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해양세력과 대륙세력의 세불양립(勢不兩立)

 

19세기 영국은 1802년 인도양 스리랑카(실론) 정복을 시작으로 1815년 워털루 전쟁으로 나폴레옹의 프랑스가 패퇴(敗退)한 뒤 유럽의 강대국으로 등장했다. 지중해 한 가운데 위치한 말타 섬과 지중해에서 대서양으로 나가는 출구인 지브롤터 해협을 확보했다.

이어 수에즈 운하와 싱가포르(1819), 말레이시아의 주도인 말라카 해협(1824), 버마(1853), 인도(1858)를 차례로 장악했다.

1858년부터 인도를 직접 통치한 영국은 인도 특산품인 목면으로 맨체스터 방직공업이 호황을 누리면서 세계 최고의 부자 나라가 되었다. 이때 축적된 경제력을 바탕으로 패권국으로 부상한 영국에 맞서, 동유럽에서 태평양에 이르는 거대한 영토를 아우르는 제국을 건설한 러시아가가 부상한다.

이때 거대한 영토를 지닌 러시아가 부동항(不凍港)을 확보하기 위해 유럽대륙과 아시아에서 남하(南下) 정책을 추진하자 두 강대국은 세불양립(勢不兩立)으로 세계 도처에서 대결이 불가피하게 된다.

 

해양국가 영국에 맞선 대륙국가 러시아의 부동항 확보 전략의 첫째 목표는 크림반도가 있는 흑해였다. 그리스 정교를 보호한다는 명분으로 러시아가 흑해 남쪽의 오스만 터키를 침략하자 영국과 프랑스 등 연합국은 오스만 터키를 지원하고 나섰다. 이 전쟁이 바로 나이팅게일이 크게 활약한 것으로 널리 알려진 크림전쟁(Crimean War,1853∼1856)이다. 이 전쟁에서 러시아는 대패했다.

크림 전쟁 패배로 흑해를 통한 남하정책이 좌절되자 러시아는 인도 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중앙아시아의 이슬람 왕국들과 토후국을 흡수하면서 인도를 향해 남하를 시도한다. 이때 아프가니스탄을 보호령으로 삼고 있던 영국은 러시아가 페르시아와 아프가니스탄을 거쳐 아라비아해 진출을 시도하자 다시 방어에 나선다.

지정학적으로 인도와 러시아 사이에 놓여 있던 아프가니스탄은, 마치 20세기 초 조선이 청-일전쟁, 러-일전쟁 때 두 세력의 전쟁터가 됐던 것처럼 두 강대국 세력 간의 각축장으로 변했다.

 

러시아는 1885년 3월29일 밤, 영국의 지원을 받는 아프가니스탄 군을 공격해 국경지대 북부 조그만 오아시스 마을 판데(Panjdeh)를 기습 점령했다. 영국제 무기로 무장한 인도 세포이 병사 250명과 뱅갈 기마 창병 200명을 포함한 1,800여명 이상의 아프가니스탄군은 승리를 자신했으나 결과는 패배였다. 이 전투에서 아프가니스탄군은 900여명이 죽고 러시아군은 11명만 사망했다.

영국이 지원하는 아프가니스탄 군대가 러시아군에 의해 궤멸된 이 전투는, 당시 승승장구(乘勝長驅)하던 영국에 큰 충격을 주었다. 특히 아프가니스탄 패배는 1858년 영국령으로 편입한 인도에 대한 침략 위협으로 이어지면서 영국은 초긴장 상태에 놓인다. 당시 ‘해가 지지 않는 제국’으로 세계 패권국인 대영제국의 전성기라 체감 충격은 더 컸다.

영국은 즉각 러시아 상트페데부르크 주재 대사를 통해 러시아가 국경지역판데를 넘어 아프가니스탄으로 더 진격할 경우 즉각 선전포고를 할 것이라고 경고하고, 인도 서북부에 주둔하던 2만5천의 영국군은 출동 태세에 돌입한다. 이 전쟁으로 부동항을 향한 러시아의 남하 야욕이 분명해지자 영국 의회는 거액의 전시(戰時)예산을 서둘러 편성했다.

