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행이론(平行理論)으로 살펴본

거문도(巨文島)사건과 사드(THAAD)

 

박종렬 (가천대 신문방송학과 교수/가천CEO아카데미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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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장 ■ 거대한 체스판 위의 그레이트 게임

 

‘평행이론’의 재현인가

21세기 한반도, 싸드문제로 미·중 각축장

해양세력과 대륙세력, 세불양립(勢不兩立)

19세기의 G2, 영국과 러시아의 대결

유라시아에서 전략적 경쟁 -그레이트 게임

 

2장 ■ 망국(亡國)의 전조(前兆), 거문도 점거

 

사양(斜陽)왕조 조선의 내우외환(內憂外患)

<조선책략>의 허와 실

개국(開國)이냐, 쇄국(鎖國)이냐

일본제국의 설계자,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

대국(大國) 청나라의 처참한 몰락

러시아의 등장과 인아거청책(引俄拒淸策)

망국(亡國) 앞당긴 내부분열과 비밀외교

한반도에서의 맞붙은 러시아와 영국

 

3장 ■ 사드 게임, 제2의‘거문도 사건’26

 

왜 거문도(巨門島)인가

거문도 사건, 동북아판‘그레이트 게임’

고래 싸움터의 새우, 약소국의 비애(悲哀)

1885년 거문도 사건, 2017년 북핵(北核)사태

‘투키디데스 함정(Thucydides Trap)’

‘연작처당(燕雀處堂)’의 교훈

1장. 세계는 거대한 체스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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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는 영원히 되풀이 된다.” - 투키디데스

역사는 영원히 반복되는가?

오늘날 북한 핵문제를 둘러싸고 4대 강대국인 열강들 사이에서 펼쳐지는 복잡 미묘한 국제정치에 당사자인 우리나라는 물론, 세계인들의 관심이 모아지고 있다. 한반도 문제는 동북아시아를 뛰어넘어“영원한 적도, 영원한 우방”도 없다는 국제정치 논리대로 세계 최대 강대국들의 가장 화급하고 주요한 세계사적 외교 현안으로 떠올랐다. 한반도의 이 같은 움직임은 마치 19세기 말엽, 1880년대 조선반도의 상황을 시차와 인물만 바꿔 그대로 옮겨온 듯하다.

100여 년 전인 19세기말, 지리멸렬(支離滅裂)하던 우리 민족 앞에 놓인 현실은 참담했다. 당시 세계사를 주도해 오던 서구열강들은 세계지도를 펼쳐놓고 미개(未開)한 약소국 쟁탈전에 나섰다. 더 넓은 영토와 부를 확보하기 위한 이른바 제국주의 시대가 치열하게 전개되던 시기, 조선은 열강의 먹잇감이 되어 망국(亡國)의 나락으로 떨어지고 말았다.

산업화한 서구 열강의 서세동점과 이에 편승한 일본의 부상이라는 국제적 현상은 동북아시아의 작은 나라이자 폐쇄적이고 쇠락해가고 있던 봉건왕조 조선으로선 놀랍고 두려운 충격이었을 것이다. 대외적으론 거센 제국주의 격랑이 몰아치는 망망대해(茫茫大海)에서 일엽편주(一葉片舟)가 되어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밖에 없었다. 내부적으론 침몰해 가는 배안에서 개국파(開國派)와 쇄국파(鎖國派)가 끊임없이 맞서 국론은 크게 분열되었다. 기득권을 놓지 않으려는 수구파와 열정만 넘친 개화파 사이에 치열한 권력투쟁은 붕당(朋黨)의 파벌싸움으로 치달았다. 부패한 관료들의 가렴주구(苛斂誅求)로 민생은 도탄에 빠지고, 국가경영 역량이 부족했던 용렬한 암군(暗君)을 둘러싼 시아버지 흥선 대원군과 며느리 명성황후의 죽기살기식 살벌한 궁중암투는 왕조의 멸망을 재촉했다.

 

■ ‘평행이론’의 재현인가

 

이른바 평행이론(平行理論)처럼 19세기 말 조선왕조가 당면했던 바로 그 형국이 100여년이란 시차(時差)를 두고, 21세기 초 한반도에서 형식만 다를 뿐 원형(原型)이 그대로 재현되고 있는 현실에 모골이 송연해질 따름이다. 조선 말기 서세동점의 격랑 속에서 일본이 탈아입구(脫亞入歐)를 내세우며 급속하게 근대국가화를 추진하면서 한반도를 둘러싸고 청나라와 조선은 이 경쟁에서 탈락하면서 패망의 길을 걷게 된다. 이 같은 상황을“동아시아 근현대사에 나타난‘시간과의 경쟁’이 상호간의 이해와 공존을 가로막았다”(故 민두기 박사)는 지적은 오늘날 북핵의 실전배치 시간문제를 두고 또 다시‘시간과의 치열한 싸움’이 벌어지고 있는 동북아 정세에서 재현되고 있다.‘역사는 영원히 반복된다.’는 투키디데스의 경구를 음미케 한다.

 

첫째, 대한민국의 사드(THAAD:고고도미사일 방어체계) 배치에 국가의 명운을 걸고 반발하는 중국, 아관파천을 연상시키는 러시아의 은근한 개입, 가스라 태프트 밀약을 떠올리게 하는 미국과 일본의 유착(癒着), 4강에 줄을 서야하는 진퇴양난(進退兩難)에 빠진 대한민국의 상황 등 100여년 전 한반도 주변상황과 흡사한 데자뷔 현상을 보이고 있다.

둘째, 19세기말 청나라와 러시아, 일본의 첨예한 대립과 동북아시아 패권경쟁은 한반도가 전쟁터가 되어 청ㆍ일전쟁, 러ㆍ일전쟁을 치르고야 정리됐다. 1885년의 영국의 일방적인 거문도 점령을 둘러싼 당시 열강들의 패권다툼은 오늘날 UN안보리 상임이사국들인 그들의 국가전략과 너무도 유사하다. 북핵문제 처리를 놓고 새롭게 전개될 한반도의 지정학적 변화에 대해 미·중·러·일 4강은 대륙세력과 해양세력으로 편을 가른 각국의 국가전략에 따른 패권장악을 놓고 치열한 전략적 외교전을 펼치고 있다.

셋째, 거문도 사건 당시 조선 국론이 개국-쇄국파로 나뉘어 갑신정변처럼 생사를 건 심각한 내홍(內訌)을 겪었던 것처럼 최근 싸드 배치를 놓고 보수와 진보 진영이 심리적 내전(內戰) 상태에 빠져있다.

 

과거 제국주의 시대의 국가전략이 패권확보를 위해 더 넓은 영토를 확보하기 위한 무력침공을 수단으로 삼았다면 오늘날 그 전략이 경제전쟁 양상으로 바뀌었을 뿐, 자국의 이익 극대화를 추구한다는 국가전략의 근본적 골간은 변함없이 지속되고 있다. ‘땅뺏기 싸움’이라는 국제정치 게임은‘힘의 논리’가 지배하는 ‘정글 법칙’이 적용되는 철저한 약육강식(弱肉强食) 세계로 '무정부 상태'가 지속되고 있다. 오늘날 한반도에도 시차를 두고 반복되는 국제정치에서 평행이론(平行理論)이 그대로 적용되고 있는 것이다.

2017년 7월 12일 문재인 대통령이 G20 정상회담을 통해 다자 외교 무대에 데뷔한 뒤 열린 첫 국무회의에서 “한반도 문제 당사자인 한국에게는 합의를 이끌 힘이 없다.”며 토로한 것은 패권 국가들이 자국 국가이익을 위해 혈안이 돼 있던 조선 말기 상황과 크게 다르지 않은 국제정치의 현실을 반증하고 있다. 한·미 정상회담 이후 문 대통령이 “남북 관계는 한국이 운전석에 앉아 주도권을 잡는다는 데 트럼프 미국 대통령도 동의했다.”면서 '한국 운전석론'을 강조했다. 그러나 G20 정상회담을 통해 북한의 제재를 둘러싼 각국의 인식 차이와 팽팽한 기싸움을 접하면서 지정학적으로 한계가 있는 대한민국 대통령의 위상을 실감한 발언으로 들린다.

 

"북한의 탄도 미사일 도발에 대한 제재 방안을 두고 국제사회의 합의가 쉽지 않다는 현실을 엄중히 받아들여야 한다. 우리가 뼈저리게 느껴야 할 건 우리에게 가장 절박한 한반도 문제임에도 현실적으로 우리에게 해결할 힘이 없고 우리에게 합의를 이끌어낼 힘도 없다는 사실이다. G20 회의에서도 주요 의제인 자유무역주의와 기후변화 문제에 있어 G20은 합의하지 못했다. 각 나라가 국익을 앞세우는 외교를 하고 있다. 이제 우리도 국익을 중심에 두고 국익을 최우선으로 생각하며 국익을 관철할 수 있도록 우리 외교 역량을 키워야 한다고 절실하게 느꼈다." (헤럴드경제, 7월11일)

 

■ 21세기 한반도, 싸드문제로 미·중 각축장

 

한반도를 둘러싼 동북아에서 미-중 패권경쟁은 2017년 9월3일, 북한의 6차 핵실험으로 더욱 치열한 형태로 진행되고 있다. 이제 북핵은 ‘회피할 수 없는 압박’과‘해결책 없는 선택’을 남ㆍ북에 엄혹하게 강요하고 있다. 북핵 보유로 한반도에 과거와는 전혀 다른 새로운 패러다임, 즉‘게임의 룰’이 바뀌는 상황이 전개되고 있다.

‘비핵화 문제’는 이제 핵 협상 의제로서의 가치를 상실했다는 전문가들의 진단이다. ICBM(대륙간 핵탄도미사일) 능력을 보유했음을 천명한 북한의 벼랑끝 외교 전략은 북한과 미국 간에 서로 꼬리가 물린 뱀처럼‘너도 죽고 나도 죽자’는 한국인 특유의 ‘논개식‘ 싸움으로 전개되고 있다,

북한 노동당 기관지 노동신문이 지난 8월 6일 "미국이 핵 방망이와 제재 몽둥이를 휘두르며 우리 국가를 감히 건드리는 날에는 본토가 상상할 수 없는 불바다 속에 빠져들게 될 것"이라고 경고했다. 이어 북한은 지난 7일 관영 조선중앙통신 성명을 통해 “미국이 우리의 자주권과 생존권, 발전권을 말살하는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제재 결의를 끝끝내 조작해 낸 이상 우리는 이미 천명한 대로 단호한 정의의 행동으로 넘어갈 것”이라며“우리 국가와 인민을 상대로 저지르고 있는 미국의 극악한 범죄의 대가를 천백배로 결산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미국도 ‘불’을 든‘ ’말 폭탄’으로 독설(毒舌) 레토릭을 구사, 보통사람도 기피할 언어폭력과 위협적인 위하(威嚇)의 ‘말 전쟁’이 미국 북한 최고 지도자 사이에 계속되고 있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휴가 중이던 8월 8일(현지시간) 북한이 미국을 계속 위협하면 “지금까지 세계가 목격하지 못한‘화염과 분노’(fire and fury)에 직면할 것”이라며 김정은 노동당 위원장이 “정상적인 상태를 넘어 매우 위협적이다”라며 말했다. 히로시마 원폭 투하 직전 트루먼의 대일 압박과 같은 초강경 메시지로 북한에 경고했다.

트럼프 대통령은 김정은을 ‘자살 임무를 맡은 로켓맨’이라고 비난한데 이어 9월19일(현지시각) UN총회연설에서 북한의‘완전한 파괴(totally destroy)’를 선언했다. 김정은은 21일 “불장난을 즐기는 불망나니, 깡패임에 틀림없다”면서 “미국의 늙다리 미치광이(dotard) 반드시 불로 다스릴 것”이라는 사상 초유의 초강경발언을 쏟아냈다. 이에 트럼프는 자신의 트위터에서 김정은이 “명백한 미치광이(Mad man) 로켓맨, 전에 없던 방식으로 시험(test)당할 것”이라고 맞대응했다.

이른바 광인이론(狂人理論: Madman Theory)을 의식하는지 원색적인 미치광이 발언으로 이전투구(泥田鬪狗)식 설전(舌戰)을 벌이고 있다. 미국 언론에서 트럼프의‘미치광이 타령’에 ‘김정은과 진흙탕 싸움’을 자제하라는 비판과 우려의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

북ㆍ미간의 혼탁한 말 폭탄이 불을 뿜는 가운데 북한 핵위협의 신빙성은 한-미간 동맹와해를 목표로 설정한 한-미 이간책(離間策)을 시험하고 있다. 21세기 초반, 2017년 현재 대한민국은 주변 강대국 국제정치의‘피도 눈물도 없는’냉혹한 틀 안에서, 운신의 폭이 극도로 제한된 가운데 국가의 존망(存亡)이 걸린 위기를 맞았다. 우리의 전략적 선택에 따라 나라의 명운(命運)과 민족의 삶이 결정되는 국가적 위기상황으로 내몰리고 있는 것이다.

 

“오늘날 한국의 남북대립은 백강전투, 6·25전쟁 등과 같이 겉으로 보기에는 한반도의 통일전쟁이지만, 실상은 대륙과 해양세력 간의 세계사적인 패권 다툼이 역사의 공시성(共時性)을 실감시키는 숙명적 구도다.”

 

북핵을 둘러싸고 빚어진 한·미·일과 북·중·러의 대결구도는 과거보다 더 복잡다기(複雜多技)하게 얽혀있지만 그 본질은 대륙세력과 해양세력의 대결구도다. 미-소 패권국이 주도한 냉전체제가 소련의 해체로 붕괴된 뒤 세계를 미국이 일극(一極)으로 주도해왔다. 일극 중심으로 세계가 경영되면서 그동안 강대국 미국에 눌려있던 중국이 경제력과 국방력 등에서 대국굴기(大國屈起), 이른바 G2로 부상, 아시아의 맹주를 노리면서 미 - 중 갈등이 시작됐다.

1980년대 말, 냉전체제의 종식과 대외 시장개방과 함께 중국 덩샤오핑(鄧小平)의 대외정책의 기조였던 도광양회(韜光養晦:칼을 칼집에 넣어 빛을 감춰 밖으로 새지 않게 하면서 은밀하게 힘을 기른다), 즉‘자신의 재능을 밖으로 드러내지 않고 인내하면서 은밀히 힘을 기른’중국은, 2008년 세계 금융위기 이후 미국이 쇠퇴 기미를 보이자 마침내‘숨겨진 발톱’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시진핑(習近平) 체제의 중국은 개방이후 20여년 급성장한 경제력을 바탕으로 ‘중국몽(中國夢)’을 내세우며 과거 중화사상(中華思想)을 표방한 세계 중심지국(中心之國)으로 등장했다. 특히 시진핑으로 권력이 집중되면서‘제2의 모택동’을 꿈꾸는 이미지 메이킹이 필요해지면서 패권국으로 위상정립이 국가적 과제가 된 것이다.

중국이 활발한 자원외교 등으로 아프리카를 포함한 전 방위로 세력을 확장하며 패권국 야망을 드러내자 미국은 ‘아시아 재균형정책’으로 중국에 대한 견제에 나섰다. 이런 와중에 한국은, 북한 핵에 대응해 배치한 사드 문제를 놓고 해양세력인 미국과 대륙세력인 중국 사이에서 선택을 강요받는 진퇴양난(進退兩難)의 딜레마에 빠진 것이다.

북한의 핵무장이라는 파천황(破天荒)의 국가적 위기는 사실상 한국의 사활이 걸린 문제로 기존의 ‘안미경중(安美經中: 안보는 미국, 경제는 중국과 협력) 전략’으로는 당면한 위기를 타개할 수 없는 처지가 되었다.

