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장. 망국(亡國)의 전조(前兆), 거문도 무단 점거

 

19세기 말엽, 당시 조선반도엔 미증유(未曾有)의 충격이 거대한 해일처럼 밀려들었다. 조선왕조는 급격히 변화하는 국제정세에 제대로 대처하지 못하는 상황이었다. 국내적으로 500여년 지속된 왕조체제의 말기적 증상인 ‘제도 피로현상’으로 쇠락해가고 있었다.

국권을 상실한 왕으로 조선왕조의 실질적인 마지막 왕이었던 고종이 친정(親政)을 선포하면서 당시 10년 남짓 정권을 장악했던 흥선 대원군이 화무십일홍(花無十日紅)으로 1873년 물러났고, 외척인 민씨 일족이 정권을 잡게 되었다. 일찍이 경험하지 못한 격동의 한복판으로 조선왕조는 내몰리고 있었다.

 

■ 사양(斜陽)왕조 조선의 내우외환(內憂外患)

 

명성황후는 남편인 고종의 묵인 하에 시아버지인 흥선 대원군과의 권력투쟁 끝에 대원군을 실각시킨 뒤 민씨 척족을 앞세워 정권을 장악했다. 민씨 측은 대원군이 적폐로 간주해 대대적으로 폐쇄한 서원(書院)의 부분적 복구로 유생(儒生) 세력 포섭, 조세감면 등을 통해 흐트러진 민심을 얻고자 노력했다. 밖으로는 흥선 대원군이 표방해온 척왜척양(斥倭斥洋)의 쇄국정책을 부분적으로 완화하여 청나라와 전통적인 외교 관계를 유지했고, 우리보다 앞서 근대화 과정을 밟기 시작한 일본과도 유화적인 정책을 취했다.

일본도 그 무렵 사회적 정치적 격변을 거듭했다. 200여년 지속해온 막부(幕府)체제를 끝낸 일본은 메이지(明治)유신을 단행해 문호를 개방하고 서구문물을 받아들였고, 동시에 서구제국주의 열강들처럼 식민지 확보를 위한 대륙침략 야욕을 키워나갔다. 특히 일본은 섬나라라는 특성에 따른 대륙진출을 위한 교두보 확보, 막부체제 붕괴로 잉여인력이 된 무사(武士) 즉 사무라이 집단의 불만을 잠재우기 위한 정한론(征韓論)이 개혁파들 사이에서 국가적 과제로 떠오른다.

이 연장선상에서 일본은 담수 공급을 명분으로 강화도에 함대를 파견해 개국(開國)을 강요했다. 일본의 강압과 국내적으로는 개화파 세력의 주장에 따라 1876년 2월27일 조선은 외국과는 최초로 일본과 이른바 강화도 조약(조일수호조규)을 체결하고 문호를 개방했다.

총 12개조로 구성된 강화도 조약은 우리가 외국과 맺은 최초의 근대적인 조약이었지만 일본에 유리한 불평등 조약으로 일본의 조선 병탄(倂呑)의 서곡이었다.

조약 첫 항에, 조선은 일본과 동등한 권리를 가진 자주 국가임을 선언했는데, 이는 청나라의 종주권을 부정, 조선에 대한 청의 영향력을 배제하기 위한 것이었다. 부산 외에 인천과 원산을 개항한다는 제4조에는 통상 교역의 목적을 넘어 정치 군사적 거점을 마련하려는 일본 측의 의도가 숨겨져 있다. 이에 따라 조선 정부는 원산과 인천을 차례로 개항했다. 제7조는 해안 측량권, 제10조는 치외 법권(영사 재판권)을 규정하고 있다.

조선은 강화도조약에 이어 일련의 개화정책을 시행했다. 먼저 개화사상가 박규수(朴珪壽)를 우의정에 등용하고, 대원군 집권 당시 쇄국정책을 담당했던 동래부사 정현덕(鄭顯德)과 부산훈도 안동준(安東晙), 경상도관찰사 김세호(金世鎬)를 차례로 파면·유배했다. 개화를 위해서 통리기무아문을 설치하고, 삼군부(三軍府)를 폐지했으며, 신사유람단과 영선사를 일본과 청에 파견하여 신식무기·공업 등을 학습하도록 하는 정책을 시행했다.

