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드게임, 제 2의 거문도 사건

 

거문도 점령은 영국이 느닷없이 약소국 조선을 침탈한것이 아니라, 19세기의 강대국 러시아 제국과 '거대한 게임'을 벌이면서 러시아의 남하를 저지하려는 목적에서 일어난 동북아의 그레이트 게임으로 이해해야 한다. 영국 입장에서 거문도 점령은 영국·야프가니스탄 전쟁이나 크림 전쟁, 영·일동맹과 본질적으로는 다르지 않은 사건이었다. 1853년 이래 1907년까지 무려 50년 동안 영국은 러시아 남하에 맞서 냉전에 버금가는, 전 지구적 규모의 대치 상태를 만들고 있었기 때문이다.

특히 발칸 반도로의 남하가 좌절된 러시아는 중앙아시아와 동아시아에서의 남하에 관심을 가졌고, 이는 영국으로서는 무시하기 어려운 일이었다. 2차례의 아프가니스탄 전쟁은 러시아의 남하를 저지하기 위한 방파제를 확보하려는 영국의 세계 패권국 지위 유지목적으로 수행되었다.

영국의 거문도 점령 경위는 러시아 경계에서 비롯되었다. 조선은 1884년 12월 묄렌도르프를 통해 러시아에 청·일 전쟁이 벌어지면 조선 보호를 위한 5~6만 명 규모 조·러 연합군 구성을 제안했다. 비밀협상으로 유사시 거문도의 러시아 해군 석탄보급기지 사용 등을 약속한 조·러 밀약설이 나돌자 조선의 친러 정책과 러시아의 조선내 세력 확대에 청·영국이 민감하게 반응하였다.

비밀협약설과 함께 수교 불과 몇 달 후, 그동안 조선의 위협국가로 인식되어 왔던 러시아에 조선이 어떻게 그런 제안을 하고 밀착하게 되었는지 영국으로서는 충격적이었다. 일본 주재 영국대사관이 본국에 조·러 밀약설을 긴급 보고하자, 영국의 러시아 야심에 대한 경계가 극에 달했다.

영국이 거문도 강점을 결정하기까지는 몇 가지 요인도 작용했다. 1885년 1월 28일 영국 외무부는‘러시아 조선 남부 섬 점령 계획’을 보도한 당시 러시아 주재 대사가 보내온 러시아 잡지 노보스티의 기사 번역문을 해군성에 보냈다. 쿠엘파트(Qualpart)섬(유럽에서 당시 제주도 명칭)일 가능성이 높다고 했다.

또 조선이 러시아와 기사 내용을 뒷받침하는 밀약을 맺었다는 일본 주재 영국대사관의 보고까지 전해졌다.

1885년 영국의 거문도 점거는 러시아의 부동항 획득을 사전에 봉쇄하려는 의도에서 빚어진 것이라는 통설과 다르게 영국에 의해 의도적으로 조장된 측면도 있다는 주장도 있다. 러시아가 아프카니스탄 국경의 판데(pendjeh)를 침공하여 인도로 가는 통로를 위협하는 극도의 긴장된 조건에서 영국이 러시아 남하를 핑계 삼아 선수를 친 것이라는 주장이다.

 

 

■ 왜 거문도(巨門島)인가

 

영국은 일찍이 세계지도를 놓고 글로벌경영을 위한 그랜드 디자인을 하면서 해양대국(海洋大國)답게 태평양에 대한 조사를 대대적으로 실시했다.

1845년 사마랑(samarang)호를 이끌고 제주도에서 거문도 해역까지 약 1개월 간 탐사했던 영국해군 에드워드 함장은 <사마랑호 탐사 항해기(Narrative of the Voyage HMS Samarang)>를 발간했다. 거문도를 당시 해군성 장관 이름을 따서 ‘해밀턴항(Port Hamilton)’으로 명명한 영국은 1859년 대마도 근처를 몇 주간 정밀 조사했다. 일본도 서구 열강의 한반도를 둘러싼 움직임을 예의주시하던 차였다.

영국은 러시아 남하를 저지하기 위해 대(對)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 봉쇄작전 중간기착지로 거문도를 유사시 점령하기 위한 작전계획까지 수립했다. 그리고는 40여년 뒤 실제 거문도 무단 점령한 것이다.

 

영국해군이 거문도를 공략할 것이란 소문이 동아시아 지역의 개항장인 홍콩· 상해· 요코하마· 나가사키 등지에서 파다했다. 영국은 청나라 홍콩 주둔 함대 사령관 윌리엄 도웰(William Dowel) 해군 중장에게 긴급 훈령을 내려 일본 나가사키에 정박 중인 군함을 출동시켜 거문도 점령을 명한다. 대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 봉쇄작전이 시작되었다. 대한해협에서 러시아의 목줄을 쥐려는 의도에서 벌어진 명백한 국제법 위반이었다.