한편 중국 정부는 북핵과 과련, '쌍중단'(雙中斷·북한 핵미사일 도발과 한미 연합군사훈련의 동시 중단)과 '쌍궤병행'(雙軌竝行·한반도 비핵화 프로세스와 북미 평화협정 협상)을 북핵 해결책으로 제안했다. 중국 한반도 전문가 자칭궈(賈慶國) 베이징대 국제관계학원 원장은 호주 '동아시아포럼'지(9월호)에 중국 정부가 한반도 전쟁 발발 가능성에 대비해 미국·한국과 협력해 한반도 위기 시 비상계획을 마련해야 한다는 기고문을 실었다.

홍콩 사우스차이나모닝포스트(SCMP)에 따르면 평소 중국 정부의 대북 정책에비판적인 시각을 드러내온 자 원장은 기고문에서 한반도에서 전쟁 발발 가능성에 대비 ▲ 북한 핵무기 처리 ▲ 대규모 난민 유입 대응 ▲ 북한 사회질서 회복 ▲ 북한 정권의 재편 등 4대 과제를 제시했다. 그는 "미국의 군사적 공격의 결과로 북한 김정은 정권이 붕괴하면 중국이나 미국은 핵확산을 방지하기 위해 북한의 핵무기를 어떻게 처리할지 준비해야 할 것"이라고 지적했다. 이어 중국 동북부 지역에 북한 난민을 수용할 안전지대를 설치하고, 한반도 통일을 수용할지에 대해 미국과 대화해야 한다고 제언했다.

 

2017년 오늘의 한반도 현실은, 마치 데자뷔처럼 130년 전 대륙세력이나 해양세력을 대표하는 강대국에 줄을 서야했던 조선 왕조가 처한 상황과 비슷하다. 19세기 말 제국주의 팽창정책을 펼치던 유럽의 강대국 영국과 러시아가 동북아시아‘은둔의 나라’ 조선의 거문도를 놓고 벌였던 패권 경쟁과 유사한 상황이 현재 진행 중이다. 당시의 영국 대신 이번에는 미국이, 러시아 대신 중국이 그 역할을 맡아 파워게임을 한반도에서 벌이고 있는 것이다.

“역사에는 일정한 패턴이 있고, 그 패턴은 비슷한 상황이 닥치면 같은 형태로 반복된다”는, 그래서 ‘역사는 영원히 되풀이 된다’는 투키디데스의 잠언(箴言)이 실감나는 상황이다. 우리가 처한 현실을 살펴보니 ‘남에게는 희극이지만 나에게는 비극이다’는 말이 그대로 적용되는 대목이다.

 

■ 해양세력과 대륙세력의 세불양립(勢不兩立)

 

19세기 영국은 1802년 인도양 스리랑카(실론) 정복을 시작으로 1815년 워털루 전쟁으로 나폴레옹의 프랑스가 패퇴(敗退)한 뒤 유럽의 강대국으로 등장했다. 지중해 한 가운데 위치한 말타 섬과 지중해에서 대서양으로 나가는 출구인 지브롤터 해협을 확보했다.

이어 수에즈 운하와 싱가포르(1819), 말레이시아의 주도인 말라카 해협(1824), 버마(1853), 인도(1858)를 차례로 장악했다.

1858년부터 인도를 직접 통치한 영국은 인도 특산품인 목면으로 맨체스터 방직공업이 호황을 누리면서 세계 최고의 부자 나라가 되었다. 이때 축적된 경제력을 바탕으로 패권국으로 부상한 영국에 맞서, 동유럽에서 태평양에 이르는 거대한 영토를 아우르는 제국을 건설한 러시아가가 부상한다.

이때 거대한 영토를 지닌 러시아가 부동항(不凍港)을 확보하기 위해 유럽대륙과 아시아에서 남하(南下) 정책을 추진하자 두 강대국은 세불양립(勢不兩立)으로 세계 도처에서 대결이 불가피하게 된다.

 

해양국가 영국에 맞선 대륙국가 러시아의 부동항 확보 전략의 첫째 목표는 크림반도가 있는 흑해였다. 그리스 정교를 보호한다는 명분으로 러시아가 흑해 남쪽의 오스만 터키를 침략하자 영국과 프랑스 등 연합국은 오스만 터키를 지원하고 나섰다. 이 전쟁이 바로 나이팅게일이 크게 활약한 것으로 널리 알려진 크림전쟁(Crimean War,1853∼1856)이다. 이 전쟁에서 러시아는 대패했다.

크림 전쟁 패배로 흑해를 통한 남하정책이 좌절되자 러시아는 인도 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중앙아시아의 이슬람 왕국들과 토후국을 흡수하면서 인도를 향해 남하를 시도한다. 이때 아프가니스탄을 보호령으로 삼고 있던 영국은 러시아가 페르시아와 아프가니스탄을 거쳐 아라비아해 진출을 시도하자 다시 방어에 나선다.

지정학적으로 인도와 러시아 사이에 놓여 있던 아프가니스탄은, 마치 20세기 초 조선이 청-일전쟁, 러-일전쟁 때 두 세력의 전쟁터가 됐던 것처럼 두 강대국 세력 간의 각축장으로 변했다.

 

러시아는 1885년 3월29일 밤, 영국의 지원을 받는 아프가니스탄 군을 공격해 국경지대 북부 조그만 오아시스 마을 판데(Panjdeh)를 기습 점령했다. 영국제 무기로 무장한 인도 세포이 병사 250명과 뱅갈 기마 창병 200명을 포함한 1,800여명 이상의 아프가니스탄군은 승리를 자신했으나 결과는 패배였다. 이 전투에서 아프가니스탄군은 900여명이 죽고 러시아군은 11명만 사망했다.

영국이 지원하는 아프가니스탄 군대가 러시아군에 의해 궤멸된 이 전투는, 당시 승승장구(乘勝長驅)하던 영국에 큰 충격을 주었다. 특히 아프가니스탄 패배는 1858년 영국령으로 편입한 인도에 대한 침략 위협으로 이어지면서 영국은 초긴장 상태에 놓인다. 당시 ‘해가 지지 않는 제국’으로 세계 패권국인 대영제국의 전성기라 체감 충격은 더 컸다.

영국은 즉각 러시아 상트페데부르크 주재 대사를 통해 러시아가 국경지역판데를 넘어 아프가니스탄으로 더 진격할 경우 즉각 선전포고를 할 것이라고 경고하고, 인도 서북부에 주둔하던 2만5천의 영국군은 출동 태세에 돌입한다. 이 전쟁으로 부동항을 향한 러시아의 남하 야욕이 분명해지자 영국 의회는 거액의 전시(戰時)예산을 서둘러 편성했다.

당시 아프가니스탄을 포함한 중앙아시아에서 벌어진 영국과 러시아의 패권 경쟁을 다룬『그레이트 게임(The Great Game)』의 저자 피터 홉커크(1930~2014)에 따르면, 러시아는 처음부터 양동전략(陽動戰略)을 구사했다.

러시아는 우선 영국을 철저히 속였다. 영국에‘영토 욕심이 없다’는 의사를 전했지만 실제론 판데 점령을 위한 병력을 몰래 파병하는 기책(奇策)으로 기만책을 구사했다. 러시아는 인도와 페르시아 일부를 점거해 인도양에 자신들이‘동양함대’를 키울 심산이었다. 이를 위해 러시아 군대는 부동항 확보를 위한 남하정책의 첫 관문인 아프가니스탄 국경 완충지대 판데를 점령하기 위해 온갖 계략을 동원한 것이다.

 

■ 19세기의 G2, 영국과 러시아의 대결

 

당시 영국은 인도를 대영제국의‘사활적 이익’이 걸린 식민지로 국력을 집중하고 있어 인도를 향하는 러시아의 남하정책을 방관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러시아가 6개월 전 북부의 전략적 요충지인 메르프를 교묘하게 합병한 상황이라 영국의 경계심은 극에 달했고, 즉각 대응하려 했으나 전력분산과 전비 마련 등 역부족이었다.

1885년 새해 벽두, 수단 카르툼에서 원주민 봉기를 진압하던 영국군 찰스 고든 장군이 참수(斬首) 당해 아프가니스탄까지 병력을 증파할 여유가 없었다. 영국은 러시아의 남진(南進)에 직접 상대하지는 못해도 영국식 군사훈련을 받은 아프가니스탄 군대가 러시아군을 상대할 수 있을 것이라고 믿었다.

아프가니스탄 군대는 판데에 러시아군이 나타났다는 정보가 전달됐으나 곧바로 대응하지 않았다. 그러자 전투를 촉발하기 위해 러시아 코마로프 장군은 아프가니스탄군 사령관에게‘겁쟁이’라는 모욕적인 편지를 보냈고, 그래도 반응이 없자 병사들을 조롱하는 등 자존심을 건드리는 방법을 구사했다.

이 같은 러시아 계략(計略)에 자존심 강하고 다혈질인 아프가니스탄 병사들이 걸려들었다. 침착하지 못한 아프가니스탄 군 진영에서 몇 발의 총성이 우발적으로 발사되었고, 러시아군은 기다렸다는 듯이 대대적으로 응사했다. 곧바로 치열한 교전이 벌어졌고, 러시아군은 선제공격을 당했다는 명분을 내세워 이튿날 새벽까지 이어진 전투에서 맹공격, 일방적인 승리를 거뒀다.

『삼국지』에서 촉나라 수장 제갈량(諸葛亮, 181~234)이 위나라의 수장 사마의(司馬懿, 179~251)가 도무지 싸우려 하지 않자, 사마의 진영에 여성의 복장과 장신구로 야유를 보내 도발을 유도한 이른바 ‘인형계(人形計)’라는 계책을 구사한 것이다.

아프가니스탄군을 압도한 러시아군이 판데를 점령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영국은 혼란에 빠졌다. 런던 증시가 폭락하고 야당인 보수당은 자유당 내각의 나약한 대응을 질타하고 나섰다. 의회는 1,100만 파운드의 전시예산을 긴급 편성했다. 동시에 지구촌 전역은 즉각 긴장상태에 접어들었다.

 

여기까지는 19세기 패권국인 서구열강의 세력다툼으로 당시 극동아시아의 조선과는 특별한 관련이 없어 보인다. 그러나 ‘브라질에서의 나비 한 마리의 날개짓이 텍사스에서 돌풍을 일으킬 수도 있다’는 카오스이론의 나비효과처럼 불똥이 한반도 조선으로 튀었다. 영국과 러시아 사이의 판데 전투의 유탄이 엉뚱하게도 얼마 뒤 바로 조선 땅 거문도로 향하게 된다.

역시 동북아시아에서의 패권을 놓고 러시아와 겨루던 영국은, 극동(極東)아시아에서도 부동항을 물색하던 러시아의 남진에 예민하게 반응했다. 두 패권국의 국가전략의 접점(接點) 지대가 바로 한반도였다. 대륙세력과 해양세력 간의 세계사적 패권 다툼이, 약소국 아프가니스탄의 운명처럼 우리 땅 한반도에서 다시 재현된 것이다.

 

■ 유라시아에서 전략적 경쟁 - 그레이트 게임(The Great Game)

 

세계는 거대한 체스판이라는 즈비그뉴 브레진스키는 저서 <거대한 체스판>에서 세계를 지정학적(geopolitic)으로 바라보고 미국의 패권 유지 방법과 유라시아 관리를 위한 대외전략을 체스게임 하듯 전략을 세워야한다고 주장했다. 책의 제목처럼 세계가 하나의 체스판이라고 비유한다면, 각 말의 위치와 어디로 말이 어디로 움직일 것인가를 고려하는 것이 지정학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키신저와 함께 뛰어난 외교 전략가로 알려진 그는 카터 대통령(1977~1981년 재임)의 국가안보보좌관으로 닉슨-키신저의 데탕트 노선을 비판하고 동구권 내의 비판세력을 포용하는 정책을 추진했던 인물이다.

지정학적으로 한국의 전략적 중요성을 강조하고, 역동적 발전을 토대로 통일의 가능성이 점차 커질 것으로 전망한 그는 중국이 자신의 안보를 위한 장치로서 한반도의 분단을 선호할 것이라고 분석했다. 한국의 통일이 폭발적으로 이루어질 경우, 중국은 미국세력이 확장되지 않을 경우에 받아들일 수 있을 것으로 보았다.

특히 한국의 지정학적 중요성을 재인식하게 하는 브레진스키의 지적은 중국과 미국 간에 지역 주도권을 두고 충돌할 경우. 그 중간에서 지정학적으로 전략적 가치가 큰 한국은 독자적인 결정을 못하고 대륙세력이나 해양세력중 어느 한쪽의 선택이 불가피함을 깨닫게 한다.

고촉통 전 싱가포르 총리는 2016년 열린 '평화와 번영을 위한 제주포럼 2016' 개회식 기조연설에서 한반도의 지정학적 위기를 이렇게 지적했다.

 

"한국만이 갖는 독특한 지정학적 과제(적대적 북한 정권, 중국의 전략적·경제적 비중 증대 그리고 한·일 관계에 미치는 역사적 앙금)가 눈앞에 놓여있다. 한반도나 미·중 간 긴장이 고조된다면, 한국은 당사자가 아니라 할지라도 긴장관계에 휘말려들 수밖에 없다. 한국은 어떻게 그러한 상황을 피할 수 있을까? 미국의 안보 우산이 중요하긴 하지만, 오로지 그것에만 의지할 수 있을까? 이러한 질문은 현재와 미래 한국 지도자들이 생각해봐야 할 중요한 질문이다."

 

‘5대양 6대주 장악’이라는 국가 대전략을 갖고 세계경영에 나선 영국은 한반도의 작은 나라 조선의 거문도(巨文島)를 호시탐탐(虎視耽耽) 엿보고 있었다. 이 지역이 러시아 동양함대가 남태평양으로 진출하기 위한 전초(前哨)기지로 전략적 요충지였던 탓이다. 해양국가인 영국은 대륙국가인 러시아가 극동아시아에서 부동항을 확보하고 태평양으로 뻗어나갈 것을 우려했다.

당시 동남아시아 및 태평양 지역 곳곳에 수많은 식민지를 확보한 영국으로서는 태평양 진출을 국가발전 전략목표로 추진하고 있는 러시아의 남하를 어떻게든 막아야 하는 전략적 선택이 불가피했다. 이 같은 국제정치 상황에서 러시아가 조선과 수교한 뒤 왕비 등 조선의 주도세력이 러시아와 급속히 가까워지고 있다는 정보가 알려지자 영국으로서는 방관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1813년의 러시아-페르시아 조약부터 시작해 1907년의 페테르부르크 ‘영·러 협상’까지 거의 100년에 걸쳐 영국과 러시아가 유라시아 전역에서 패권을 놓고 승부를 겨룬 전략적 경쟁을 일컫는 이른바 ‘그레이트 게임(The Great Game)’이 영국의 거문도 점령으로 동북아에서도 시작된 것이다.

2장. 망국(亡國)의 전조(前兆), 거문도 무단 점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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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세기 말엽, 당시 조선반도엔 미증유(未曾有)의 충격이 거대한 해일처럼 밀려들었다. 조선왕조는 급격히 변화하는 국제정세에 제대로 대처하지 못하는 상황이었다. 국내적으로 500여년 지속된 왕조체제의 말기적 증상인 ‘제도 피로현상’으로 쇠락해가고 있었다.

국권을 상실한 왕으로 조선왕조의 실질적인 마지막 왕이었던 고종이 친정(親政)을 선포하면서 당시 10년 남짓 정권을 장악했던 흥선 대원군이 화무십일홍(花無十日紅)으로 1873년 물러났고, 외척인 민씨 일족이 정권을 잡게 되었다. 일찍이 경험하지 못한 격동의 한복판으로 조선왕조는 내몰리고 있었다.

 

■ 사양(斜陽)왕조 조선의 내우외환(內憂外患)

 

명성황후는 남편인 고종의 묵인 하에 시아버지인 흥선 대원군과의 권력투쟁 끝에 대원군을 실각시킨 뒤 민씨 척족을 앞세워 정권을 장악했다. 민씨 측은 대원군이 적폐로 간주해 대대적으로 폐쇄한 서원(書院)의 부분적 복구로 유생(儒生) 세력 포섭, 조세감면 등을 통해 흐트러진 민심을 얻고자 노력했다. 밖으로는 흥선 대원군이 표방해온 척왜척양(斥倭斥洋)의 쇄국정책을 부분적으로 완화하여 청나라와 전통적인 외교 관계를 유지했고, 우리보다 앞서 근대화 과정을 밟기 시작한 일본과도 유화적인 정책을 취했다.