당시 아프가니스탄을 포함한 중앙아시아에서 벌어진 영국과 러시아의 패권 경쟁을 다룬『그레이트 게임(The Great Game)』의 저자 피터 홉커크(1930~2014)에 따르면, 러시아는 처음부터 양동전략(陽動戰略)을 구사했다.

러시아는 우선 영국을 철저히 속였다. 영국에‘영토 욕심이 없다’는 의사를 전했지만 실제론 판데 점령을 위한 병력을 몰래 파병하는 기책(奇策)으로 기만책을 구사했다. 러시아는 인도와 페르시아 일부를 점거해 인도양에 자신들이‘동양함대’를 키울 심산이었다. 이를 위해 러시아 군대는 부동항 확보를 위한 남하정책의 첫 관문인 아프가니스탄 국경 완충지대 판데를 점령하기 위해 온갖 계략을 동원한 것이다.

 

■ 19세기의 G2, 영국과 러시아의 대결

 

당시 영국은 인도를 대영제국의‘사활적 이익’이 걸린 식민지로 국력을 집중하고 있어 인도를 향하는 러시아의 남하정책을 방관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러시아가 6개월 전 북부의 전략적 요충지인 메르프를 교묘하게 합병한 상황이라 영국의 경계심은 극에 달했고, 즉각 대응하려 했으나 전력분산과 전비 마련 등 역부족이었다.

1885년 새해 벽두, 수단 카르툼에서 원주민 봉기를 진압하던 영국군 찰스 고든 장군이 참수(斬首) 당해 아프가니스탄까지 병력을 증파할 여유가 없었다. 영국은 러시아의 남진(南進)에 직접 상대하지는 못해도 영국식 군사훈련을 받은 아프가니스탄 군대가 러시아군을 상대할 수 있을 것이라고 믿었다.

아프가니스탄 군대는 판데에 러시아군이 나타났다는 정보가 전달됐으나 곧바로 대응하지 않았다. 그러자 전투를 촉발하기 위해 러시아 코마로프 장군은 아프가니스탄군 사령관에게‘겁쟁이’라는 모욕적인 편지를 보냈고, 그래도 반응이 없자 병사들을 조롱하는 등 자존심을 건드리는 방법을 구사했다.

이 같은 러시아 계략(計略)에 자존심 강하고 다혈질인 아프가니스탄 병사들이 걸려들었다. 침착하지 못한 아프가니스탄 군 진영에서 몇 발의 총성이 우발적으로 발사되었고, 러시아군은 기다렸다는 듯이 대대적으로 응사했다. 곧바로 치열한 교전이 벌어졌고, 러시아군은 선제공격을 당했다는 명분을 내세워 이튿날 새벽까지 이어진 전투에서 맹공격, 일방적인 승리를 거뒀다.

『삼국지』에서 촉나라 수장 제갈량(諸葛亮, 181~234)이 위나라의 수장 사마의(司馬懿, 179~251)가 도무지 싸우려 하지 않자, 사마의 진영에 여성의 복장과 장신구로 야유를 보내 도발을 유도한 이른바 ‘인형계(人形計)’라는 계책을 구사한 것이다.

아프가니스탄군을 압도한 러시아군이 판데를 점령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영국은 혼란에 빠졌다. 런던 증시가 폭락하고 야당인 보수당은 자유당 내각의 나약한 대응을 질타하고 나섰다. 의회는 1,100만 파운드의 전시예산을 긴급 편성했다. 동시에 지구촌 전역은 즉각 긴장상태에 접어들었다.

 

여기까지는 19세기 패권국인 서구열강의 세력다툼으로 당시 극동아시아의 조선과는 특별한 관련이 없어 보인다. 그러나 ‘브라질에서의 나비 한 마리의 날개짓이 텍사스에서 돌풍을 일으킬 수도 있다’는 카오스이론의 나비효과처럼 불똥이 한반도 조선으로 튀었다. 영국과 러시아 사이의 판데 전투의 유탄이 엉뚱하게도 얼마 뒤 바로 조선 땅 거문도로 향하게 된다.

역시 동북아시아에서의 패권을 놓고 러시아와 겨루던 영국은, 극동(極東)아시아에서도 부동항을 물색하던 러시아의 남진에 예민하게 반응했다. 두 패권국의 국가전략의 접점(接點) 지대가 바로 한반도였다. 대륙세력과 해양세력 간의 세계사적 패권 다툼이, 약소국 아프가니스탄의 운명처럼 우리 땅 한반도에서 다시 재현된 것이다.