 

1885년 3월 30일 러시아 판데 점령이 알려진 것은 4월 7일경이었고, 그로부터 즉각 전쟁 준비에 들어간 영국이 4월 15일 거문도를 점령했다. 1차로 영국군은 아가멤넌호 등 군함 6척·상선 2척, 그리고 승무원 617명이 조선에 아무런 통보도 없이 거문도를 점령한 것이다. 영국은 무단 점령이 명백한 국제법 위반임을 의식, 러시아가 거문도나 조선의 다른 지역을 점령할 계획이므로 사전에 이를 막기 위한 것이라고 선전했다.

영국은 이어 중국 주둔 함대를 거문도에 속속 진입시켜 많을 때는 군함 13척, 총 병력 2천 명을 상회하였다. 이들 해군은 내항에 목책을 설치하고 막사를 건설하는 등 여섯 개 처에 포대와 병영을 쌓아 요새를 구축했다. 섬 주위에 수뢰(水雷)를 부설하고 3개의 항만 출입구에 방어시설을 구축하였다.

당시 영국 해군은 거문도를 점령하자마자 거문도와 양자강 입구 상하이까지의 600㎞를 통신선으로 연결하는 공사를 시작했다. 그 결과 5월 28일 상하이와 거문도 간의 통신선이 설치됐고, 거문도와 홍콩과는 6월 2일에 연결됐다. 거문도와 홍콩의 영국 해군 중국본부 사이의 1800㎞에 통신선이 연결된 것이다.

막사 건축과 해안 축조는 거문도 주민을 동원하고 용역을 받은 미국건축업자가 중국인 목수와 미장이를 대동하여 만들었다. 당시에 거문도 상주인구는 약 2000여 명으로 그 중에서 성인 남자 300여 명이 일당 6펜스(조선엽전 75푼)씩 받고 동원되었다. 물론 일부는 물자로 지급되기도 했다. 당시 영국 해군대위의 일당이 4펜스로 일 값은 제대로 지불, 주민과 마찰이 없었다고 한다.

그렇다면 영국은 수많은 남해안 섬 중에서 하필이면 거문도를 주목했을까.

여수와 제주도 중간 지점에 위치한 거문도는 면적 12㎢인 다도해의 최남단 섬으로 고도, 동도, 서도 세 섬으로 이루어 있어 삼산도(三山島)라 불렸다. 작은 섬들로 둘러싸인 내해는 언제나 파도가 잔잔하고 간조 때도 수심이 14~16m로 유지되는 천혜의 양항(良港)인데다, 아늑한 만이 요새처럼 숨어 있어 지정학적으로 군항조건에 안성맞춤이었다.

거문도는 남해안과 제주도의 중간 해역이자 대한해협의 문호로서 제주도와 한반도, 일본 큐수와의 삼각지점에 위치한 전략적 요충지였다. 한·일 간 해상통로이며, 러시아 동양 함대의 길목에 위치해 서구열강에 동북아 군함과 무역선이 중간 기착하는 군항(軍港)으로 완벽한 조건을 갖춘 항구로 평가됐다.

 

영국은 거문도 점령 5일 뒤인 4월20일에야 청나라와 일본에 점령 사실을 통보했다. 1883년 11월 26일 조선과 우호통상조약을 맺어 1884년 4월4일 영국 공사 해리 스미스 파키스(Harry Smith Parkes)가 주한 영국 총영사관을 열고 상주했음에도 불구하고 조선에는 한 달이 훨씬 지난 5월20일에야 통보했다. 그것도 일본으로부터 조선에 통보를 정식으로 했느냐는 문의를 받고서야 영국의 북경 대사관을 통해 간접적으로 통고하는 방식이었다.

영국의 거문도 점령 사실을 조선 조정에서 뒤늦게 알고 대책회의를 열었다. 사건 보고를 접수한 외무협판 김윤식은 당대 최고의 지식인이었지만 어전회의에서 거문도 위치를 “강화도 근처의 주문도를 말하는 거 같습니다.”하는 등 정부 요인들은 거문도 위치조차 몰라 횡설수설했다. 조선 정부의 국토에 대한 인식정도를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사례이다.

4월20일 청나라 주재 일본 공사 에노모토는 영국의 거문도 점령 사실을 전보로 일본 정부에 긴급 보고했다. 다음 날인 21일 조선 침략을 위한 교두보 확보 기회를 예의주시하던 일본 정부는 총리 이토 히로부미 주재로 긴급 대책회의를 열고 거문도에 군함을 파견하기로 결정했다. 일본은 원교근공책(遠交近攻策)에 따라 영국과 우호관계를 유지하되, 청나라를 부추겨 영국으로 하여금 스스로 거문도에서 철수하게 한다는 방략을 세웠다.

4월24일 청나라 주재 영국 임시대리공사 오코너는 본국 정부 훈령에 따라 조선에 거문도 점령을 통고하는 조회문을 작성해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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