일본도 그 무렵 사회적 정치적 격변을 거듭했다. 200여년 지속해온 막부(幕府)체제를 끝낸 일본은 메이지(明治)유신을 단행해 문호를 개방하고 서구문물을 받아들였고, 동시에 서구제국주의 열강들처럼 식민지 확보를 위한 대륙침략 야욕을 키워나갔다. 특히 일본은 섬나라라는 특성에 따른 대륙진출을 위한 교두보 확보, 막부체제 붕괴로 잉여인력이 된 무사(武士) 즉 사무라이 집단의 불만을 잠재우기 위한 정한론(征韓論)이 개혁파들 사이에서 국가적 과제로 떠오른다.

이 연장선상에서 일본은 담수 공급을 명분으로 강화도에 함대를 파견해 개국(開國)을 강요했다. 일본의 강압과 국내적으로는 개화파 세력의 주장에 따라 1876년 2월27일 조선은 외국과는 최초로 일본과 이른바 강화도 조약(조일수호조규)을 체결하고 문호를 개방했다.

총 12개조로 구성된 강화도 조약은 우리가 외국과 맺은 최초의 근대적인 조약이었지만 일본에 유리한 불평등 조약으로 일본의 조선 병탄(倂呑)의 서곡이었다.

조약 첫 항에, 조선은 일본과 동등한 권리를 가진 자주 국가임을 선언했는데, 이는 청나라의 종주권을 부정, 조선에 대한 청의 영향력을 배제하기 위한 것이었다. 부산 외에 인천과 원산을 개항한다는 제4조에는 통상 교역의 목적을 넘어 정치 군사적 거점을 마련하려는 일본 측의 의도가 숨겨져 있다. 이에 따라 조선 정부는 원산과 인천을 차례로 개항했다. 제7조는 해안 측량권, 제10조는 치외 법권(영사 재판권)을 규정하고 있다.

조선은 강화도조약에 이어 일련의 개화정책을 시행했다. 먼저 개화사상가 박규수(朴珪壽)를 우의정에 등용하고, 대원군 집권 당시 쇄국정책을 담당했던 동래부사 정현덕(鄭顯德)과 부산훈도 안동준(安東晙), 경상도관찰사 김세호(金世鎬)를 차례로 파면·유배했다. 개화를 위해서 통리기무아문을 설치하고, 삼군부(三軍府)를 폐지했으며, 신사유람단과 영선사를 일본과 청에 파견하여 신식무기·공업 등을 학습하도록 하는 정책을 시행했다.

〈조선책략〉의 연미론(聯美論)이 유포되자 1881년 김윤식(金允植)이 영선사로 청에 갈 때 밀명을 내려 청에 한·미수교를 주선해 줄 것을 요청했고, 또한 개화승 이동인(李東仁)을 일본에 보내어 주일청국공사 하여장(何如璋)에게 한·미수교 주선을 요청하기도 했다.

햔편 당대 최고 막후 실력자였던 명성황후는 1882년(고종 19) 임오군란이 일어나자 장호원에 있는 민응식(閔應植)의 집에 피신하여 고종과 비밀리에 연락하는 한편, 청에 군대를 요청하여 임오군란 후 잠시 재집권했던 대원군을 청나라로 납치하게 한 뒤 정국을 다시 장악했다.

 

■ <조선책략>의 허와 실

 

강화도 조약 이후 민씨 정권이 일본에 파견한 김홍집(金弘集)은 1880년 5월 28일(양력 7월 5일) 제2차 수신사로 일본에 갔다가 청나라 주일공사관 참찬관(參贊官) 황준헌이 지은 <사의조선책략(私擬朝鮮策略)>을 가져와 고종에게 복명한다.

이 <조선책략(朝鮮策略)> 내용은 저자 황준헌의 사견이 아닌, 청나라 정부 당국자들의 의중을 담고 있어 조선외교에 대한 가이드라인이기 보다는 청나라의 대 러시아 정략(政略)이었다. 당시 청나라 이홍장(李鴻章)이 배후에서 조선에 대한 특정국가의 독점을 막고 종주권을 지속적으로 유지하기 위해 미국을 비롯한 유럽 제국과의 조약 체결을 주선한 것도 같은 맥락으로 보인다.

<조선책략>에서 ‘조선이 당면한 가장 급한 문제는 러시아 침략을 막고 서방이 채택하고 있는 세력균형정책 즉 세균전략(勢均戰略)을 취해야 하는 것’이라고 밝히고 있다. 구체적으로, 친중국(親中國, 청나라와는 친하고), 결일본(結日本, 일본과는 맺고), 연미국(聯美國, 미국과는 이어져야) 정책을 택해야 한다는 것이다. 요약하면 러시아를 방어(防俄)하고, 중국, 일본, 미국과 긴밀한 유대를 유지해야 한다는 내용이다.

러시아가 이리처럼 탐욕스럽게 유럽에서 아시아까지 정벌에 힘써온 지 300여년 만에 드디어 조선까지 탐낸다면서, 러시아 방어에 방점을 찍은 조선의 외교정책 방향을 제시한 것이다.

겉으로는 조선의 자강론(自强論)을 통한 외교방략이지만 청나라 이훙장의 부하였던 황준헌의 전략구상에는 결국 강력한 러시아 배제를 통한, 조선에 대한 청나라의 종주권 확보를 유지하려는 노림수가 규지(窺知)된다.

 

<조선책략>에서 황준헌은 친중국(親中國)해야 하는 이유로, 중국이 물질이나 형국에서 러시아를 능가하고, 조선은 1천여 년 동안 중국의 번방(藩邦)으로 지내왔기 때문에 양국이 더욱 우호를 증대한다면 러시아가 중국이 무서워서도 감히 조선을 넘보지 못한다는 것이다.

결일본(結日本)해야 하는 이유는 일본이 중국 다음으로 조선과 가장 가까운 나라로 오랜 세월 통교해온 국가로 조선과 일본 중 어느 한쪽이 땅을 잃으면 서로 온전하게 유지하지 못하는 보거상의(輔車相依) 형세이기 때문에 서로 결합해야 한다는 것이다.

연미국(聯美國)에 대해서는 미국이 비록 조선과는 멀리 떨어져 있지만 남의 토지나 인민을 탐내지 않고, 남의 나라 정사에도 간여하지 않는 민주국가로 약소국을 돕고자 하니 미국을 끌어들여 우방으로 해두면 화를 면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같은 외교정책은 서구 침략으로부터 무사할 때 공평한 조약을 맺는 것이 이득이 되며, 중동(中東) 나라들처럼 위세에 눌려 조약을 맺게 되면 자주권과 이익을 탈취 당하게 되니 서둘러야 된다는 것이다.

 

■ 개국(開國)이냐, 쇄국(鎖國)이냐

 

<조선책략>이 유입된 후 조선 조야(朝野)에서는 외교방향에 대한 찬반 논의가 격렬하게 전개되었다. 개국(開國)과 쇄국(鎖國)이라는 국가정책에 대한 갑론을박이 벌어졌고, 논란은 개화파, 수구파로 나뉜 민씨 일파 등 정치집단의 정치적 명분과 이해가 맞물리면서 사생결단의 분란으로 치닫는다.

특히 양반 유생 등 당시 주도적인 지배세력들은, 조선의 개국은 외세·침략 세력과 유착하는 것이라며 위정척사(衛正斥邪)운동 으로 맞섰다.‘위정’은 정학(正學)인 성리학을 옹호하고‘척사’는 성리학 이외에 사악하다고 판단되는 천주교를 비롯한 모든 종교와 사상을 사문난적(斯文亂賊)으로 배격하는 것이다.

정부가 일본과 강화도 조약을 체결하려고 할 때 위정척사 운동이 일어나 전국적으로 번져나갔다. 최익현을 비롯한 유생들은 일본이 서양 오랑캐와 같다는 왜양일체론(倭洋一體論)을 주장하며 개항 반대 운동을 전개했다. 최익현은 이 사건으로 유배되었다. 정부가 미국과의 수교를 추진하려던 시기에도 위정척사 운동이 다시 일어났다.

1880년 11월7일 유원식(劉元植)의 척사상소를 비롯하여 1881년 2월 영남 지방유생들은 이만손(李晩孫)을 소두(疏頭)로 한 영남만인소(嶺南萬人疏) 등 재야에서 보수 유생(儒生) 중심으로 거국적인 위정척사운동이 일어나 서양 열강과의 수교 반대와 <조선책략>을 도입한 김홍집 처벌을 요구했다.

정부는 영남 만인소 사건의 주모자 이만손을 유배시키고 탄압에 나섰다. 이런 움직임은 1866년 병인양요를 계기로 시작됐다. 당시 이항로, 기정진 등 보수 성향의 유생집단은 서양의 무력 침략에 대항하여 척화주전론(斥和主戰論)을 주장하며 대원군의 쇄국정책을 지지하는 상소를 올렸다.

보수적인 양반 유생들의 위정척사 운동은 열강의 침략과 개항의 문제점을 제기하고 경각심을 높이는 데 큰 역할을 했지만, 성리학 사상에 따라 조선 왕조 전제주의 정치 체제와 양반 중심 봉건 사회를 옹호하는 한계를 지니고 있었다.

이렇듯 <조선책략>은 당시 고종을 비롯한 집권층에게는 큰 영향을 주었고, 1880년대 이후 정부가 주도적으로 개방정책 추진 및 서구문물을 수용하는 계기를 마련해주었다.

정부의 대외정책 흐름은 개국으로 방향을 틀었지만 서구열강의 식민지 쟁탈전이 벌어지던 서세동점(西勢東漸)이라는 국제정치의 거대한 격랑 속에서 조선의 국가 진로 문제는 대내외적으로 심각한 도전을 받게 된다.

 

■ 일본제국의 설계자, 이토 히로부미

 

1884년, 조선에서는 국민국가 건설을 지향한 김옥균 등 친일개화파 주도로 청나라에 2년째 억류돼 있던 흥선 대원군의 빠른 귀국과 조공(朝貢) 폐지 등을 내세운 갑신정변(甲申政變)이 일어났다.

내우외환은 더욱 심각해졌다. 개화파는 우정총국 개국 축하연에서 거사, 민씨 정권 요인 6명을 처단하고 창덕궁에 있던 고종을 경우궁으로 옮겨 일본군의 호위를 받도록 했으나 3일 만에 청나라 군대 진압으로 실패했다.

갑신정변 당시 개화파 세력이 내건 14개조 개혁 정강은, 청나라에 억류된 대원군 귀환 요구 등 정치적으로는 청에 대한 사대 외교 폐지, 내각 중심 정치 시행 등 입헌 군주제적 정치체제 도입을 기도한 것이었다. 경제적으로는 지조법 개혁, 재정기관 일원화로 국가재정 충실화를 꾀하고. 사회적으로는 인민 평등권을 제정하고 능력에 따라 인재를 등용하여 정치참여 기회 확대를 표방했다.

개화당 정부를 수립한 갑신정변은 청나라가 개입, 이른바 ‘3일천하’로 끝났고 김옥균, 박영효 등 주모자들은 일본으로 망명했다. 일본의 지원만 믿고 민중 지지를 얻지 못한 채 소장파 파워 엘리트들이 성급하게 추진한 정변(政變)의 한계였다, 이 거사는 국내적으로 임오군란 이후 청나라의 과도한 내정 간섭을 유발했고, 개화정책의 후퇴와 급진 개화파의 활동의 위축을 가져왔다.

갑신정변으로 조선과 일본은 1885년 1월9일 한성조약을 체결, 조선이 거류민 희생에 대해 배상금 10만원과 희생자에 대한 구휼금 지급, 갑신정변 당시 불탄 일본 공사관의 신축비를 부담하기로 했다.

 

일본과 청나라는 1882년의 임오군란과 1884년 갑신정변을 겪으며 조선에서 국익을 놓고 사사건건 대립했다. 동북아시아 지역 국제정치 패권구도를 결정짓는 관건이 된 한반도는 강화도조약 이후 커지는 일본 세력을 물리치고 이전까지의 조공관계를 유지하려고 안간힘을 쓰는 청나라와 대륙 진출 야망을 품고 호시탐탐 조선을 노리는 일본의 대결이 치열하게 전개되었다.

갑신정변 사태수습을 위해 청나라와 일본이 1885년 4월18일 체결한 톈진조약(天津條約)은 한반도에 대한 양국 이견 조정, 청일 양군이 조선에서 4개월 이내 동시 철병, 조선 국왕에게 권해 조선의 자위군을 양성하도록 하되, 훈련교관은 청·일 양 당사국 이외의 나라에서 초빙하도록 할 것, 조선에 다시 군대 파병 필요가 있을 때 상대방에게 사전에 문서로 미리 알릴 것을 명시했다.

특히 향후 조선에서 변란이나 중요사건이 발생하여 청·일 두 나라 또는 어느 한 나라가 파병할 때는 먼저 문서로 연락하고, 사태가 진정되면 다시 철병, 주둔하지 않는다는 내용도 포함되어 있었다.

톈진 조약은 갑신정변 실패의 결과로 1885년(고종 22년) 4월 18일(음력 3월 4일) 청나라 전권대신 이홍장과 일본 제국 전권(全權)대신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가 동북아시아 세력 균형을 위해 맺은 조약이다. 무엇보다 ‘조선 의사와 관계없이’ 청과 일본이 조선에 대해 균등하게 간섭과 파병의 권리를 갖는다는 침략적 국제 조약으로 조선의 정치적, 군사적 상황에 대해 당사국을 배제한 채 두 나라가 임의로 결정한 것이다.

톈진 조약으로 청나라와 일본의 충돌 위기는 일단 해소됐다. 일본은 갑신정변에 책임이 있었지만 이토 히로부미가 주도한 이 조약으로 추궁도 당하지 않고 정식으로 청과 대등한 지위와 권리를 확보했다. 청군을 조선에서 완전히 철수하도록 한 것도 일본 외교의 성과였다.

그러나 청은 상민수륙무역장정에 의거하여 북양함대의 군함을 수시로 인천에 파견하고 지휘관을 주둔시켜 인천을 북양함대의 전진기지로 만들어 서해는 청의 내해(內海)가 됐다. 청은 이를 기반으로 조선 내정에 적극 개입했다.

어느 한 쪽의 일방적 우위 없이 청·일 두 나라의 갈등을 임시방편으로 봉합한 톈진 조약 내용들은 후일 ‘청·일(淸·日)전쟁’ 발발의 원인이 된다. 한반도 내 양국 주둔군 철수를 주요 내용으로 한 이 조약에 명시된 청·일 공동파병권은, 10년 후 그 갈등이 폭발하여 1894년(갑오) 청·일 전쟁이 일어나는 빌미로 작용한 것이다.

이때 이토 히로부미가 조선 문제에 대한 국제적 협상에 얼굴을 드러낸다. 영국 유학생으로 영어가 가능했던 노회한 정치가이자 세계정세를 두루 읽고 있던 그의 등장은 차후 동북아에서 벌어질‘그레이트 게임’에 일본의 개입을 알리는 신호탄이었다.

