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개국(開國)이냐, 쇄국(鎖國)이냐

 

<조선책략>이 유입된 후 조선 조야(朝野)에서는 외교방향에 대한 찬반 논의가 격렬하게 전개되었다. 개국(開國)과 쇄국(鎖國)이라는 국가정책에 대한 갑론을박이 벌어졌고, 논란은 개화파, 수구파로 나뉜 민씨 일파 등 정치집단의 정치적 명분과 이해가 맞물리면서 사생결단의 분란으로 치닫는다.

특히 양반 유생 등 당시 주도적인 지배세력들은, 조선의 개국은 외세·침략 세력과 유착하는 것이라며 위정척사(衛正斥邪)운동 으로 맞섰다.‘위정’은 정학(正學)인 성리학을 옹호하고‘척사’는 성리학 이외에 사악하다고 판단되는 천주교를 비롯한 모든 종교와 사상을 사문난적(斯文亂賊)으로 배격하는 것이다.

정부가 일본과 강화도 조약을 체결하려고 할 때 위정척사 운동이 일어나 전국적으로 번져나갔다. 최익현을 비롯한 유생들은 일본이 서양 오랑캐와 같다는 왜양일체론(倭洋一體論)을 주장하며 개항 반대 운동을 전개했다. 최익현은 이 사건으로 유배되었다. 정부가 미국과의 수교를 추진하려던 시기에도 위정척사 운동이 다시 일어났다.

1880년 11월7일 유원식(劉元植)의 척사상소를 비롯하여 1881년 2월 영남 지방유생들은 이만손(李晩孫)을 소두(疏頭)로 한 영남만인소(嶺南萬人疏) 등 재야에서 보수 유생(儒生) 중심으로 거국적인 위정척사운동이 일어나 서양 열강과의 수교 반대와 <조선책략>을 도입한 김홍집 처벌을 요구했다.

정부는 영남 만인소 사건의 주모자 이만손을 유배시키고 탄압에 나섰다. 이런 움직임은 1866년 병인양요를 계기로 시작됐다. 당시 이항로, 기정진 등 보수 성향의 유생집단은 서양의 무력 침략에 대항하여 척화주전론(斥和主戰論)을 주장하며 대원군의 쇄국정책을 지지하는 상소를 올렸다.

보수적인 양반 유생들의 위정척사 운동은 열강의 침략과 개항의 문제점을 제기하고 경각심을 높이는 데 큰 역할을 했지만, 성리학 사상에 따라 조선 왕조 전제주의 정치 체제와 양반 중심 봉건 사회를 옹호하는 한계를 지니고 있었다.

이렇듯 <조선책략>은 당시 고종을 비롯한 집권층에게는 큰 영향을 주었고, 1880년대 이후 정부가 주도적으로 개방정책 추진 및 서구문물을 수용하는 계기를 마련해주었다.

정부의 대외정책 흐름은 개국으로 방향을 틀었지만 서구열강의 식민지 쟁탈전이 벌어지던 서세동점(西勢東漸)이라는 국제정치의 거대한 격랑 속에서 조선의 국가 진로 문제는 대내외적으로 심각한 도전을 받게 된다.

 

■ 일본제국의 설계자, 이토 히로부미

 

1884년, 조선에서는 국민국가 건설을 지향한 김옥균 등 친일개화파 주도로 청나라에 2년째 억류돼 있던 흥선 대원군의 빠른 귀국과 조공(朝貢) 폐지 등을 내세운 갑신정변(甲申政變)이 일어났다.

내우외환은 더욱 심각해졌다. 개화파는 우정총국 개국 축하연에서 거사, 민씨 정권 요인 6명을 처단하고 창덕궁에 있던 고종을 경우궁으로 옮겨 일본군의 호위를 받도록 했으나 3일 만에 청나라 군대 진압으로 실패했다.

갑신정변 당시 개화파 세력이 내건 14개조 개혁 정강은, 청나라에 억류된 대원군 귀환 요구 등 정치적으로는 청에 대한 사대 외교 폐지, 내각 중심 정치 시행 등 입헌 군주제적 정치체제 도입을 기도한 것이었다. 경제적으로는 지조법 개혁, 재정기관 일원화로 국가재정 충실화를 꾀하고. 사회적으로는 인민 평등권을 제정하고 능력에 따라 인재를 등용하여 정치참여 기회 확대를 표방했다.

개화당 정부를 수립한 갑신정변은 청나라가 개입, 이른바 ‘3일천하’로 끝났고 김옥균, 박영효 등 주모자들은 일본으로 망명했다. 일본의 지원만 믿고 민중 지지를 얻지 못한 채 소장파 파워 엘리트들이 성급하게 추진한 정변(政變)의 한계였다, 이 거사는 국내적으로 임오군란 이후 청나라의 과도한 내정 간섭을 유발했고, 개화정책의 후퇴와 급진 개화파의 활동의 위축을 가져왔다.

