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망국(亡國) 앞당긴 내부 분열과 비밀외교

 

갑신정변 이후 전개된 국제정치관계의 결과 체결된 조약이나 발생한 사건은 조·러 통상조약(1884.5) - 한성조약(1885.1) - 제1차 조·러밀약(1885.4) - 영국의 거문도점령(1885.4.15.) - 톈진조약(1885.4.18.) - 제2차 조·러밀약설(1886.7) -- 조·러육로통상장정(1888) 등 숨 가쁘게 전개됐다.

조·러통상조약 체결(1884.5) 뒤 조선정부는 러시아 황제에게 밀사를 보내 보호를 요청하는 고종친서를 전달(1884.12)하기에 이르렀다.

이때 묄렌도르프 중재로 베베르 러시아 공사와 접촉하여 러시아의 조선 내 영향력 확대를 용인하는 대신 러시아 군사교관 초빙 및 청일전쟁 발발시 조선의 독립을 지켜준다는 비밀교섭(제1차 조·러 밀약설, 1885.4)을 벌였다. 그러나 곧 1차 조·러 밀약은 체결추진 사실이 폭로되어 실패하였다.

고종 - 민씨 세력이 조·러 밀약을 추진한 사실이 알려지자, 청은 이를 주선한 묄렌도르프를 소환하고(1885) 미국인 데니를 내무협판에 임명되도록 하는 한편, 친러 고종 - 민씨 세력을 견제하기 위해 청에 있던 대원군을 조선으로 귀환시켰다. 이러한 청의 견제로 1차 조·러 밀약은 무산되었다.

고종의 왕위 폐위까지 거론한 청나라의 압박으로 위기의식을 느낀 조선 조정은 러시아 공사 베베르에게 러시아의 보호 요청과 함께 군함 파견을 간청하는 고종의 국서를 전달하기도 하였다(1886.7, 제2차 조·러 밀약설).

조선과 제3국과의 분쟁 시 러시아가 군사적으로 원조해 준다는 내용의 조·러밀약이 베베르 공사와 김윤식 외무협판 간에 체결되어 친러파가 크게 부상하자 청나라는 이런 사태를 방치할 수 없었다. 조·러 밀약 추진에 대해 청이 묄렌도르프 소환, 고종-민비 세력을 견제하기 위한 대원군 환국 등 견제에 나섰지만 명성황후를 중심으로 러시아 의존도가 심화되었다.

러시아 세력을 끌어들여 청나라 압제를 견제하려 한‘인아거청책(引俄拒淸策)’은 일종의 이이제이(以夷制夷) 전략이었다. 그러나 이 정책은 지도층의 무능과 정보부족으로 거문도 점령과 명성황후 시해(弑害), 아관파천(俄館播遷)이라는 비극의 씨앗을 뿌리고 조선왕조 멸망으로 이어져 망국(亡國)을 앞당긴 계기로 작용하게 된다.

 

■ 한반도에서의 맞붙은 러시아와 영국

 

조선에 대한 영토적 야심을 갖고 있던 영국과 러시아는 아편전쟁 패배로 서구 열강의 먹잇감이 된 청나라와 개별적으로 조약을 맺었다. 1842년 난징조약(南京條約)으로 홍콩을 확보한 영국은 다시 베이징조약(北京條約)을 체결해 홍콩 섬 맞은편의 주룽을 1860년 10월24일부터 할양받았다.

러시아는 1858년 헤이룽장(黑龍江)성의 북쪽 아무르 강 연안의 아이훈에서 불평등 조약인 아이훈조약(愛琿條約)으로 헤이룽 이북지역을 확보하고 연해주까지 할양받았다. 시베리아 지역을 차지하고 태평양에 진출하기 위한 교두보로 블라디보스토크에 군항을 건설했다.

블라디보스토크는 원래 만주의 일부로, 과거에는 북옥저, 고구려와 발해의 땅이었다. 그 뒤 요나라, 금나라, 원나라 영토였다가 후금(後金)의 누르하치가 이 일대를 장악하면서 청나라에 복속되었고 1860년까진 청나라 영토였다.