당시 총리로 톈진 조약 협상의 일본 대표였던 이토 히로부미는 1885년 4월12일, 청나라 이홍장과의 5차 회담에서 조선문제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영국이 조선의 거마도를 점령할 가능성이 있다. 만일 타국이 이 섬을 점령하거나 공격하면 우리는 그곳에 육해군 병영을 설치하거나 국력을 다해 이를 방어하지 않을 수 없다. 따라서 타국이 만일 거마도라는 이름을 가진 이 섬을 점령하는 일이 있으면 귀국도 이와 같이 군사를 보내 방어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4월 20일 이홍장은 청나라 총리아문에‘이토 히로부미는 나라를 다스릴 재주가 있다’라는 제목을 붙인 서한을 보냈다. 이홍장은 서한에서‘일본이 장차 중국에 큰 화근이 될 것’이라고 지적한 후,‘이토 히로부미는 오랫동안 유럽과 미국을 순방한 바 있으며 나라를 다스릴 재주가 있고 지금 부국강병(富國强兵)에 힘쓰고 있으니 10년 후에는 일본의 부강(富强)이 나타날 것’이라고 전망했다. 이홍장의 이 같은 예견은 머지않아 현실로 드러난다.

서세동점 정세하에서 이토 히로부미가 주도하는 일본의 대 조선정책은 조선에 대한 청의 실질적 지배를 저지하는 방향으로 이행하였다. 그 결과 톈진조약이 체결되었다. 그리고 일본의 대조선정책의 전환을 촉진하였던 것이 1885년 4월 15일 발생한 거문도사건이라 할 수 있다.

일본의 대표적 지식인인 후쿠자와 유기치(福澤諭吉)는 영국의 거문도 점령사건과 러시아의 남하정책에 대해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조선정부는 나라를 지킬 수도 없을 뿐만 아니라 인민을 착취하는 구폐를 일소하고자 하려는 의지도 없다고 하였다. 더 나아가 이러한 정부는 인민을 위해 차라리 없는 것이 더 낫다고 말했다. 그리고 이 같은 상황에서 일본은 군비확장을 통해 청과 러시아에 대항할 힘을 키워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후쿠자와 주장은 언뜻 보면 조선에 대한 일본의 침략 의지를 나타내는 것이라 할 수 있으나 실은 조선에 대해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일본의 처지를 비관적으로 나타낸 것이었다. 이같은 주장이 나타나게 된 배경에는 임오군란과 갑신정변 이후 조선에서 청의 종주권이 확대되는 과정에서 영국에 의해 감행된 거문도사건으로 러시아의 조선 진출 혹은 점령이 향후 일본의 조선 혹은 대륙진출에 걸림돌이 될 것이라는 예상 때문이었다. 이처럼 임오군란과 갑신정변 이후 일본은 외교적으로 조선에서 어떠한 영향력도 행사할 수 없는 입장에 있었던 것이다.

일본이 청나라와 동북아 패권을 다투던 상황에서 취할 수 있는 정책은 ‘탈아론(脫亞論)’과 ‘흥아론(興亞論)’, 그리고 이를 뒷받침할 군사력 강화로 집약되었다. 이는 임오군란과 갑신정변과 같이 일본의 국운이 걸린 사건에서 청나라에 패배한 원인과 향후 과제를 고민하는 과정에서 탄생한 국가전략이었다. 즉 일본이 조선에서 청에 패배한 것은 군사력의 열세 때문으로 군비 강화가 국가적 현안이 되었다. 특히 일본이 아시아를 벗어나 유럽과 발전을 같이 해야 한다는 ‘탈아론(脫亞論)’이 국민적 공감을 얻고, 한반도 침략이 일본의 대조선정책 기본이념으로 자리잡게 되었다.

 

후쿠자와가 창간한 『시사신보(時事新報)』는 이를 다음과 같이 보도하였다.

 

아일본(我日本)의 국토는 아시아의 동변에 있지만 그 국민정신은 이미 아시아의 고루(固陋)를 벗어나 서양의 문명으로 옮겨 왔다. 그러나 여기에 불행한 것은 근린(近隣)에 지나(支那)라 하고, 조선이라 하는 차이국(此二國)의 인민도 고래 아시아류(流)의 정교풍속(政敎風俗)에서 살아온 것은 아일본(我日本)과 다르지 않지만 …… 문명개화의 유행을 만나지 못한 양국은 그 전염의 천연을 어겨 무리하게 이를 피하고자 하여 실내(室內)에 한거(閉居)하고 공기의 유통을 막고 있어서 질식되지 않을 수 없다. … 서양인의 눈으로 보면 삼국의 지리상접(地理相接) 때문에 혹은 이를 동일시하고 지한(支韓)을 평가함으로써 아일본(我日本)을 생각하는 의미 없지 않다. … 그 영향이 사실로 나타나서 간접으로 아외교상(我外交上)의 고장을 이룬 것이 실로 적지 않다. 아일본(我日本)의 일대 불행이라 이르지 않을 수 없으니 금일의 모(謀)를 위함에 아국(我國)의 개명(開明)을 기다려 공(共)히 아시아 부흥의 유예(猶豫) 있을 수 없다. 차라리 기오(其伍)를 탈(脫)하여 서양 문명국과 진퇴를 공히 하고 기지나조선(其支那朝鮮)에 접하는 법도 인국(隣國)인 고로 특별히 해석을 내릴 것이 아니라 서양인이 이에 접하는 풍(風)으로 따라서 처분할 수 있을 뿐 …

 

■ 대국(大國) 청나라의 처참한 몰락

 

동북아시아에서 한반도의 지정학적 중요성이 커지면 커질수록 패권국가로 자웅을 겨루던 열강들은 한반도를 영향력 아래에 두려고 혈안이 돼 각축했다.

인접국가인 청나라와 일본은 물론, 미국과 영국, 독일, 러시아 등 서구 열강도 해양세력과 대륙세력으로 나뉘어 은둔의 나라 조선이 갖는 국제정치 패권경쟁 속에서 지정학적 위치의 중요성을 인식, 주도권 장악을 위한 합종연횡을 전개했다.

이렇듯 급변하는 국제정세였지만, 국제정치 흐름에 대한 빈약한 정보와 지도층의 무능한 리더십으로 4분5열 상태였던 조선정부는 그야말로 북한 핵무장에 대비해‘핵 우산’을 찾는 요즘 처럼‘보호국’을 찾아 갈팡질팡 우왕좌왕하다 결국 지리멸렬로 치닫게 된다. 이 무렵 발발한 청·일 전쟁은 일본과 청나라가 조선에 대한 우월적 지배권을 행사하기 위한, 피할 수 없는 한판 싸움이었다.

 

명성황후가 실력자였던 조선은 임오군란 때 청나라 군대를 요청해 진압하고 정적인 대원군을 납치하도록 했던 것처럼 농민봉기를 진압할 수 없었던 국내 문제에 또 청나라를 끌어들였다. 1894년 5월, 정부 부패에 분노해 봉기한 농민군 진압이 자력으로 힘들어지자 청나라에 파병을 요청한 것이다. 이에 청나라 군대가 6월8일 아산만에 상륙했고, 조선 정세를 주시하고 있던 일본은 다음날(6월9일), 영사관 보호를 내세워 오토리 게이스케(大鳥圭介) 공사가 일본군 420명을 이끌고 서울로 진격하였다.

정한론(征韓論)을 바탕으로 호시탐탐 조선 병탄 기회를 노리며 10여년 이상 준비해 온 일본은, 물실호기(勿失好機)로 8,000여명의 일본군 주력부대를 서울로 진격시켜 7월23일 경복궁을 점령했다. 청나라 군대가 조선에 파병할 때에는 일본군대도 파병한다는 톈진 조약에 따라 조선에 군대를 파견한 것이다.

이틀 후 7월25일, 아산만 근처 풍도(豊島) 앞바다에서 일본 군함은 청나라 군인을 실은 영국 상선 고승호를 침몰시키면서‘청·일전쟁’의 분수령이 된 해전(海戰)이 발발했던 것이다. 여기서 청나라 군사 1,200여명이 일본 전함 공격에 격침돼 전사했다.

청나라와 일본 양국은 선전포고(宣戰布告)를 하고 전면전으로 돌입했다. 하지만 이후 벌어진 평양 전투와 압록강 어귀에서 벌어진 해전에서도 청군이 패주했다. 일본 해군은 우세한 전력으로 연승하며, 산둥반도의 웨이하이웨이(威海衛)까지 점령한 후, 최후로 유공도(劉公島)의 함대를 격파해 이홍장의 북양함대(北洋艦隊)는 궤멸되었다.

청나라 북양수사제독(北洋水師提督) 정여창(丁汝昌)은 항복문서와 함께 모든 군사물자를 일본에 양도하고 자결했다. 일본군은 랴오둥반도·발해(보하이이)만·산둥반도를 장악하고, 베이징·톈진을 위협하였다. 곧바로 청나라 전체를 정복할 기세였다.

전쟁을 철저히 준비해온 일본은 무력하고 부패한 청나라를 상대로 압도적으로 승리할 수 있었다. 청·일전쟁의 승리로, 일본은 오랜 세월 동아시아의 맹주였던 청나라로부터 패권을 넘겨받았고, 조선 등 대륙으로의 침략을 한층 강화할 수 있게 되었다. 반면 패전국 청나라는 하루아침에‘동네북’으로 전락, 제국주의 열강의 침략에 속수무책으로 당하는 몰락의 길을 걷게 된다. 세계열강의 먹잇감이 된‘연한 고기’라는 표현대로 청나라는‘종이호랑이’라는 평판을 받은 3류 국가로 몰락한 것이다. 이토 히로부미는 당시 총리로서 청·일전쟁의 사령탑이 되어 지휘했다.

이럴 즈음 영국과 러시아, 미국 등이 중재에 나섰다. 그 결과 일본과 청국은 1895년 4월 시모노세키조약(下關條約)을 체결해 청·일전쟁의 뒤처리를 하였다. 일본은 승전 대가로 청나라 1년 예산의 2.5배에 달하는 거액의 배상금과 중국의 영토인 랴오둥 반도(遼東半島), 타이완(臺灣) 등을 할양받았다.

그러나 만주 진출을 꾀했던 러시아는 일본이 랴오둥 반도를 장악하는 것에 위기감을 느끼고, 프랑스·독일 등과 함께 랴오둥 반도를 중국에 반환토록 압박했다. 힘의 열세를 느낀 일본은 결국 랴오둥 반도를 반환하였고, 아무 관련도 없는 러시아가 강대국이라는 이유로 일본을 압박하는데 대한 불만은 심화되어 전 국민적으로 대 러시아 적개심이 불타올랐다. 러시아의 힘에 무릎꿇는 굴욕을 당한 일본의 무력감이 전쟁 결의로 다져지면서 10여년 뒤 치러질 러·일전쟁의 씨앗이 잉태되고 있었다.

 

 

■ 러시아 등장과 인아거청책(引俄拒淸策)

 

19세기 말, 신흥 강국 러시아가 부동항 확보를 위해 동유럽의 발칸반도, 중앙아시아, 극동아시아 등지로 진출하자 당시의 해양 국가이자 패권국인 영국은 러시아의 남하(南下)정책에 대한 전방위 방어가 불가피해 졌다.

러시아는 1858년 청국과 아이훈 조약을 체결. 아무르 강 좌안 땅을 획득했고, 1860년 11월14일 청국과의 북경조약을 맺어 연해주 등 광활한 영토를 확보했다. 이어 러시아는 극동아시아 최북단에 블라디보스토크(동방을 지배한다는 뜻) 항구를 개척하면서 본격적으로 동방 경략(經略)에 나섰다.

러시아는 블라디보스토크 항구가 1년 중 3개월만 얼지 않은 탓에, 부동항을 확보하려면 더 남쪽으로 내려가야 했다. 1861년 3월부터 6개월간 일본의 대마도 항구 사용을 요구하다가 영국의 개입으로 철수한 일도 있었다. 그래서 영국은 1861년 러시아가 부동항 확보 1차 목표지로 삼은 원산과 함께 대마도 점령을 우려하고 있었다.

 

부동항을 찾아 남하정책을 펴는 러시아는 청나라 속국에서 벗어나 자주 국가를 열망하던 조선에게 크나큰 원군이었다. 당시 정권을 잡고 있던 명성황후와 척족 세력은, 자신들을 견제하기 위해 청나라가 2년째 억류하고 있던 정적(政敵) 대원군을 귀환시키려는 움직임을 보이자 신흥대국 러시아에 주목했다.

일본과 청나라를 견제하기 위한, 특히 1884년 갑신정변으로 청의 내정간섭이 심해지자 청을 견제할 세력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갑신정변 이후 조공(朝貢)체제에서 조선을 식민지로 만들어 지배하려는 청을 견제하기 위해, 명성황후를 중심으로 신흥 강대국인 러시아 세력에 크게 기대를 걸고 있던 조선은 청나라 견제를 위한 조선판 이이제이(以夷制夷) 정략으로 러시아와 수교하기에 이르렀다.

마침 1882년 임오군란 후 조선의 요구에 따른 이홍장 추천으로 조선의 통리교섭통상사무협판, 즉 외무협판(차관)에 임명(1882)되어 외교고문으로 파견된 독일 프러시아 출신 묄렌도르프(Möllendorff)는 청의 지나친 간섭을 방어하려는 정부의 부탁을 수용하여 조·러통상조약 체결(1884.5)을 주선했다.

개화 초기(1882-1885) 조선 최고실력자로 1883년 봄, 해관총세무사에도 임명되어 재정까지 장악한 묄렌도르프는 한성조약이 체결된 뒤 특명전권 대신 서상우와 함께 갑신정변 사과 사절로 일본을 방문했다. 일본으로 떠나기 전 묄렌도르프는 고종을 설득해 일본 주재 러시아 공사와 협상할 전권을 얻었다.

그는‘러시아를 유인해 친교하며 청나라는 멀리 한다’는 이른바 인아거청책(引俄拒淸策)의 설계자가 돼 일본 주재 러시아 공사 스페이에르와 결탁,‘조·러 밀약’을 맺어 러시아 세력을 조선왕조에 끌어들였다.

청나라와 일본의 속박에서 벗어나려던 조선은 신흥 강국인 러시아 쪽으로 빠르게 기울기 시작한다. 러시아를 막아야 된다는 황준헌의 <조선책략>과는 반대인 인아거청(引俄拒淸)으로 국가전략이 방향전환을 한 것이다.

일설에는 독일의 첩자였던 묄렌도르프가 청나라 추천으로 조선에 파견됐음에도 “러시아라는 곰을 동아시아 목장으로 유도하라”는 독일 외무성 지령을 받아 청나라를 속여 가며 1884년 7월 조선이 러시아와 수교토록 주선했다는 설도 있다.

1870년 초‘보불전쟁’으로 프랑스를 제압하고 승승장구하던 통일 독일은 유럽에서 러시아가 세력 확장의 걸림돌이자 버거운 상대로 등장하자, 러시아 눈길을 동양으로 돌리는 것이 유리하다고 판단했다는 것이다.

1884년‘조·러 밀약’에 따라 조선은 러시아에 영흥만(원산)을 조차(租借)하고, 러시아는 조선에 장교와 부사관을 파견해 조선군 육성을 돕기로 하였다. 그러나 이에 영국이 강하게 반발해 거문도를 점령했고, 청나라 이홍장도 격분하였으며 일본도 반발하였다.

 

■ 망국(亡國) 앞당긴 내부 분열과 비밀외교

 

갑신정변 이후 전개된 국제정치관계의 결과 체결된 조약이나 발생한 사건은 조·러 통상조약(1884.5) - 한성조약(1885.1) - 제1차 조·러밀약(1885.4) - 영국의 거문도점령(1885.4.15.) - 톈진조약(1885.4.18.) - 제2차 조·러밀약설(1886.7) -- 조·러육로통상장정(1888) 등 숨 가쁘게 전개됐다.

조·러통상조약 체결(1884.5) 뒤 조선정부는 러시아 황제에게 밀사를 보내 보호를 요청하는 고종친서를 전달(1884.12)하기에 이르렀다.

이때 묄렌도르프 중재로 베베르 러시아 공사와 접촉하여 러시아의 조선 내 영향력 확대를 용인하는 대신 러시아 군사교관 초빙 및 청일전쟁 발발시 조선의 독립을 지켜준다는 비밀교섭(제1차 조·러 밀약설, 1885.4)을 벌였다. 그러나 곧 1차 조·러 밀약은 체결추진 사실이 폭로되어 실패하였다.