 

■ 유라시아에서 전략적 경쟁 - 그레이트 게임(The Great Game)

 

세계는 거대한 체스판이라는 즈비그뉴 브레진스키는 저서 <거대한 체스판>에서 세계를 지정학적(geopolitic)으로 바라보고 미국의 패권 유지 방법과 유라시아 관리를 위한 대외전략을 체스게임 하듯 전략을 세워야한다고 주장했다. 책의 제목처럼 세계가 하나의 체스판이라고 비유한다면, 각 말의 위치와 어디로 말이 어디로 움직일 것인가를 고려하는 것이 지정학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키신저와 함께 뛰어난 외교 전략가로 알려진 그는 카터 대통령(1977~1981년 재임)의 국가안보보좌관으로 닉슨-키신저의 데탕트 노선을 비판하고 동구권 내의 비판세력을 포용하는 정책을 추진했던 인물이다.

지정학적으로 한국의 전략적 중요성을 강조하고, 역동적 발전을 토대로 통일의 가능성이 점차 커질 것으로 전망한 그는 중국이 자신의 안보를 위한 장치로서 한반도의 분단을 선호할 것이라고 분석했다. 한국의 통일이 폭발적으로 이루어질 경우, 중국은 미국세력이 확장되지 않을 경우에 받아들일 수 있을 것으로 보았다.

특히 한국의 지정학적 중요성을 재인식하게 하는 브레진스키의 지적은 중국과 미국 간에 지역 주도권을 두고 충돌할 경우. 그 중간에서 지정학적으로 전략적 가치가 큰 한국은 독자적인 결정을 못하고 대륙세력이나 해양세력중 어느 한쪽의 선택이 불가피함을 깨닫게 한다.

고촉통 전 싱가포르 총리는 2016년 열린 '평화와 번영을 위한 제주포럼 2016' 개회식 기조연설에서 한반도의 지정학적 위기를 이렇게 지적했다.

 

"한국만이 갖는 독특한 지정학적 과제(적대적 북한 정권, 중국의 전략적·경제적 비중 증대 그리고 한·일 관계에 미치는 역사적 앙금)가 눈앞에 놓여있다. 한반도나 미·중 간 긴장이 고조된다면, 한국은 당사자가 아니라 할지라도 긴장관계에 휘말려들 수밖에 없다. 한국은 어떻게 그러한 상황을 피할 수 있을까? 미국의 안보 우산이 중요하긴 하지만, 오로지 그것에만 의지할 수 있을까? 이러한 질문은 현재와 미래 한국 지도자들이 생각해봐야 할 중요한 질문이다."

 

‘5대양 6대주 장악’이라는 국가 대전략을 갖고 세계경영에 나선 영국은 한반도의 작은 나라 조선의 거문도(巨文島)를 호시탐탐(虎視耽耽) 엿보고 있었다. 이 지역이 러시아 동양함대가 남태평양으로 진출하기 위한 전초(前哨)기지로 전략적 요충지였던 탓이다. 해양국가인 영국은 대륙국가인 러시아가 극동아시아에서 부동항을 확보하고 태평양으로 뻗어나갈 것을 우려했다.

당시 동남아시아 및 태평양 지역 곳곳에 수많은 식민지를 확보한 영국으로서는 태평양 진출을 국가발전 전략목표로 추진하고 있는 러시아의 남하를 어떻게든 막아야 하는 전략적 선택이 불가피했다. 이 같은 국제정치 상황에서 러시아가 조선과 수교한 뒤 왕비 등 조선의 주도세력이 러시아와 급속히 가까워지고 있다는 정보가 알려지자 영국으로서는 방관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1813년의 러시아-페르시아 조약부터 시작해 1907년의 페테르부르크 ‘영·러 협상’까지 거의 100년에 걸쳐 영국과 러시아가 유라시아 전역에서 패권을 놓고 승부를 겨룬 전략적 경쟁을 일컫는 이른바 ‘그레이트 게임(The Great Game)’이 영국의 거문도 점령으로 동북아에서도 시작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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