하다고 하였습니다. 만일 귀국이 영국에 빌려준다면 반드시 일본 사람들의 추궁을 받을 것이며, 러시아도 곧 징벌하기 위한 군사를 출동시키지는 않더라도 역시 부근의 다른 섬을 꼭 차지하려고 할 것이니 귀국이 무슨 말로 반대하겠습니까?

이것은 도적을 안내하여 문으로 들어오게 하는 것으로 이웃 나라에 대하여 다시 죄를 짓게 되며 더욱이 큰 실책으로 됩니다. 그뿐 아니라 세계정세로 보아서도 큰 관계가 있으니, 바라건대, 전하는 일정한 주견을 견지하여 그들의 많은 선물과 달콤한 말에 넘어가지 말기 바랍니다.

이제 정 제독(丁提督)에게 군함을 주어서 이 섬에 보내어 정형(情形)을 조사하게 하는 동시에 귀 정부와 함께 진지하게 토의하게 하니, 잘 생각해서 처리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고종 실록> 고종22년(1885년) 3월20일자

 

일본 대리공사 곤도 모토스케(近藤眞鋤)가 교섭통상사무아문(交涉通商事務衙門)의 독판(督辦) 김윤식(金允植)에게 회답편지를 보내왔다.

 

“비밀 편지를 받아보았습니다. 거문도(巨文島)에 대한 문제는 귀국의 국권(國權)에 관계되는 중대한 문제인 것 같습니다. 그래서 곧 영국 대신(大臣)의 비밀 편지를 보았는데 단지 만약의 경우에 대응하게 한 것이라고만 말하였습니다.

그러니 생각하건대, 영국이 방비하겠다고 말한 나라가 가령 귀국과 수호조약(修好條約)을 체결한 나라라면 관계되는 바가 더욱 크지 않겠습니까? 대체로 동맹한 각국 가운데서 만약 불행하게도 서로 관계가 나빠진 나라들이 생겨서 어느 한 나라가 귀국의 지역을 차지하고 만약의 경우에 대처하자고 할 경우에 귀국이 허락한다면 그 한 나라에는 이로울 것이지만 다른 한 나라에는 해로울 것입니다.

그러니 이는 관계없는 나라로서 서로 유지해 주고 서로 처리해 주는 방도에 어긋날 것 같습니다. 그러나 귀 대신이 영국 대신에게 귀국이 허락할 수 없을 뿐 아니라 다른 각국에서 요구한다 하여도 절대로 승인할 리가 없다고 대답한 것은 정말 지당한 말입니다.

이번에 영국의 이 행동에 대하여 우호 관계를 가지고 있는 각국에서는 귀국의 의사를 모르기 때문에 영국의 행동이 혹시 귀국의 허락 하에 나온 것이 아닌가 하고 의심할 수 있을 것입니다. 오늘의 계책으로서는 응당 영국에 통지한 내용을 우호 관계를 가지고 있는 각국에 통지하여 영국이 이 섬을 차지한 것이 귀국에서 윤허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면 각국에서는 의심을 저절로 풀 수 있을 것이고 공론(公論)이 귀결될 것입니다. 이 문제에 대하여 본 공사는 본국 정부의 훈령을 아직 받들지 못하였으므로 사적인 견해를 대강 밝혀 회답을 보내니, 귀 대신이 타당하게 처리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 <고종 실록> 고종22년(1885년) 3월29일자

 

저작권자 © 한국도시환경헤럴드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