고종 - 민씨 세력이 조·러 밀약을 추진한 사실이 알려지자, 청은 이를 주선한 묄렌도르프를 소환하고(1885) 미국인 데니를 내무협판에 임명되도록 하는 한편, 친러 고종 - 민씨 세력을 견제하기 위해 청에 있던 대원군을 조선으로 귀환시켰다. 이러한 청의 견제로 1차 조·러 밀약은 무산되었다.

고종의 왕위 폐위까지 거론한 청나라의 압박으로 위기의식을 느낀 조선 조정은 러시아 공사 베베르에게 러시아의 보호 요청과 함께 군함 파견을 간청하는 고종의 국서를 전달하기도 하였다(1886.7, 제2차 조·러 밀약설).

조선과 제3국과의 분쟁 시 러시아가 군사적으로 원조해 준다는 내용의 조·러밀약이 베베르 공사와 김윤식 외무협판 간에 체결되어 친러파가 크게 부상하자 청나라는 이런 사태를 방치할 수 없었다. 조·러 밀약 추진에 대해 청이 묄렌도르프 소환, 고종-민비 세력을 견제하기 위한 대원군 환국 등 견제에 나섰지만 명성황후를 중심으로 러시아 의존도가 심화되었다.

러시아 세력을 끌어들여 청나라 압제를 견제하려 한‘인아거청책(引俄拒淸策)’은 일종의 이이제이(以夷制夷) 전략이었다. 그러나 이 정책은 지도층의 무능과 정보부족으로 거문도 점령과 명성황후 시해(弑害), 아관파천(俄館播遷)이라는 비극의 씨앗을 뿌리고 조선왕조 멸망으로 이어져 망국(亡國)을 앞당긴 계기로 작용하게 된다.

 

■ 한반도에서의 맞붙은 러시아와 영국

 

조선에 대한 영토적 야심을 갖고 있던 영국과 러시아는 아편전쟁 패배로 서구 열강의 먹잇감이 된 청나라와 개별적으로 조약을 맺었다. 1842년 난징조약(南京條約)으로 홍콩을 확보한 영국은 다시 베이징조약(北京條約)을 체결해 홍콩 섬 맞은편의 주룽을 1860년 10월24일부터 할양받았다.

러시아는 1858년 헤이룽장(黑龍江)성의 북쪽 아무르 강 연안의 아이훈에서 불평등 조약인 아이훈조약(愛琿條約)으로 헤이룽 이북지역을 확보하고 연해주까지 할양받았다. 시베리아 지역을 차지하고 태평양에 진출하기 위한 교두보로 블라디보스토크에 군항을 건설했다.

블라디보스토크는 원래 만주의 일부로, 과거에는 북옥저, 고구려와 발해의 땅이었다. 그 뒤 요나라, 금나라, 원나라 영토였다가 후금(後金)의 누르하치가 이 일대를 장악하면서 청나라에 복속되었고 1860년까진 청나라 영토였다.

그러다 부동항 확보를 위하여 일으킨 크림 전쟁에서 패배한 러시아가 유럽 쪽 부동항 확보를 포기하고 아시아 쪽으로 관심을 돌리고, 당시 제2차 아편전쟁으로 혼란에 빠진 청과 유럽 국가 사이에서 전쟁에 불참하고도 국력을 바탕으로 중재자로 나선뒤 그 대가로 베이징 조약을 맺어 이 지역을 러시아 영토로 편입시켰다.

러시아 제국은 1860년에 이곳에 도시를 건설하기 시작했고 이것이 현재 블라디보스토크라는 도시의 출발점이었다. 러시아 본토와 거리가 먼 동쪽 끝 변방이었지만, 러시아 제국이 심혈을 기울여 육성한 항구도시로, 1891년에는 나중에 황제가 되는 니콜라이 2세가 황태자 신분으로 시베리아 횡단철도 착공식에 참석하기 위해 방문하기도 했다. 블라디보스토크는 더 확실한 부동항인 황해의 뤼순(旅順: 러시아어로는 포르트 아르투르)이 건설되자 중요성이 조금 낮아졌다가, 러·일 전쟁 패배 후 다시 유일한 극동(極東)의 부동항이 되면서 가치가 올라갔다.

 

이때 블라디보스토크를 차지한 러시아는 함경북도 북동단의 경흥을 조차지(租借地)로 확보한 뒤, 겨울에도 얼지 않는 부동항의 적격지로 영흥만·제주도·쓰시마 섬 등을 노리고 있었다. 이 중에서도 영흥만이 가장 유력한 점령 대상지였다.

러시아 입장에서는 유능한 외교관이었던 베베르 공사의 활발한 활동으로 조선 내에 러시아 영향력이 강화되면서 한반도에 야심을 갖고 있던 러시아의 함경도 영흥만 점령 계획설이 일본과 조선 내에서 나돌자, 그레이트 게임 당사자인 영국은 방관할 수 없었다.

당시 영국과 러시아는 크림반도에서 이란, 아프가니스칸을 거쳐 동아시아에 이르는 넓은 지역에서 사사건건 대립하고 있었다. 영국은 동아시아에서 러시아의 남하로 만주와 중국에서 러시아 영향력이 확대는 것을 경계, 러시아 견제가 불가피해졌다. 이는 육군 규모 세계 1위의 러시아와, 해군 세계 1위의 영국이 한반도에서 펼쳐질 대륙세력과 해양세력의 세기적 대결의 전초전(前哨戰)이었다.

 

대륙세력과 해양세력의 접점인 한반도에서 발생한 영국의 거문도 점거는 당시 개화파와 쇄국파의 생사를 건 권력투쟁의 소산인 갑신정변(1884년)으로 조선의 국내 정치가 혼미한 상황에서 발생했다. 영국이 거문도에서 철병한 10여년 뒤 영국이 우려했던 대로 러시아세력이 본격적으로 한반도에 손을 뻗치게 된다. 국왕이 러시아 공사관에 피신하여 국사를 보았다는 주권국가로서 치욕적인 1896년의 아관파천(俄館播遷)은 망국의 전조(前兆)로서 다른 열강에 치욕적인 민낯을 보인 것이다.

영국의 거문도 점령이 러시아세력의 남하를 저지하려던 선제공격이었다면 1902년의 영·일 비밀동맹은 영국이 일본을 내세워 러시아의 남진을 저지하려고 한 또 다른 견제구였다. 2년 뒤 일본은 막강한 영국을 뒤에 엎고 러·일전쟁(1904~5년)을 일으켜 승리한 후 급기야 조선 병탄(倂呑)의 수순을 밟게 된다. 거문도사건은 영·일동맹의 단초를 제공했고, 일본이 당시 대륙의 최대강국 러시아에 도전하는 빌미를 제공하였으며 그 결과 조선은 망국(亡國)의 수순을 밟게 되는 것이다.

3장. 사드 게임, 제2의‘거문도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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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문도 점령은 영국이 느닷없이 약소국 조선을 침탈한것이 아니라, 19세기의 강대국 러시아 제국과 '거대한 게임'을 벌이면서 러시아의 남하를 저지하려는 목적에서 일어난 동북아의 그레이트 게임으로 이해해야 한다. 영국 입장에서 거문도 점령은 영국·야프가니스탄 전쟁이나 크림 전쟁, 영·일동맹과 본질적으로는 다르지 않은 사건이었다. 1853년 이래 1907년까지 무려 50년 동안 영국은 러시아 남하에 맞서 냉전에 버금가는, 전 지구적 규모의 대치 상태를 만들고 있었기 때문이다.

특히 발칸 반도로의 남하가 좌절된 러시아는 중앙아시아와 동아시아에서의 남하에 관심을 가졌고, 이는 영국으로서는 무시하기 어려운 일이었다. 2차례의 아프가니스탄 전쟁은 러시아의 남하를 저지하기 위한 방파제를 확보하려는 영국의 세계 패권국 지위 유지목적으로 수행되었다.

영국의 거문도 점령 경위는 러시아 경계에서 비롯되었다. 조선은 1884년 12월 묄렌도르프를 통해 러시아에 청·일 전쟁이 벌어지면 조선 보호를 위한 5~6만 명 규모 조·러 연합군 구성을 제안했다. 비밀협상으로 유사시 거문도의 러시아 해군 석탄보급기지 사용 등을 약속한 조·러 밀약설이 나돌자 조선의 친러 정책과 러시아의 조선내 세력 확대에 청·영국이 민감하게 반응하였다.

비밀협약설과 함께 수교 불과 몇 달 후, 그동안 조선의 위협국가로 인식되어 왔던 러시아에 조선이 어떻게 그런 제안을 하고 밀착하게 되었는지 영국으로서는 충격적이었다. 일본 주재 영국대사관이 본국에 조·러 밀약설을 긴급 보고하자, 영국의 러시아 야심에 대한 경계가 극에 달했다.

영국이 거문도 강점을 결정하기까지는 몇 가지 요인도 작용했다. 1885년 1월 28일 영국 외무부는‘러시아 조선 남부 섬 점령 계획’을 보도한 당시 러시아 주재 대사가 보내온 러시아 잡지 노보스티의 기사 번역문을 해군성에 보냈다. 쿠엘파트(Qualpart)섬(유럽에서 당시 제주도 명칭)일 가능성이 높다고 했다.

또 조선이 러시아와 기사 내용을 뒷받침하는 밀약을 맺었다는 일본 주재 영국대사관의 보고까지 전해졌다.

1885년 영국의 거문도 점거는 러시아의 부동항 획득을 사전에 봉쇄하려는 의도에서 빚어진 것이라는 통설과 다르게 영국에 의해 의도적으로 조장된 측면도 있다는 주장도 있다. 러시아가 아프카니스탄 국경의 판데(pendjeh)를 침공하여 인도로 가는 통로를 위협하는 극도의 긴장된 조건에서 영국이 러시아 남하를 핑계 삼아 선수를 친 것이라는 주장이다.

 

 

■ 왜 거문도(巨門島)인가

 

영국은 일찍이 세계지도를 놓고 글로벌경영을 위한 그랜드 디자인을 하면서 해양대국(海洋大國)답게 태평양에 대한 조사를 대대적으로 실시했다.

1845년 사마랑(samarang)호를 이끌고 제주도에서 거문도 해역까지 약 1개월 간 탐사했던 영국해군 에드워드 함장은 <사마랑호 탐사 항해기(Narrative of the Voyage HMS Samarang)>를 발간했다. 거문도를 당시 해군성 장관 이름을 따서 ‘해밀턴항(Port Hamilton)’으로 명명한 영국은 1859년 대마도 근처를 몇 주간 정밀 조사했다. 일본도 서구 열강의 한반도를 둘러싼 움직임을 예의주시하던 차였다.

영국은 러시아 남하를 저지하기 위해 대(對)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 봉쇄작전 중간기착지로 거문도를 유사시 점령하기 위한 작전계획까지 수립했다. 그리고는 40여년 뒤 실제 거문도 무단 점령한 것이다.

 

영국해군이 거문도를 공략할 것이란 소문이 동아시아 지역의 개항장인 홍콩· 상해· 요코하마· 나가사키 등지에서 파다했다. 영국은 청나라 홍콩 주둔 함대 사령관 윌리엄 도웰(William Dowel) 해군 중장에게 긴급 훈령을 내려 일본 나가사키에 정박 중인 군함을 출동시켜 거문도 점령을 명한다. 대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 봉쇄작전이 시작되었다. 대한해협에서 러시아의 목줄을 쥐려는 의도에서 벌어진 명백한 국제법 위반이었다.

 

1885년 3월 30일 러시아 판데 점령이 알려진 것은 4월 7일경이었고, 그로부터 즉각 전쟁 준비에 들어간 영국이 4월 15일 거문도를 점령했다. 1차로 영국군은 아가멤넌호 등 군함 6척·상선 2척, 그리고 승무원 617명이 조선에 아무런 통보도 없이 거문도를 점령한 것이다. 영국은 무단 점령이 명백한 국제법 위반임을 의식, 러시아가 거문도나 조선의 다른 지역을 점령할 계획이므로 사전에 이를 막기 위한 것이라고 선전했다.

영국은 이어 중국 주둔 함대를 거문도에 속속 진입시켜 많을 때는 군함 13척, 총 병력 2천 명을 상회하였다. 이들 해군은 내항에 목책을 설치하고 막사를 건설하는 등 여섯 개 처에 포대와 병영을 쌓아 요새를 구축했다. 섬 주위에 수뢰(水雷)를 부설하고 3개의 항만 출입구에 방어시설을 구축하였다.

당시 영국 해군은 거문도를 점령하자마자 거문도와 양자강 입구 상하이까지의 600㎞를 통신선으로 연결하는 공사를 시작했다. 그 결과 5월 28일 상하이와 거문도 간의 통신선이 설치됐고, 거문도와 홍콩과는 6월 2일에 연결됐다. 거문도와 홍콩의 영국 해군 중국본부 사이의 1800㎞에 통신선이 연결된 것이다.

막사 건축과 해안 축조는 거문도 주민을 동원하고 용역을 받은 미국건축업자가 중국인 목수와 미장이를 대동하여 만들었다. 당시에 거문도 상주인구는 약 2000여 명으로 그 중에서 성인 남자 300여 명이 일당 6펜스(조선엽전 75푼)씩 받고 동원되었다. 물론 일부는 물자로 지급되기도 했다. 당시 영국 해군대위의 일당이 4펜스로 일 값은 제대로 지불, 주민과 마찰이 없었다고 한다.

그렇다면 영국은 수많은 남해안 섬 중에서 하필이면 거문도를 주목했을까.

여수와 제주도 중간 지점에 위치한 거문도는 면적 12㎢인 다도해의 최남단 섬으로 고도, 동도, 서도 세 섬으로 이루어 있어 삼산도(三山島)라 불렸다. 작은 섬들로 둘러싸인 내해는 언제나 파도가 잔잔하고 간조 때도 수심이 14~16m로 유지되는 천혜의 양항(良港)인데다, 아늑한 만이 요새처럼 숨어 있어 지정학적으로 군항조건에 안성맞춤이었다.

거문도는 남해안과 제주도의 중간 해역이자 대한해협의 문호로서 제주도와 한반도, 일본 큐수와의 삼각지점에 위치한 전략적 요충지였다. 한·일 간 해상통로이며, 러시아 동양 함대의 길목에 위치해 서구열강에 동북아 군함과 무역선이 중간 기착하는 군항(軍港)으로 완벽한 조건을 갖춘 항구로 평가됐다.

 

영국은 거문도 점령 5일 뒤인 4월20일에야 청나라와 일본에 점령 사실을 통보했다. 1883년 11월 26일 조선과 우호통상조약을 맺어 1884년 4월4일 영국 공사 해리 스미스 파키스(Harry Smith Parkes)가 주한 영국 총영사관을 열고 상주했음에도 불구하고 조선에는 한 달이 훨씬 지난 5월20일에야 통보했다. 그것도 일본으로부터 조선에 통보를 정식으로 했느냐는 문의를 받고서야 영국의 북경 대사관을 통해 간접적으로 통고하는 방식이었다.

영국의 거문도 점령 사실을 조선 조정에서 뒤늦게 알고 대책회의를 열었다. 사건 보고를 접수한 외무협판 김윤식은 당대 최고의 지식인이었지만 어전회의에서 거문도 위치를 “강화도 근처의 주문도를 말하는 거 같습니다.”하는 등 정부 요인들은 거문도 위치조차 몰라 횡설수설했다. 조선 정부의 국토에 대한 인식정도를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사례이다.

4월20일 청나라 주재 일본 공사 에노모토는 영국의 거문도 점령 사실을 전보로 일본 정부에 긴급 보고했다. 다음 날인 21일 조선 침략을 위한 교두보 확보 기회를 예의주시하던 일본 정부는 총리 이토 히로부미 주재로 긴급 대책회의를 열고 거문도에 군함을 파견하기로 결정했다. 일본은 원교근공책(遠交近攻策)에 따라 영국과 우호관계를 유지하되, 청나라를 부추겨 영국으로 하여금 스스로 거문도에서 철수하게 한다는 방략을 세웠다.