〈조선책략〉의 연미론(聯美論)이 유포되자 1881년 김윤식(金允植)이 영선사로 청에 갈 때 밀명을 내려 청에 한·미수교를 주선해 줄 것을 요청했고, 또한 개화승 이동인(李東仁)을 일본에 보내어 주일청국공사 하여장(何如璋)에게 한·미수교 주선을 요청하기도 했다.

햔편 당대 최고 막후 실력자였던 명성황후는 1882년(고종 19) 임오군란이 일어나자 장호원에 있는 민응식(閔應植)의 집에 피신하여 고종과 비밀리에 연락하는 한편, 청에 군대를 요청하여 임오군란 후 잠시 재집권했던 대원군을 청나라로 납치하게 한 뒤 정국을 다시 장악했다.

 

■ <조선책략>의 허와 실

 

강화도 조약 이후 민씨 정권이 일본에 파견한 김홍집(金弘集)은 1880년 5월 28일(양력 7월 5일) 제2차 수신사로 일본에 갔다가 청나라 주일공사관 참찬관(參贊官) 황준헌이 지은 <사의조선책략(私擬朝鮮策略)>을 가져와 고종에게 복명한다.

이 <조선책략(朝鮮策略)> 내용은 저자 황준헌의 사견이 아닌, 청나라 정부 당국자들의 의중을 담고 있어 조선외교에 대한 가이드라인이기 보다는 청나라의 대 러시아 정략(政略)이었다. 당시 청나라 이홍장(李鴻章)이 배후에서 조선에 대한 특정국가의 독점을 막고 종주권을 지속적으로 유지하기 위해 미국을 비롯한 유럽 제국과의 조약 체결을 주선한 것도 같은 맥락으로 보인다.

<조선책략>에서 ‘조선이 당면한 가장 급한 문제는 러시아 침략을 막고 서방이 채택하고 있는 세력균형정책 즉 세균전략(勢均戰略)을 취해야 하는 것’이라고 밝히고 있다. 구체적으로, 친중국(親中國, 청나라와는 친하고), 결일본(結日本, 일본과는 맺고), 연미국(聯美國, 미국과는 이어져야) 정책을 택해야 한다는 것이다. 요약하면 러시아를 방어(防俄)하고, 중국, 일본, 미국과 긴밀한 유대를 유지해야 한다는 내용이다.

러시아가 이리처럼 탐욕스럽게 유럽에서 아시아까지 정벌에 힘써온 지 300여년 만에 드디어 조선까지 탐낸다면서, 러시아 방어에 방점을 찍은 조선의 외교정책 방향을 제시한 것이다.

겉으로는 조선의 자강론(自强論)을 통한 외교방략이지만 청나라 이훙장의 부하였던 황준헌의 전략구상에는 결국 강력한 러시아 배제를 통한, 조선에 대한 청나라의 종주권 확보를 유지하려는 노림수가 규지(窺知)된다.

 

<조선책략>에서 황준헌은 친중국(親中國)해야 하는 이유로, 중국이 물질이나 형국에서 러시아를 능가하고, 조선은 1천여 년 동안 중국의 번방(藩邦)으로 지내왔기 때문에 양국이 더욱 우호를 증대한다면 러시아가 중국이 무서워서도 감히 조선을 넘보지 못한다는 것이다.

결일본(結日本)해야 하는 이유는 일본이 중국 다음으로 조선과 가장 가까운 나라로 오랜 세월 통교해온 국가로 조선과 일본 중 어느 한쪽이 땅을 잃으면 서로 온전하게 유지하지 못하는 보거상의(輔車相依) 형세이기 때문에 서로 결합해야 한다는 것이다.

연미국(聯美國)에 대해서는 미국이 비록 조선과는 멀리 떨어져 있지만 남의 토지나 인민을 탐내지 않고, 남의 나라 정사에도 간여하지 않는 민주국가로 약소국을 돕고자 하니 미국을 끌어들여 우방으로 해두면 화를 면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같은 외교정책은 서구 침략으로부터 무사할 때 공평한 조약을 맺는 것이 이득이 되며, 중동(中東) 나라들처럼 위세에 눌려 조약을 맺게 되면 자주권과 이익을 탈취 당하게 되니 서둘러야 된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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