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대국(大國) 청나라의 처참한 몰락

 

동북아시아에서 한반도의 지정학적 중요성이 커지면 커질수록 패권국가로 자웅을 겨루던 열강들은 한반도를 영향력 아래에 두려고 혈안이 돼 각축했다.

인접국가인 청나라와 일본은 물론, 미국과 영국, 독일, 러시아 등 서구 열강도 해양세력과 대륙세력으로 나뉘어 은둔의 나라 조선이 갖는 국제정치 패권경쟁 속에서 지정학적 위치의 중요성을 인식, 주도권 장악을 위한 합종연횡을 전개했다.

이렇듯 급변하는 국제정세였지만, 국제정치 흐름에 대한 빈약한 정보와 지도층의 무능한 리더십으로 4분5열 상태였던 조선정부는 그야말로 북한 핵무장에 대비해‘핵 우산’을 찾는 요즘 처럼‘보호국’을 찾아 갈팡질팡 우왕좌왕하다 결국 지리멸렬로 치닫게 된다. 이 무렵 발발한 청·일 전쟁은 일본과 청나라가 조선에 대한 우월적 지배권을 행사하기 위한, 피할 수 없는 한판 싸움이었다.

 

명성황후가 실력자였던 조선은 임오군란 때 청나라 군대를 요청해 진압하고 정적인 대원군을 납치하도록 했던 것처럼 농민봉기를 진압할 수 없었던 국내 문제에 또 청나라를 끌어들였다. 1894년 5월, 정부 부패에 분노해 봉기한 농민군 진압이 자력으로 힘들어지자 청나라에 파병을 요청한 것이다. 이에 청나라 군대가 6월8일 아산만에 상륙했고, 조선 정세를 주시하고 있던 일본은 다음날(6월9일), 영사관 보호를 내세워 오토리 게이스케(大鳥圭介) 공사가 일본군 420명을 이끌고 서울로 진격하였다.

정한론(征韓論)을 바탕으로 호시탐탐 조선 병탄 기회를 노리며 10여년 이상 준비해 온 일본은, 물실호기(勿失好機)로 8,000여명의 일본군 주력부대를 서울로 진격시켜 7월23일 경복궁을 점령했다. 청나라 군대가 조선에 파병할 때에는 일본군대도 파병한다는 톈진 조약에 따라 조선에 군대를 파견한 것이다.

이틀 후 7월25일, 아산만 근처 풍도(豊島) 앞바다에서 일본 군함은 청나라 군인을 실은 영국 상선 고승호를 침몰시키면서‘청·일전쟁’의 분수령이 된 해전(海戰)이 발발했던 것이다. 여기서 청나라 군사 1,200여명이 일본 전함 공격에 격침돼 전사했다.

청나라와 일본 양국은 선전포고(宣戰布告)를 하고 전면전으로 돌입했다. 하지만 이후 벌어진 평양 전투와 압록강 어귀에서 벌어진 해전에서도 청군이 패주했다. 일본 해군은 우세한 전력으로 연승하며, 산둥반도의 웨이하이웨이(威海衛)까지 점령한 후, 최후로 유공도(劉公島)의 함대를 격파해 이홍장의 북양함대(北洋艦隊)는 궤멸되었다.

청나라 북양수사제독(北洋水師提督) 정여창(丁汝昌)은 항복문서와 함께 모든 군사물자를 일본에 양도하고 자결했다. 일본군은 랴오둥반도·발해(보하이이)만·산둥반도를 장악하고, 베이징·톈진을 위협하였다. 곧바로 청나라 전체를 정복할 기세였다.

전쟁을 철저히 준비해온 일본은 무력하고 부패한 청나라를 상대로 압도적으로 승리할 수 있었다. 청·일전쟁의 승리로, 일본은 오랜 세월 동아시아의 맹주였던 청나라로부터 패권을 넘겨받았고, 조선 등 대륙으로의 침략을 한층 강화할 수 있게 되었다. 반면 패전국 청나라는 하루아침에‘동네북’으로 전락, 제국주의 열강의 침략에 속수무책으로 당하는 몰락의 길을 걷게 된다. 세계열강의 먹잇감이 된‘연한 고기’라는 표현대로 청나라는‘종이호랑이’라는 평판을 받은 3류 국가로 몰락한 것이다. 이토 히로부미는 당시 총리로서 청·일전쟁의 사령탑이 되어 지휘했다.

이럴 즈음 영국과 러시아, 미국 등이 중재에 나섰다. 그 결과 일본과 청국은 1895년 4월 시모노세키조약(下關條約)을 체결해 청·일전쟁의 뒤처리를 하였다. 일본은 승전 대가로 청나라 1년 예산의 2.5배에 달하는 거액의 배상금과 중국의 영토인 랴오둥 반도(遼東半島), 타이완(臺灣) 등을 할양받았다.