4월24일 청나라 주재 영국 임시대리공사 오코너는 본국 정부 훈령에 따라 조선에 거문도 점령을 통고하는 조회문을 작성해 보냈다.

 

■ 거문도 사건, 동북아판‘그레이트 게임’

 

최초로 한반도 동해안 영해를 실측(實測)한 러시아는 부동항 확보 차원에서 거문도의 전략적 가치에 주목했다. 1854년 푸티아틴 제독이 이끄는 러시아 함대 파라다호(號)는 22일에 걸쳐 한반도 남해 거문도를 비롯해 동해안 전역을 실측하고 지도를 제작했다. 그들은 거문도에서 정박하며, 석탄 저장소 설치 가능성 등도 조사했다. 후에 이 자료가 러시아의 조선경략(經略)의 기초자료가 되었음은 물론이다.

이를 토대로 종래의 쿠루젠시탄의 지도와 영국 해군성지도가 대폭 수정되었으며, 마침내 ‘고요한 아침의 나라’는 만방(萬邦)에 속살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당시 이러한 러시아의 움직임을 영국과 일본 등 주변 열강들은 예의주시하고 있었다.

 

‘거문도 사건’은 영국과 러시아의 영토 팽창 과정에서 조선이 본격적으로 국제정치에 등장하는 계기이자, 영토가 침탈당한 세계사적 사건이었다. 조선을 비롯해 주변의 청나라와 일본은 물론, 영국 러시아 독일 등 서구열강 등 7개국이 자국의 이해에 따라 허허실실(虛虛實實)로 적극 개입했다.

영국은 크림반도를 통해 러시아를 공격하려 했지만 당시 프로이센 총리인 비스마르크가 길목을 막았다. 극동에서도 러시아 영향력이 강화되면서 러시아의 함경도 영흥만 점령 계획설이 나돌자 영국의 러시아 견제는 불가피했다. 이 때 러시아의 남진정책 저지를 위한 조선반도의 전략적 가치를 주목, 러시아 함대를 견제한다는 명분으로 거문도 무력점령이 국가적 과제로 떠오른 것이다. 영국 내각은 1885년 거문도 선점권 확보를 의결하고 당초 크림반도 진출계획을 바꿔 블라디보스토크를 공격하기로 한다. 그 계획의 실천이 바로 거문도 점령이었다.

영국 해군의 거문도 강점이 국제정치 속에서 러시아와 중동에서 벌어진 사태에 따른 세력 균형을 맞추려고 갑작스럽게 이루어진 것처럼 이해하지만 영국은 오래전부터 거문도 강점을 준비해왔다.

1877년 홍콩에 주둔한 영국 해군 중국본부(China Station) 본부장이었던 라이더 제독은‘러시아를 견제하고 중국과 일본을 상대로 하는 무역을 보호하기 위한 해군 거점으로 거문도를 점령해야 한다.’는 보고서를 올린 바 있다.

 

전격적인 거문도 불법 점거로 중앙아시아 지역에서 경쟁하던 영국과 러시아의 대결이 극동에서도 치열한 경쟁이 벌어지기 시작한 것이다. 러시아가 아프가니스탄 국경의 판데(Pandjeh)를 침공하여 인도로 가는 통로를 위협하는 극도의 긴장된 전시상황 하에서, 영국은 러시아 남하 저지전략으로 거문도 점거를 선택했다. 남진(南進)하는 러시아와 대영제국의 싸움이 한반도 거문도에서도 펼쳐진 것이다.

 

허를 찔린 러시아는 영국의 거문도 점령에 대해 민감한 반응을 보였다. 러시아는 블라디보스토크 항구에 들어오는 외국 선박을 격침하겠다고 선언했다. 러시아는 청나라가 영국의 거문도 점령을 시인한다면 러시아도 한반도의 제주도나 원산을 점령하겠다고 위협했다. 또 영국의 선제 행동에 대해 조선에 본격 출병을 할 수 있다고 으름장을 놓았다.

전쟁이 벌어질 경우 단순한 국지전이 아니라 글로벌 차원에서 사활을 건 거대한 전쟁으로 번진다는 엄중한 상황 앞에서 러시아 황제는 망설이지 않을 수 없었다. 결국 시간이 지나면서 영국과의 전면전만큼은 너무 무리하다는 생각에서 러시아 황제는 육군이 판데 너머로까지 행동하지 말라는 훈령을 내렸다. 그러나 영국 쪽에선 결국 러시아 육군이 판데를 넘어 아프가니스탄 쪽으로 침공할 것으로 내다보았고, 나머지 나라들도 그런 판단을 했다.

러시아는 조선 정부에 대해서도 영국에 항의할 것을 요구했다. 이에 조선 정부는 청나라를 통해서 영국에 항의하고 청나라 정부도 중간 알선에 나서게 되었다.

점령초 청은 러시아에 대한 방비와 조선에 대한 종주권을 국제적으로 보장받으려는 목적으로 영국의 거문도 점령을 묵시적으로 인정했다. 영국은 당초 청나라와 교섭하여 거문도를 조차할 계획이었으므로, 3월 14일에 거문도 협정안을 제시했다. 그러나 북양대신 이홍장이 이 사건으로 러시아와 일본이 각각 조선 내의영토점령을 요구하고 나설 경우 국제분쟁으로 커질 것을 우려해 영국의 거문도 조차에 반대하면서 조선정부에 통고했다.

이어 북양수사 제독 정여창에게 군함을 이끌고 조선으로 가 조선 정부가 신중히 대처토록 하고, 조선 관리와 함께 거문도를 방문해 영국군 동정을 살핀 뒤 나가사키로 가서 영국 제독과 만나도록 지시했다.

동시에 조선 이재황에게 서신을 보내 영국의 거문도 점령 경위를 설명하고 톈진 조약 체결을 통보했다. 서신 마지막 부분에서 이홍장은 조선이 군비(軍備)에 힘쓸 것을 당부했다. 당시 이홍장의 서신내용은 다음과 같다.

 

‘귀국의 제주 동북쪽으로 100여 리 떨어진 곳에 거마도(巨磨島)가 있는데, 그 섬이 바로 거문도(巨文島)입니다. 바다 가운데 외로이 솟아있으며 서양 이름으로는 해밀톤〔哈米敦〕섬이라고 부릅니다. 요즘 영국과 러시아가 아프가니스탄〔阿富汗〕경계 문제를 가지고 분쟁을 일으키고 있습니다. 러시아가 군함을 블라디보스토크(해삼위:海蔘葳)에 집결시키므로 영국은 그들이 남하하여 홍콩〔香港〕을 침략할까봐 거마도에 군사와 군함을 주둔시키고 그들이 오는 길을 막고 있습니다.

이 섬은 조선의 영토로서 영국 사신이 귀국과 토의하여 수군을 주둔시킬 장소로 빌린 적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잠시 빌려서 군함을 정박하였다가 예정된 날짜에 나간다면 혹시 참작해서 융통해 줄 수도 있겠지만, 만일 오랫동안 빌리고 돌아가지 않으면서 사거나 조차지(租借地)로 만들려고 한다면 단연코 경솔히 허락해서는 안 됩니다.

구라파(歐羅巴) 사람들이 남양(南洋)을 잠식할 때에도 처음에는 다 비싼 값으로 땅을 빌렸다가 뒤에 그만 빼앗아서 자기소유로 만들었습니다. 거마도는 듣건대 황폐한 섬이라 하니, 귀국에서 혹시 그다지 아깝지 않은 땅으로 볼 수도 있겠지만 홍콩 지구 같은 것도 영국 사람들이 차지하기 전에는 남방 종족 몇 집이 거기에 초가집을 짓고 산 데 불과하였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점차 경영하여 중요한 진영(鎭營)이 되었고 남양의 관문이 되고 있습니다. 더구나 이 섬은 동해의 요충지로서 중국 위해(威海)의 지부(之罘), 일본의 대마도(對馬島), 귀국의 부산(釜山)과 다 거리가 매우 가깝습니다. 영국 사람들이 러시아를 방어하기 위한 것이라고 변명하지만 어찌 그들의 생각이 따로 있지 않을 줄을 알겠습니까?

이토 히로부미는 이전에 나와의 담화에서 영국이 만약 오랫동안 거마도를 차지한다면 일본에 더욱 불리하다고 하였습니다. 만일 귀국이 영국에 빌려준다면 반드시 일본 사람들의 추궁을 받을 것이며, 러시아도 곧 징벌하기 위한 군사를 출동시키지는 않더라도 역시 부근의 다른 섬을 꼭 차지하려고 할 것이니 귀국이 무슨 말로 반대하겠습니까?

이것은 도적을 안내하여 문으로 들어오게 하는 것으로 이웃 나라에 대하여 다시 죄를 짓게 되며 더욱이 큰 실책으로 됩니다. 그뿐 아니라 세계정세로 보아서도 큰 관계가 있으니, 바라건대, 전하는 일정한 주견을 견지하여 그들의 많은 선물과 달콤한 말에 넘어가지 말기 바랍니다.

이제 정 제독(丁提督)에게 군함을 주어서 이 섬에 보내어 정형(情形)을 조사하게 하는 동시에 귀 정부와 함께 진지하게 토의하게 하니, 잘 생각해서 처리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고종 실록> 고종22년(1885년) 3월20일자

 

일본 대리공사 곤도 모토스케(近藤眞鋤)가 교섭통상사무아문(交涉通商事務衙門)의 독판(督辦) 김윤식(金允植)에게 회답편지를 보내왔다.

 

“비밀 편지를 받아보았습니다. 거문도(巨文島)에 대한 문제는 귀국의 국권(國權)에 관계되는 중대한 문제인 것 같습니다. 그래서 곧 영국 대신(大臣)의 비밀 편지를 보았는데 단지 만약의 경우에 대응하게 한 것이라고만 말하였습니다.

그러니 생각하건대, 영국이 방비하겠다고 말한 나라가 가령 귀국과 수호조약(修好條約)을 체결한 나라라면 관계되는 바가 더욱 크지 않겠습니까? 대체로 동맹한 각국 가운데서 만약 불행하게도 서로 관계가 나빠진 나라들이 생겨서 어느 한 나라가 귀국의 지역을 차지하고 만약의 경우에 대처하자고 할 경우에 귀국이 허락한다면 그 한 나라에는 이로울 것이지만 다른 한 나라에는 해로울 것입니다.

그러니 이는 관계없는 나라로서 서로 유지해 주고 서로 처리해 주는 방도에 어긋날 것 같습니다. 그러나 귀 대신이 영국 대신에게 귀국이 허락할 수 없을 뿐 아니라 다른 각국에서 요구한다 하여도 절대로 승인할 리가 없다고 대답한 것은 정말 지당한 말입니다.

이번에 영국의 이 행동에 대하여 우호 관계를 가지고 있는 각국에서는 귀국의 의사를 모르기 때문에 영국의 행동이 혹시 귀국의 허락 하에 나온 것이 아닌가 하고 의심할 수 있을 것입니다. 오늘의 계책으로서는 응당 영국에 통지한 내용을 우호 관계를 가지고 있는 각국에 통지하여 영국이 이 섬을 차지한 것이 귀국에서 윤허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면 각국에서는 의심을 저절로 풀 수 있을 것이고 공론(公論)이 귀결될 것입니다. 이 문제에 대하여 본 공사는 본국 정부의 훈령을 아직 받들지 못하였으므로 사적인 견해를 대강 밝혀 회답을 보내니, 귀 대신이 타당하게 처리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 <고종 실록> 고종22년(1885년) 3월29일자

 

■ 고래 싸움터의 새우, 약소국의 비애(悲哀)

 

당시 영국은 거문도 점거사실을 조선정부에 일방적으로 통보했다. 점거 이유로 ‘예측할 수 없는 일을 예방코자 거문도를 잠시 거수(居守)한다’는 것으로, ‘예방차원 선점 점령(preventive, preemptive occupation)’이라는 터무니없는 주장을 내세웠다. 약소국에 대한 일방적 주권 유린이었다. 이후 영국은 거문도 점령에 따른 주변국들과의 외교적 마찰 문제도 당사국인 조선은 제쳐두고 청나라를 통해 러시아와 협의를 진행했다.

조선 정부는 영국 부영사와 청나라 주재 영국 대리공사에게 강력히 항의하고, 또 미국 · 독일 · 일본에게 조정을 요청했다. 이에 각국 대표는 본국 정부로부터 훈령을 받지 못하여 명확한 답변을 할 수 없으나, 우선 조선과 영국 두 나라가 원만한 타협을 이루길 바랄 뿐이라는 회답을 보내왔다. 결국 조선정부는 사건해결에 주체적인 역할을 하지 못하고 청·영국·러시아 3국의 상호교섭에 의존하게 되었다.

 

한편, 조선은 4월 3일 정여창과 함께 의정부(議政府) 유사당상(有司堂上) 엄세영(嚴世永)과 교섭통상사무협판(交涉通商事務協辦) 묄렌도르프를 거문도 현장에 파견, 점령이유를 힐책했다. 이들은 당시 전라도 흥양(興陽: 현 고흥의 당시 지명)의 삼도(三島) 즉 거문도에 가서 영국 해군 함장인 막키이에게 불법 점거를 항의했다.

묄렌도르프는“영국 군함이 이 거문도에 깃발을 세워놓았다고 하므로 사람을 보내서 알아보려고 하던 차에 마침 중국 군함이 바다를 순찰하다가 마산포(馬山浦)에 왔으므로 조선국 임금이 정여창(丁汝昌)과 상의하여 윤선(輪船)을 붙여주어 왔습니다. 아까 보니 과연 귀 국의 깃발을 세워놓았는데 무슨 의도인지 알지 못하겠습니다.”고 항의했다.

이에 막키이는“이 깃발을 세운 것은 우리 수군 제독(水軍 提督)의 명령을 수행한 것입니다. 영국 정부에서 러시아가 이 거문도를 차지하려고 한다는 말을 들었기 때문입니다. 현재 영국이 러시아와 분쟁이 생길 기미가 있기 때문에 먼저 와서 이 섬을 잠시 지킴으로써 보호하는 데 도움이 되게 하려는 것입니다.”고 답했다.

묄렌도르프는“조선은 영국과 원래 우호조약(友好條約)을 맺은 나라이며 러시아와도 우호조약을 맺은 나라인데, 지금 귀 국의 군함이 조선 땅에 와서 국기를 세워놓는다는 것은 이치상 허락할 수 없으니, 귀 정부에 명백히 전달하여 이런 내용을 알게 한 다음 조선의 도읍에 들어가서 각국 공사(公使)들에게 조회(照會)하여 이런 내용을 알게 하여야 할 것입니다.”고 하자, 막키이가“나 역시 조선에서 이 일을 처리하기가 곤란하리라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원래 정부에 빨리 통지해야 할 것이었으나 우리 정부의 의사도 각하에게 명백히 알리지 못하였습니다. 나는 수군 제독의 명령을 받고 여기에 주둔하고 있으니 각하께서 나가사키(長崎島)에 가서 수군 제독과 상의하면 될 것입니다. 지난달 28일에 러시아 군함 1척이 여기에 왔는데 영국의 뜻에 대하여 많은 의혹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하였다.

이에 묄렌도르프가“귀 국이 조선 땅에다가 깃발을 세워놓은 것은 사리에 맞지 않습니다. 우리들은 명령을 받고 여기에 왔으므로 조사한 것을 즉시 돌아가서 우리 임금에게 보고할 것이니, 각하도 이 내용을 가지고 귀 수군 제독과 상의한 다음 빨리 귀 정부에 알려서 속히 처리해야 할 것입니다.”하자, 막키이는“그렇습니다. 모레 나도 나가사키에 가려고 합니다. 이 달 초하룻날에 영국에서 전보가 왔는데 영국 정부가 러시아 주재 영국 공사와 아프가니스탄 사건을 논의하고 해명하였다고 하였습니다. 우리 군함도 이제 분쟁한 일이 없었다는 것을 본국에 보고하겠습니다.” 고 답했다.