갑신정변으로 조선과 일본은 1885년 1월9일 한성조약을 체결, 조선이 거류민 희생에 대해 배상금 10만원과 희생자에 대한 구휼금 지급, 갑신정변 당시 불탄 일본 공사관의 신축비를 부담하기로 했다.

 

일본과 청나라는 1882년의 임오군란과 1884년 갑신정변을 겪으며 조선에서 국익을 놓고 사사건건 대립했다. 동북아시아 지역 국제정치 패권구도를 결정짓는 관건이 된 한반도는 강화도조약 이후 커지는 일본 세력을 물리치고 이전까지의 조공관계를 유지하려고 안간힘을 쓰는 청나라와 대륙 진출 야망을 품고 호시탐탐 조선을 노리는 일본의 대결이 치열하게 전개되었다.

갑신정변 사태수습을 위해 청나라와 일본이 1885년 4월18일 체결한 톈진조약(天津條約)은 한반도에 대한 양국 이견 조정, 청일 양군이 조선에서 4개월 이내 동시 철병, 조선 국왕에게 권해 조선의 자위군을 양성하도록 하되, 훈련교관은 청·일 양 당사국 이외의 나라에서 초빙하도록 할 것, 조선에 다시 군대 파병 필요가 있을 때 상대방에게 사전에 문서로 미리 알릴 것을 명시했다.

특히 향후 조선에서 변란이나 중요사건이 발생하여 청·일 두 나라 또는 어느 한 나라가 파병할 때는 먼저 문서로 연락하고, 사태가 진정되면 다시 철병, 주둔하지 않는다는 내용도 포함되어 있었다.

톈진 조약은 갑신정변 실패의 결과로 1885년(고종 22년) 4월 18일(음력 3월 4일) 청나라 전권대신 이홍장과 일본 제국 전권(全權)대신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가 동북아시아 세력 균형을 위해 맺은 조약이다. 무엇보다 ‘조선 의사와 관계없이’ 청과 일본이 조선에 대해 균등하게 간섭과 파병의 권리를 갖는다는 침략적 국제 조약으로 조선의 정치적, 군사적 상황에 대해 당사국을 배제한 채 두 나라가 임의로 결정한 것이다.

톈진 조약으로 청나라와 일본의 충돌 위기는 일단 해소됐다. 일본은 갑신정변에 책임이 있었지만 이토 히로부미가 주도한 이 조약으로 추궁도 당하지 않고 정식으로 청과 대등한 지위와 권리를 확보했다. 청군을 조선에서 완전히 철수하도록 한 것도 일본 외교의 성과였다.

그러나 청은 상민수륙무역장정에 의거하여 북양함대의 군함을 수시로 인천에 파견하고 지휘관을 주둔시켜 인천을 북양함대의 전진기지로 만들어 서해는 청의 내해(內海)가 됐다. 청은 이를 기반으로 조선 내정에 적극 개입했다.

어느 한 쪽의 일방적 우위 없이 청·일 두 나라의 갈등을 임시방편으로 봉합한 톈진 조약 내용들은 후일 ‘청·일(淸·日)전쟁’ 발발의 원인이 된다. 한반도 내 양국 주둔군 철수를 주요 내용으로 한 이 조약에 명시된 청·일 공동파병권은, 10년 후 그 갈등이 폭발하여 1894년(갑오) 청·일 전쟁이 일어나는 빌미로 작용한 것이다.

이때 이토 히로부미가 조선 문제에 대한 국제적 협상에 얼굴을 드러낸다. 영국 유학생으로 영어가 가능했던 노회한 정치가이자 세계정세를 두루 읽고 있던 그의 등장은 차후 동북아에서 벌어질‘그레이트 게임’에 일본의 개입을 알리는 신호탄이었다.

당시 총리로 톈진 조약 협상의 일본 대표였던 이토 히로부미는 1885년 4월12일, 청나라 이홍장과의 5차 회담에서 조선문제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영국이 조선의 거마도를 점령할 가능성이 있다. 만일 타국이 이 섬을 점령하거나 공격하면 우리는 그곳에 육해군 병영을 설치하거나 국력을 다해 이를 방어하지 않을 수 없다. 따라서 타국이 만일 거마도라는 이름을 가진 이 섬을 점령하는 일이 있으면 귀국도 이와 같이 군사를 보내 방어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4월 20일 이홍장은 청나라 총리아문에‘이토 히로부미는 나라를 다스릴 재주가 있다’라는 제목을 붙인 서한을 보냈다. 이홍장은 서한에서‘일본이 장차 중국에 큰 화근이 될 것’이라고 지적한 후,‘이토 히로부미는 오랫동안 유럽과 미국을 순방한 바 있으며 나라를 다스릴 재주가 있고 지금 부국강병(富國强兵)에 힘쓰고 있으니 10년 후에는 일본의 부강(富强)이 나타날 것’이라고 전망했다. 이홍장의 이 같은 예견은 머지않아 현실로 드러난다.