그러나 만주 진출을 꾀했던 러시아는 일본이 랴오둥 반도를 장악하는 것에 위기감을 느끼고, 프랑스·독일 등과 함께 랴오둥 반도를 중국에 반환토록 압박했다. 힘의 열세를 느낀 일본은 결국 랴오둥 반도를 반환하였고, 아무 관련도 없는 러시아가 강대국이라는 이유로 일본을 압박하는데 대한 불만은 심화되어 전 국민적으로 대 러시아 적개심이 불타올랐다. 러시아의 힘에 무릎꿇는 굴욕을 당한 일본의 무력감이 전쟁 결의로 다져지면서 10여년 뒤 치러질 러·일전쟁의 씨앗이 잉태되고 있었다.

 

 

■ 러시아 등장과 인아거청책(引俄拒淸策)

 

19세기 말, 신흥 강국 러시아가 부동항 확보를 위해 동유럽의 발칸반도, 중앙아시아, 극동아시아 등지로 진출하자 당시의 해양 국가이자 패권국인 영국은 러시아의 남하(南下)정책에 대한 전방위 방어가 불가피해 졌다.

러시아는 1858년 청국과 아이훈 조약을 체결. 아무르 강 좌안 땅을 획득했고, 1860년 11월14일 청국과의 북경조약을 맺어 연해주 등 광활한 영토를 확보했다. 이어 러시아는 극동아시아 최북단에 블라디보스토크(동방을 지배한다는 뜻) 항구를 개척하면서 본격적으로 동방 경략(經略)에 나섰다.

러시아는 블라디보스토크 항구가 1년 중 3개월만 얼지 않은 탓에, 부동항을 확보하려면 더 남쪽으로 내려가야 했다. 1861년 3월부터 6개월간 일본의 대마도 항구 사용을 요구하다가 영국의 개입으로 철수한 일도 있었다. 그래서 영국은 1861년 러시아가 부동항 확보 1차 목표지로 삼은 원산과 함께 대마도 점령을 우려하고 있었다.

 

부동항을 찾아 남하정책을 펴는 러시아는 청나라 속국에서 벗어나 자주 국가를 열망하던 조선에게 크나큰 원군이었다. 당시 정권을 잡고 있던 명성황후와 척족 세력은, 자신들을 견제하기 위해 청나라가 2년째 억류하고 있던 정적(政敵) 대원군을 귀환시키려는 움직임을 보이자 신흥대국 러시아에 주목했다.

일본과 청나라를 견제하기 위한, 특히 1884년 갑신정변으로 청의 내정간섭이 심해지자 청을 견제할 세력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갑신정변 이후 조공(朝貢)체제에서 조선을 식민지로 만들어 지배하려는 청을 견제하기 위해, 명성황후를 중심으로 신흥 강대국인 러시아 세력에 크게 기대를 걸고 있던 조선은 청나라 견제를 위한 조선판 이이제이(以夷制夷) 정략으로 러시아와 수교하기에 이르렀다.

마침 1882년 임오군란 후 조선의 요구에 따른 이홍장 추천으로 조선의 통리교섭통상사무협판, 즉 외무협판(차관)에 임명(1882)되어 외교고문으로 파견된 독일 프러시아 출신 묄렌도르프(Möllendorff)는 청의 지나친 간섭을 방어하려는 정부의 부탁을 수용하여 조·러통상조약 체결(1884.5)을 주선했다.

개화 초기(1882-1885) 조선 최고실력자로 1883년 봄, 해관총세무사에도 임명되어 재정까지 장악한 묄렌도르프는 한성조약이 체결된 뒤 특명전권 대신 서상우와 함께 갑신정변 사과 사절로 일본을 방문했다. 일본으로 떠나기 전 묄렌도르프는 고종을 설득해 일본 주재 러시아 공사와 협상할 전권을 얻었다.

그는‘러시아를 유인해 친교하며 청나라는 멀리 한다’는 이른바 인아거청책(引俄拒淸策)의 설계자가 돼 일본 주재 러시아 공사 스페이에르와 결탁,‘조·러 밀약’을 맺어 러시아 세력을 조선왕조에 끌어들였다.

청나라와 일본의 속박에서 벗어나려던 조선은 신흥 강국인 러시아 쪽으로 빠르게 기울기 시작한다. 러시아를 막아야 된다는 황준헌의 <조선책략>과는 반대인 인아거청(引俄拒淸)으로 국가전략이 방향전환을 한 것이다.

일설에는 독일의 첩자였던 묄렌도르프가 청나라 추천으로 조선에 파견됐음에도 “러시아라는 곰을 동아시아 목장으로 유도하라”는 독일 외무성 지령을 받아 청나라를 속여 가며 1884년 7월 조선이 러시아와 수교토록 주선했다는 설도 있다.

1870년 초‘보불전쟁’으로 프랑스를 제압하고 승승장구하던 통일 독일은 유럽에서 러시아가 세력 확장의 걸림돌이자 버거운 상대로 등장하자, 러시아 눈길을 동양으로 돌리는 것이 유리하다고 판단했다는 것이다.

1884년‘조·러 밀약’에 따라 조선은 러시아에 영흥만(원산)을 조차(租借)하고, 러시아는 조선에 장교와 부사관을 파견해 조선군 육성을 돕기로 하였다. 그러나 이에 영국이 강하게 반발해 거문도를 점령했고, 청나라 이홍장도 격분하였으며 일본도 반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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