 

엄세영과 묄렌도르프는 곧바로 나가사키로 가서 영국측과 외교교섭을 추진했다. 4월 6일 영국의 수군 제독(水軍提督)에게 편지를 보냈다.

 

“우리나라 대군주(大君主)께서는 아세아 동부 해상에 주둔하고 있는 귀 국의 병선(兵船)이 우연히 우리나라 거문도에 이르렀다는 소식과 아울러 귀 제독이 거문도에 주둔하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그리하여 우리나라 대군주께서는 중국의 제독 군문(軍門) 정여창(丁汝昌)이 2척의 군함을 가지고 바다를 순찰하다가 마산포(馬山浦)에 이르렀다는 것을 아시고, 우리나라 대군주께서는 군문 정여창에게 우리나라에 특파(特派)한 관원들을 데리고 섬에 가서 정형(情形)을 조사하여 보라고 특별히 청하였습니다. 우리들은 해도에 당도하여 즉시 귀 국의 병함(兵艦) 6척과 상선(商船) 2척이 해도 안에 정박하고 있는 것을 보았으며, 동시에 해도의 높은 산꼭대기에 귀국의 깃발이 세워진 것을 보았습니다. 본관(本官)들이 곧 귀 국의 비어선(飛魚船)에 가서 그 까닭을 물으니, 그 선주(船主)가 말하기를, 이 것은 바로 귀 제독의 명령을 받은 것이라고 하면서 귀 제독이 현재 일본 나가사키에 머물러 있다고 하였습니다. 본관들은 다시 군문 정여창과 가부를 토의하고 나가사키에 가기로 하였는데 다행히 임금의 윤허를 받아 이달 5일 아침에 나가사키에 도착하였고, 본관들은 그 즉시로 귀 제독을 면회하였습니다. 면담한 여러 가지 건(件)은 다 주상(主上)의 명령을 받은 것이므로 귀 제독의 대답을 청합니다. 이미 우의(友誼)를 맺은 나라인데 벗이 된 나라의 땅을 점령하고 있는 것은 누구의 명령에서 나왔으며, 또한 무엇 때문입니까? 엄세영과 묄렌도르프인 본관들은 귀 제독이 즉시 처리하여 조약관계가 있는 각 나라들로 하여금 거문도가 조선국의 땅이라는 것을 모두 알도록 하는 것이 타당하다고 생각합니다. 이 편지를 살펴보고 회답해 주기 바랍니다.”

 

4월 10일 미국 대리공사 푸우트가 통리교섭통상사무아문(統理交涉通商事務衙門)에 보낸 회답 편지에,“거문도인 해밀턴 섬 문제에 대하여 조선 정부에서는 몹시 경계하고 있는데, 나의 생각에는 영국이 해밀턴 섬을 영원히 점령하려는 것이 아니며 영국 정부도 이 섬을 이용하자는 의사가 없다고 봅니다. 지금 북경(北京)에 있는 영국 공사 편지를 보니, 그 의도가 조선의 영토를 점령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고 오직 자신을 방어하는 데 이용하려는 것일 뿐입니다. 지금 영국이 군함(軍艦)을 거문도에 보냈으나 아직 한 번도 조선에 대한 우의(友誼)를 저버리려는 의사가 없었으니, 조선 정부도 영국의 행위에 대하여 강력히 규탄할 수 없다고 봅니다. 바로 지금 영국과 러시아 간에 사변이 생길 것인데 러시아가 만약 영국에서 해밀턴 섬을 점령하여 지키고 있다는 말을 듣는다면 러시아도 역시 여기에 뜻을 둘 것이니, 각하(閣下)는 블라디보스토크 해군 사령장관(海軍 司令長官)에게 편지를 보내 각하의 본의를 표시해야 할 것입니다. 사령 장관이 만약 긍정적으로 검토한다면 더욱 축하할 만한 일입니다. 각하가 이 중대한 문제에 대하여 문의하여 주었으니, 우리 정부도 이 문제에 대하여 우의를 다할 것입니다.”고 하였다.

5월 25일 고종은 “거문도를 다른 나라 사람이 제멋대로 차지하고 아직 철수하지 않으니 참으로 개탄할 일이다.”고 하며 대책을 논의했으나 병력도, 재정도 열악한 조선 정부로서는 속수무책이었다. 고종의 한탄에 심순택이“영국과 러시아가 서로 버티다 보니 그렇다고 들었는데, 아직 언제 철수할지 알 수가 없어 매우 걱정입니다.”고 하였다.

 

“요즘 영국과 러시아가 아프가니스탄 경계 문제로 분쟁이 일어나게 되어 러시아 군함이 블라디보스토크에 집결되자 영국 사람들은 그들이 남쪽으로 내려와서 홍콩을 침략할까봐 동양함대를 파견하여 3월 초하루에 거문도를 검거한 다음 포대를 쌓고 그들이 오는 길을 막았다.”

 

조정대신들이 모여 갑론을박, 첩보수준의 설왕설래만 있을 뿐이었다.

 

조선을 청나라 속국으로 파악하고 있던 러시아는 청나라에 거문도 불법점거 사건 중재를 요청했다. 당시 방대한 해외식민지를 바탕으로 성립된 대영제국은 식민지를 연결하는 교통로가 생명선이었기 때문에 러시아의 남하와 해양진출을 저지하는 것이 통상과 교역의 자유를 확대하는 첩경이었다.

반면 러시아 역시 발칸반도에서 터키의 억압을 받고 있는 기독교인들을 보호하고, 연해주의 발전을 위해 접경국 조선과의 통상증진을 모색한다는 목적을 가지고 발칸반도와 한반도로 남하하면서 유라시아 대륙 전반에 걸친 영·러 대립구도가 성립되었다.

러시아 해군상 쉐스타코프 제독은 아프가니스탄 국경문제를 둘러싼 영·러 대립을 해결함으로써 거문도 사건의 해법을 찾고자 했다. 그는 거문도를 직접 시찰하여 영국의 제독들과 소통한 경험 그리고 한반도 항구들을 탐사한 결과에 따라 한국에서 부동항 획득을 포기하기로 결정했다. 특히 러시아 연해주 지역을 방어하는 러시아 군사는 1만8천 명 정도로 빈약했다. 러시아 극동해군도 영국 함대에 대항하기에 역부족이었다.

 

영국도 서울주재 영국총영사 W.G. 에스턴을 통하여 협상을 조선에 제의했다. 즉 거문도를 영국의 급탄지로서 임차교섭을 하되 금액은 1년에 5,000파운드 이내로 하고 싶다는 것이었다. 거문도 점령에 대한 비난이 고조됨과 동시에 4월말부터 아프가니스탄 문제에 관한 영국·러시아 간의 긴장이 완화되고, 8월 2일 아프가니스탄 협정이 조인되자 영국은 거문도점령의 명분이 없어졌다.

 

영국 해군도 거문도가 군항 내지 급탄소로서 적당하지 못하다는 결론을 내리고, 외무성의 정치적 타결만을 기다리게 되었다. 국제동향을 예의주시하던 영국 외상 로즈베리는 1886년 3월 다른 나라들이 거문도를 점령하지 못하도록 하는 보장만 해주면 거문도에서 철수할 의사가 있음을 밝혔다. 그해 8월 28일과 9월 2일에 열린 회담으로 청의 이홍장과 주청 러시아 공사 라디젠스키는 영국군이 거문도에서 철수한다면 러시아는 조선영토를 침범하지 않겠다는 3개조의 조회장(照會章)을 공동으로 발표했다.

영국 주요 언론들이 연일 러시아와 전면전이 불가피하다고 보도하는 가운데 영국과 러시아의 전쟁위기가 고비를 넘기면서 아프가니스탄 판데 사건을 둘러싼 영국과 러시아는 길고 긴 협상에 들어갔다. 1887년 여름, 판데를 중립 지대로 남겨 둔다는 데 9월 10일 협상이 타결, 아프가니스탄 판데 사건을 마무리 지었다. 그러나 아직도 아프가니스탄을 둘러싼 열강들의 각축은 지금도 현재 진행형이다.

한편 영국과 러시아 협상이 조인됨에 따라, 청나라의 이홍장은 이때가 거문도 문제를 해결할 적기로 판단해 적극 중재에 나섰다.

그 결과 이홍장은 청나라 주재 러시아 공사로부터 ‘러시아는 한국의 영토를 어느 지점도 점령하지 않겠다’는 약속을 받아 영국에 통보했고, 1887년 2월27일(고종 24년), 22개월여 만에 영국 함대는 거문도에서 철수했다. 거문도 사건은 한반도 주변국들의 외교 전략에도 크고 작은 영향을 미쳤다.

판데 사건 등 러시아 남진에 골머리를 앓던 영국은 동북아에서 1902년 일본과 전략적 동맹을 맺어 러시아 견제를 위한 동맹국을 확보했다. 일본 또한 러시아를 제어할 영국과 합력하면서 조선반도 병탄을 위한 국가전략 실천에 한걸음 다가갔다. 영국도 후유증이 컸다. 판데 중립지대화 합의로 사건은 종결됐으나 영국 국민들은 강경론을 부르짖던 보수당에게 몰표를 던져 정권이 뒤바뀌었다.

 

거문도 사건은 한국사 및 동아시아사적 사건인 동시에 세계사적 사건

 

한반도를 둘러싸고 발생한 거문도 사건은 해양세력과 대륙세력이 대결하는 동아시아판 그레이트 게임 개시를 알리는 서막이었으며, 한국사 및 동아시아사적 사건인 동시에 세계사적 사건이었다. 조선문제는 지역 문제를 넘어, 영·러의 그레이트 게임의 일환으로 국제 문제로 전환되었다.

방아(防俄)를 친아(親俄)로 해서 청나라와 일본을 견제하려던 조선책략적 이이제이(以夷制夷)의 역학구도속에서 추진된 한·러수호조약과 한·러밀약은 시효가 끝나 러시아의 극동전략 수정이 불가피했다. 러시아는 거문도사건을 계기로 한·러관계 및 극동정책을 전반적으로 재검토하게 된다.

영국함대의 거문도 주둔 사건으로 블라디보스토크 해군기지가 위협받는 상황을 고려, 한반도에서 부동항 확보가 어렵다고 판단한 러시아는 모스크바와 극동 아시아 육로 연결을 위한 시베리아 철도 건설을 구상하게 된 것이다.

1800년대 중앙아시아 여러 나라들을 확보하고 부동항을 찾아 인도로 진출하기 위해 아프가니스탄까지 넘보던 러시아 제국은 서쪽의 폴란드에서 동쪽 캄차카 반도까지 세력권에 넣었다. 그러나 판데사건으로 인도로 나가는 길이 좌절된 러시아는 블라디보스토크에 이르는 장대한 시베리아 횡단 철도를 놓으면서 극동지역에서의 영향력을 계속 굳히려는 국가전략을 추진했다.

시베리아 횡단철도가 완성되면 거대한 병력과 물자를 단기간에 신속하게 이동하고 배치할 수 있게 된다. 사실상 이로서 조선을 노리던 일본과 러시아는 대결이 불가피해졌다.

러시아 극동전략 수정의 단초는 라디겐스키 협약과 극동문제 특별회의였다. 텐진협약과 특별위원회의 구상은 그레이트 게임의 차원에서 보면, 러시아의 한반도에서 현재적 우위를 확보키 위한 전략으로서 타당성이 있었다. 하지만 다른 한편, 일본의 외교, 군사적 행보와 연계하여 본다면, 한반도에서의 러·일의 공조는 물 건너간 사안이었다. 왜냐하면 텐진협정으로 러·청 공조체제가 구축됨에 따라 일본의 한반도에서의 대청, 대러 견제력이 상실되고 말았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러시아가 대 조선 정책을 구상하고 있던 시기에 일본은 생존을 위한 자구책을 구상해야만 했다.

러시아의 시베리아 철도 건설 계획이 구체화 되자 이번에는 일본에 비상이 걸렸다. 시베리아 철도가 완성되면 유럽에서 극동까지 배로 45일 걸리던 이동이 철도로는 18일로 단축되기 때문이었다, 일본 군부는 “우크라이나 초원에서 풀 뜯던 기병대가 열차를 타고 3주 후면 헤이롱 강(黑龍江) 물을 마실 수 있게 되었다”면서 러시아의 동진(東進)에 대한 대책 마련에 부심했다. 뒷날 일본은 청·일전쟁에서 승리했으나 러시아 등 3국간섭으로 이 같은 우려는 현실화됐다. 승리 대가로 요동반도를 할양받았으나 프랑스와 독일까지 가세할 경우 일본 단독으로는 러시아와 맞설 자신감이 도저히 없었다.

 

이에 러시아가 만주와 한반도를 지배하는 것을 전략적 차원에서 용납할 수 없었던 영국의 이해가 들어맞은 결과 1902년 영·일 동맹이 체결되었다. 영·일 동맹은 일본이 러시아와 싸우게 될 때 만일 독일이나 프랑스가 러시아 편을 들어 전쟁에 개입할 경우 영국도 일본 편을 들어주겠다는 것이었다.

그 이면엔 미국도 영국 편을 들기로 되어있었다. 일본이 러시아와 싸운다 해도 독일과 프랑스가 함부로 나설 입장이 아니었고, 일본은 마음 놓고 러시아에 선제공격을 가할 수 있었던 것이 러·일 전쟁이었다.

바로 이 러·일 전쟁 이후 조선은 을사늑약을 맺어 일본 보호국으로 전락하게 된다. 거문도 사건의 여파는 이처럼 조선에 크고 작은 영향을 미치며 결국 일본의 조선 병탄의 전주곡이 된 셈이다.

 

1868년 메이지 유신으로 개방과 개혁으로 세계 5대강국이 된 일본은 국민개병제(國民皆兵制) 등 서구의 군사제도인 징병제도를 도입하여 끊임없이 군비확장을 국책으로 추진하였다. 이런 막강한 국력을 바탕으로 조선을 병탄할 기회를 노리고 있었다.

거문도에서 영국군이 철수한 2년 뒤, 1889년 발포된 이토 히로부미의 메이지 헌법에 따라 구성된 제1의회 중의원(衆議院)에서 1890년 12월 6일, 총리대신 야마가타 아리토모(山縣有朋)가「주권선(主權線)」,「이익선(利益線)」을 개념화한 외교정략을 담은 국가전략 구상을 밝힌 시정방침 연설은 바로 이 같은 문제의식에서 출발했다.

 

“생각건대, 국가독립 자위의 방도에 두 길이 있는데, 첫째로 주권선을 수호하는 것, 둘째로 이익선을 보호하는 것이다. 그 주권선이란 나라의 강역(疆域)을 말하고, 이익선이란 그 주권선의 안위에 밀접한 관계가 있는 구역을 말하는 것이다. 대체로 나라로서 주권선 및 이익선을 갖지 않는 나라는 없지만, 현하 열국(列國) 간에 들어서서 일국(一國)의 독립을 유지하는 데는, 단지 주권선을 수호하는 것만으로는 결코 충분하다고는 말할 수 없는 것으로, 이익선도 반드시 보호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으로 안다.”

 

독립자위(獨立自衛)를 위해서는 자국(自國)의 주권선 뿐만 아니라 안보상 밀접한 관계에 있는 이익선 까지 방어해야 한다는 얘기다. 일본 육군의 아버지와 군략가로 평생 이토와 라이벌 관계에 있었던 야마가타는 조선을 이익선으로 설정한 것이다. 주권선은 절대로 침해당해서는 안 되는 주권영역인 일본의 국경을 뜻하고, 이익선은 주권선의 안위와 밀착관계에 있는 구역, 곧 일본의 이익과 관계되는 경계선인 한반도를 의미했다.