그러다 부동항 확보를 위하여 일으킨 크림 전쟁에서 패배한 러시아가 유럽 쪽 부동항 확보를 포기하고 아시아 쪽으로 관심을 돌리고, 당시 제2차 아편전쟁으로 혼란에 빠진 청과 유럽 국가 사이에서 전쟁에 불참하고도 국력을 바탕으로 중재자로 나선뒤 그 대가로 베이징 조약을 맺어 이 지역을 러시아 영토로 편입시켰다.

러시아 제국은 1860년에 이곳에 도시를 건설하기 시작했고 이것이 현재 블라디보스토크라는 도시의 출발점이었다. 러시아 본토와 거리가 먼 동쪽 끝 변방이었지만, 러시아 제국이 심혈을 기울여 육성한 항구도시로, 1891년에는 나중에 황제가 되는 니콜라이 2세가 황태자 신분으로 시베리아 횡단철도 착공식에 참석하기 위해 방문하기도 했다. 블라디보스토크는 더 확실한 부동항인 황해의 뤼순(旅順: 러시아어로는 포르트 아르투르)이 건설되자 중요성이 조금 낮아졌다가, 러·일 전쟁 패배 후 다시 유일한 극동(極東)의 부동항이 되면서 가치가 올라갔다.

 

이때 블라디보스토크를 차지한 러시아는 함경북도 북동단의 경흥을 조차지(租借地)로 확보한 뒤, 겨울에도 얼지 않는 부동항의 적격지로 영흥만·제주도·쓰시마 섬 등을 노리고 있었다. 이 중에서도 영흥만이 가장 유력한 점령 대상지였다.

러시아 입장에서는 유능한 외교관이었던 베베르 공사의 활발한 활동으로 조선 내에 러시아 영향력이 강화되면서 한반도에 야심을 갖고 있던 러시아의 함경도 영흥만 점령 계획설이 일본과 조선 내에서 나돌자, 그레이트 게임 당사자인 영국은 방관할 수 없었다.

당시 영국과 러시아는 크림반도에서 이란, 아프가니스칸을 거쳐 동아시아에 이르는 넓은 지역에서 사사건건 대립하고 있었다. 영국은 동아시아에서 러시아의 남하로 만주와 중국에서 러시아 영향력이 확대는 것을 경계, 러시아 견제가 불가피해졌다. 이는 육군 규모 세계 1위의 러시아와, 해군 세계 1위의 영국이 한반도에서 펼쳐질 대륙세력과 해양세력의 세기적 대결의 전초전(前哨戰)이었다.

 

대륙세력과 해양세력의 접점인 한반도에서 발생한 영국의 거문도 점거는 당시 개화파와 쇄국파의 생사를 건 권력투쟁의 소산인 갑신정변(1884년)으로 조선의 국내 정치가 혼미한 상황에서 발생했다. 영국이 거문도에서 철병한 10여년 뒤 영국이 우려했던 대로 러시아세력이 본격적으로 한반도에 손을 뻗치게 된다. 국왕이 러시아 공사관에 피신하여 국사를 보았다는 주권국가로서 치욕적인 1896년의 아관파천(俄館播遷)은 망국의 전조(前兆)로서 다른 열강에 치욕적인 민낯을 보인 것이다.

영국의 거문도 점령이 러시아세력의 남하를 저지하려던 선제공격이었다면 1902년의 영·일 비밀동맹은 영국이 일본을 내세워 러시아의 남진을 저지하려고 한 또 다른 견제구였다. 2년 뒤 일본은 막강한 영국을 뒤에 엎고 러·일전쟁(1904~5년)을 일으켜 승리한 후 급기야 조선 병탄(倂呑)의 수순을 밟게 된다. 거문도사건은 영·일동맹의 단초를 제공했고, 일본이 당시 대륙의 최대강국 러시아에 도전하는 빌미를 제공하였으며 그 결과 조선은 망국(亡國)의 수순을 밟게 되는 것이다. 

저작권자 © 한국도시환경헤럴드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