서세동점 정세하에서 이토 히로부미가 주도하는 일본의 대 조선정책은 조선에 대한 청의 실질적 지배를 저지하는 방향으로 이행하였다. 그 결과 톈진조약이 체결되었다. 그리고 일본의 대조선정책의 전환을 촉진하였던 것이 1885년 4월 15일 발생한 거문도사건이라 할 수 있다.

일본의 대표적 지식인인 후쿠자와 유기치(福澤諭吉)는 영국의 거문도 점령사건과 러시아의 남하정책에 대해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조선정부는 나라를 지킬 수도 없을 뿐만 아니라 인민을 착취하는 구폐를 일소하고자 하려는 의지도 없다고 하였다. 더 나아가 이러한 정부는 인민을 위해 차라리 없는 것이 더 낫다고 말했다. 그리고 이 같은 상황에서 일본은 군비확장을 통해 청과 러시아에 대항할 힘을 키워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후쿠자와 주장은 언뜻 보면 조선에 대한 일본의 침략 의지를 나타내는 것이라 할 수 있으나 실은 조선에 대해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일본의 처지를 비관적으로 나타낸 것이었다. 이같은 주장이 나타나게 된 배경에는 임오군란과 갑신정변 이후 조선에서 청의 종주권이 확대되는 과정에서 영국에 의해 감행된 거문도사건으로 러시아의 조선 진출 혹은 점령이 향후 일본의 조선 혹은 대륙진출에 걸림돌이 될 것이라는 예상 때문이었다. 이처럼 임오군란과 갑신정변 이후 일본은 외교적으로 조선에서 어떠한 영향력도 행사할 수 없는 입장에 있었던 것이다.

일본이 청나라와 동북아 패권을 다투던 상황에서 취할 수 있는 정책은 ‘탈아론(脫亞論)’과 ‘흥아론(興亞論)’, 그리고 이를 뒷받침할 군사력 강화로 집약되었다. 이는 임오군란과 갑신정변과 같이 일본의 국운이 걸린 사건에서 청나라에 패배한 원인과 향후 과제를 고민하는 과정에서 탄생한 국가전략이었다. 즉 일본이 조선에서 청에 패배한 것은 군사력의 열세 때문으로 군비 강화가 국가적 현안이 되었다. 특히 일본이 아시아를 벗어나 유럽과 발전을 같이 해야 한다는 ‘탈아론(脫亞論)’이 국민적 공감을 얻고, 한반도 침략이 일본의 대조선정책 기본이념으로 자리잡게 되었다.

 

후쿠자와가 창간한 『시사신보(時事新報)』는 이를 다음과 같이 보도하였다.

 

아일본(我日本)의 국토는 아시아의 동변에 있지만 그 국민정신은 이미 아시아의 고루(固陋)를 벗어나 서양의 문명으로 옮겨 왔다. 그러나 여기에 불행한 것은 근린(近隣)에 지나(支那)라 하고, 조선이라 하는 차이국(此二國)의 인민도 고래 아시아류(流)의 정교풍속(政敎風俗)에서 살아온 것은 아일본(我日本)과 다르지 않지만 …… 문명개화의 유행을 만나지 못한 양국은 그 전염의 천연을 어겨 무리하게 이를 피하고자 하여 실내(室內)에 한거(閉居)하고 공기의 유통을 막고 있어서 질식되지 않을 수 없다. … 서양인의 눈으로 보면 삼국의 지리상접(地理相接) 때문에 혹은 이를 동일시하고 지한(支韓)을 평가함으로써 아일본(我日本)을 생각하는 의미 없지 않다. … 그 영향이 사실로 나타나서 간접으로 아외교상(我外交上)의 고장을 이룬 것이 실로 적지 않다. 아일본(我日本)의 일대 불행이라 이르지 않을 수 없으니 금일의 모(謀)를 위함에 아국(我國)의 개명(開明)을 기다려 공(共)히 아시아 부흥의 유예(猶豫) 있을 수 없다. 차라리 기오(其伍)를 탈(脫)하여 서양 문명국과 진퇴를 공히 하고 기지나조선(其支那朝鮮)에 접하는 법도 인국(隣國)인 고로 특별히 해석을 내릴 것이 아니라 서양인이 이에 접하는 풍(風)으로 따라서 처분할 수 있을 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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