일본은 이익선인 조선이 침범되면 주권선인 일본열도도 위험해진다고 보고, 1888년 1월, 대정부 의견서에서 일본 국방상의 주적을 러시아로 상정했다. 코르프-지노비에프회담에서 한반도정책을 구안(具案)한 바로 이듬해인 1889년에 일본은 종래의 조선정책을 전면 수정하고 마침내 대러 강경방침을 확정하기에 이르렀던 것이다. 내면적으로는 러시아와의 대결을 불가피한 것으로 생각하고 있어 일·러 전쟁의 씨앗이 잉태되고 있었다.

 

거문도 사건 당시 중개역할을 했던 청나라는 영국 철수를 자신들의 노력에 의한 것으로 주장하며 조선에 대한 종주권을 내세워 내정간섭은 더욱 심화되었으며, 조선의 국제적 위상은 한없이 추락했다. 이 사건 이후, 조선의 자주외교 노력이 강화되고 일본과 미국에 최초로 공사관이 개설됐다.

19세기 후반 세계적 차원에서 대결하던 영국과 러시아가 한반도에서 충돌함으로써 전통적 동북아 국제질서 재편을 결과했고, 조선을 본격적인 국제정치의 틀로 편입시켰다. 주변국인 청과 일본, 러시아의 대립은 물론 거문도 사건이후 미국, 독일 등의 서구열강의 동아시아 이권쟁탈과 맞물리면서 조선은 열강들의 각축장이 되었다. 결국 영국의 불법적인 거문도 점령은 외세에 의한 한국 강점의 시발점이 된 셈이다.

 

1885년 거문도 사건, 2017년 북핵(北核)사태

 

당시 조선은 청의 압박, 일본의 후퇴, 영국의 도발, 러시아의 등장, 미국의 회피 등 시시각각 변하는 정세 속에서 살얼음판을 걷는 처세로 위기에 대처하지만 사양길에 접어든 국운을 만회하기가 쉽지 않았다. 130년이 지난 현재도 같은 상황이 반복되고 있다.

19세기 말부터 21세기 초까지 무려 3세기에 걸친 시차에도 불구하고 대륙세력과 해양세력으로 양분된 강대국 간 알력의 틈바구니에서 일본이 영악하게 반사이익을 누리는 구조가 반복되고 있다. 특히 북한 핵으로 촉발된 사드 문제를 보면서 해양세력인 미·일 공조 동맹이 강화되고, 일본은 북한 핵무장을 계기로 헌법 개정을 통해 전쟁을 할 수 있는‘보통국가’로의 진로수정 등 한반도 주변의 긴장을 최대한 효율적으로 활용하고 있다.

대륙세력인 중국과 러시아는 사드 배치를 국가적 위협으로 간주하고, 연합전선을 펴는 형국이다. 특히 중국은 무역보복, 김치논쟁 등 신경질적 반응을 보이면서‘군함도’영화제작비 50억 지원, 위안부 지원문제 등, 결과적으로 갈등을 부추기는 한-일간 이간책을 국가전략으로 작동시키고 있다. 결과적으로 사드가 배치된 일본은 미-중 갈등을 최대한 국익에 도움이 되도록 활용, 미국과 밀월관계를 유지하면서 경제적으로 20년 장기불황에서 탈출하는 등 유리한 상황이 조성되고 있는 현실이 안타까울 뿐이다.

북한이 불법적으로 핵무장했으나 핵 국가로 공인이 불가피한 상황이 될 만큼 한반도를 둘러싼 군사지형이 급변, 이미 군사적 균형이 깨졌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분석이다. 북한이 핵을 확보함으로서 남북의 전략적 불균형으로 이제 북한에 끌려 다니는 신세로 전락했다는 것이다.

북한은 2013년 2월 12일 제3차 핵실험을 실시한 후“소형화·경량화된 원자탄을 사용했고, 다종화(多種化)된 핵 억제력의 우수한 성능이 물리적으로 과시됐다”고 자평했다. <2014 국방백서>에서도“북한은 40여㎏의 플루토늄을 확보한 것으로 추정되고, 소형화도 상당한 수준에 이른 것으로 보인다.”고 평가했다. (국방부, 2014).

2015년 2월24일, 북한전문 웹사이트인‘38 노스’를 운영하는 조엘 위트(Joel Wit) 미국 존스홉킨스대 초빙연구원은 북한이 보유한 핵무기 규모를 10∼16개로 전제하면서 2020년까지 최대 100개까지 증대시킬 것으로 전망했다. 이제 북한은 핵무기의‘소형화・경량화’는 달성한 상태에서 그 종류와 수를 늘리는‘다종화(多種化)·다수화(多數化)’를 추진하고 있는 것으로 전문가들은 파악하고 있다.

냉전 초기 미·소 관계가 험악했던 시절,“핵전쟁에서 핵 비소유국은 항복하거나 전쟁으로 잿더미가 되어 패망하는 길밖에 없다”던 미국의 정치학자 모겐소(H.Morgenthau)의 지적은 가공할 핵무기의 위험성을 지적한 말이다.

“핵전쟁을 감행할 바에야 미리 항복하는 길을 택해야 한다.”는 말로 세상을 놀라게 A. 토인비 말을 상기하면, 한반도에서 핵 인질이 돼버린 대한민국 국민으로서는 모골이 송연해질 따름이다.

 

핵개발을 '국가대전략'으로 채택, 30여 년간 세계를 우롱하며 비밀리에 추진해온 북한의 비대칭전력의 최고 수단은 당연히 핵무기다. 그들이 핵무기를 실전배치하는 순간 남북한의 군사적 균형은 단숨에 무너진다. 한국이 지난 20여 년간 유지해 왔던 군사 기술적 우위는 순식간에 물거품이 되는 것이다. 북한이 어떤 논리를 내세워도 우리는 거기에 따라야 하는 굴욕적인 순간이 눈앞에 다가오고 있다.‘한강의 기적’이 서서히 무너지면서 북한에‘대동강의 기적’이 일어나는 순간을 상상해 보았는가.

지난 9월3일, 북한은 6차 핵실험을 통해 수소탄 완성을 주장했다. 북한을 과소평가하는 이들도‘북한이 증폭핵분열탄처럼 원폭과 수폭 사이의 핵폭탄을 개발했다’고 평가한다. 주목받게 된 것이 북한이 핵탄두를 사드로 요격하기 힘든 100여km 이상의 고공에서 터뜨려 EMP(Electromagnetic Pulse effect) 공격을 가하는 것이다.

북한이 EMP 효과가 극대화하도록 수소탄이 든 핵탄두를 터트린다면, 그 효과는 수소탄두가 터진 곳에서 지평선이 보이는 곳까지 미친다. EMP 효과는 직선으로 나가니 지평선 너머로는 영향을 거의 끼치지 못하는 것이다. 따라서 피해 지역을 넓히고 싶다면 더 높은 고도에서 터뜨리면 된다.

 

북한이 자신의 생존이나 결정적 이익이 위협받을 경우 핵무기를 사용할 가능성은 배제할 수 없다. 이러한 우려를 바탕으로 2006년 북한이 제1차 핵실험을 실시한 이후부터 북한의 핵무기 위협과 대응에 대한 국내 연구는 지속적으로 증대돼 왔다.

학자들은 2009년 북한의 제2차 핵실험 전후까지 북한의 핵무기 개발의도와 전략을 분석하고, 세계적 비확산 정책과 미·중의 대한반도 전략에 미칠 영향과 이들을 통한 외교적 대응책을 집중적으로 논의했다. 북한의 핵무기는 연구와 토론의 단계를 단숨에 뛰어넘어 실전배치 단계로 접어드는데 우린 아직도 토론만 계속하고 있는 실정이다.

물론 한미 양국의 대규모 응징보복에 의해 정권은 물론이고, 국가도 붕괴될 수 있다는 점에서 북한도 섣불리 핵무기를 사용할 수는 없겠지만, 기술적으로는 핵무기를 탑재한 탄도미사일, 즉‘핵미사일’로 한국을 공격할 수 있다고 봐야 한다.

사용 가능성에 있어서도 2013년 3월27일 북한은 전략로켓트군과 야전포병 군을 ‘강력한 핵 선제 타격이 포함된 1호 전투근무태세’로 진입시키기도 했고, 2013년 4월1일 ‘자위적 핵보유국의 지위 공고화’에 대한 법을 통과시켜 핵무기 사용을 위한 지침을 제정한 바 있다. 2014년 11월23일 “이 땅에 핵전쟁이 터지는 경우 과연 청와대가 안전하리라고 생각하는가”라면서 공개적으로 우리를 위협한 적도 있다.

 

■ ‘투키디데스 함정(Thucydides Trap)’

 

최근 수소탄까지 개발한 것이 인정되는 북한 핵을 둘러싸고 전운이 감도는 한반도 상황은 이른바‘투키디데스 함정’에 빠진‘역사의 반복‘을 생각게 한다.

기원전 5세기 기존 패권국 스파르타에 급부상한 신흥강국 아테네의 도전으로 벌어진 아테네와 스파르타 간 펠로폰네소스 전쟁을 기록한 그리스 역사가이자 장군이었던 투키디데스는‘신흥강대국이 기존 세력판도를 뒤흔들면 양측이 무력충돌로 치닫게 된다.’고 분석했다. 전쟁 원인을 예언이나 도덕문제, 우연이 아닌 국제적 문제로 파악한 것이다.

여기에 착안해‘투키디데스 함정(Thucydides Trap)’이란 용어를 만든 하버드대 국제문제연구소 벨퍼 센터의 그레이엄 앨리슨 소장은 미-중 정상회담 직전인 지난 4월2일 WT 칼럼에서 이렇게 경고했다.

 

“미국의 세계 경제생산 비중은 1980년 22%에서 오늘날 16%로 떨어진 반면, 중국은 같은 기간에 2%에서 18%로 증가했다. -- 신흥강대국 중국과 패권국 미국의 대립과 대치는 향후 수년간 고조되는‘투키디데스 함정’에 빠질 것이다.”

 

국제적인 안보전문가로 널리 알려진 앨리슨 소장은“지난 500년 동안 세계에서 지배적인 국가의 위치는 16번 붕괴했으며 그중 12건은 전쟁이라는 수단을 통해서였다”며“냉전시대 미·소 관계, 20세기 초 미·영 관계 등 무력충돌을 피한 4번은 도전하는 국가와 도전받는 국가의 태도와 행동에 엄청난 조율이 있었기에 가능했다”고 말했다.

그는‘중국의 꿈’(中國夢)을 내건 시진핑과‘아메리카 퍼스트(미국 우선주의)’로 당선한 트럼프는 무역 갈등, 대만독립, 북핵 등 3가지 국제적 이슈가 상대국이 자신들의 핵심 야망을 달성하는 데 최대 장애물이라고 간주하고 있으며, 이로 인해 누구도 원치 않는 양국의 전쟁 발발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고 주장했다. 이어 “미·중 두 강대국이 이 대결을 관리할 수 있을지는 현재로선 트럼프와 시진핑 두 지도자에게 달려 있다”고 강조했다.

최근 정세와 관련, 트럼프는‘북한은 전쟁을 구걸하고, 한국은 북한에 대화를 애걸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북핵과 사드를 놓고 대립하는 남북 대결은 100여 년 전의 조선반도에서 벌어졌던 것처럼, 대륙세력과 해양세력 전초기지인 한반도를 결과적으로 미·중 대리전쟁 격전장으로 만들 가능성이 커지고 있다.

최근 한반도 정세와 관련, 미·중 패권 다툼이‘투키디데스 함정’으로 빠져들고 있는 극동에서 최근 벌어지는 외교 참사에 대해 야당 측은 외교 색맹(色盲)이 된 집권층 무능을 지적하고 있다.

북핵의 실전배치 등, 핵 개발을 둘러싼 갈등은 더 이상 방치할‘시간이 없다’는데 문제의 심각성이 있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트위터를 통해 10월 13일, 7일, 1일 북한과의 핵 협상은 ‘바보짓’이고 ‘시간 낭비’라며 북한과의 협상 무용론을 거듭 역설했다.

마이클 폼페이오 미 중앙정보국(CIA) 국장도 10월 19일(현지 시각) 워싱턴 DC에서 열린 국가 안보 포럼에 참석해 "북한이 몇 달 안에 미국을 타격할 핵미사일 능력을 완성할 것"이라고 경고했다고 CNN 등이 보도했다. 폼페이오 국장은 이날 "북한은 목표로 하는 능력에 충분히 근접했다"며 "미국은 북한의 핵미사일 능력이 정점에 이르렀다는 가정 아래 정책적으로 대비해야 한다"면서 "구체적으로 몇 달 뒤 김정은이 핵무기를 완성할지를 따지는 것은 무의미하다"며 "지금은 (북한의)'마지막 단계'를 어떻게 멈출지에 대해 생각할 때"라고 했다.

맥매스터 국가안보회의(NSC) 보좌관도 이날 같은 포럼에서 "(북한 핵무기에 대비하는 데) 아직 늦지는 않았지만 시간이 다 돼가고 있다"고 했다. 북핵 문제와 관련, 우리로서는 자주국방까지 준비하기엔 시간이 너무 없다.

결국“동아시아 근현대사에 나타난‘시간과의 경쟁’이 상호간의 이해와 공존을 가로막았다.”(고 민두기 박사)는 지적은 열강 동맹국들과 한국 사이에 북핵을 둘러싸고 벌어지고 있는‘시간과의 경쟁’으로 재현되고 있다.

 

 

■ ‘연작처당(燕雀處堂)’교훈

“소련에 속지 말고, 미국을 믿지 말고, 일본이 일어서니, 조선사람 조심해라.”

 

기원전 236년, 중국을 최초로 통일한 진(秦)나라가 대군을 이끌고 조(趙)나라를 침공했을 때였다. 이웃나라 위(魏)나라 조정에서 대책회의가 열렸다. 한 대신이 나서서 진나라와 조나라의 전쟁에서 누가 이기든 위나라한테는 이로울 뿐이라고 말했다. 진나라가 승리하면 진나라와 화친을 하고, 진나라가 패배하면 그 틈을 타서 진나라를 쳐서 이길 수 있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위나라 재상 자순(子順)은“탐욕스런 진나라가 조나라를 정복한 뒤, 분명히 우리나라도 공격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면서 위나라의 대처가 집에 불이나 대들보를 태워도 불구경하며 재질거리는 제비와 참새 같다고 질타하였다.

 

“제비나 참새는 모두 대들보 아래 둥지를 틀고 새끼를 키운다. 그런데 어느 날 마루와 추녀에 불이 났는데도 설마 대들보까지 오겠느냐며 그냥 머물러 있었다. 결국 둥지는 불길에 휩싸이고 만다. 진나라는 탐욕스런 나라로, 조나라를 이기면 위나라로 쳐들어올 것이 분명하다. 불길이 추녀까지만 오고 대들보에 이르지 않을 것으로 여기는 게 제비나 참새의 생각과 뭐가 다른가.”

 

이 고사(故事)에서‘처마 밑에 사는 제비와 참새’라는 뜻의‘연작처당(燕雀處堂)’이란 말이 생겼다. <공총자(孔叢子)>의‘논세(論勢)편’에 실려 있는 고사성어로‘편안한 생활에 젖어있으면 위험이 닥쳐오는 줄 모른다’는 점을 비유한말이다.

 

“오대주(五大洲) 사람들이 다 조선이 위태롭다 하는데, 조선인들만 절박한 재앙을 알지 못하니, 집에 불이 난지도 모르고 재재거리는 처마 밑 제비나 참새 꼴과 무엇이 다르겠소.”

 

1880년 청나라 외교관 황준헌이 국제정세에 무지한 조선왕조 당국자들에게 <조선책략> 마지막에 적은‘연작처당(燕雀處堂)’의 경구는, 한 세기를 훌쩍 넘어 핵실험이 자행되고 있는 오늘 우리의 상황에 비수(匕首)처럼 꽂힌다.

최근 미국과 북한 정권간의 전쟁위기로 치닫는 ‘치킨게임’을 바라보며, “소련에 속지 말고 미국을 믿지 말고 일본을 잊지 말고 조선사람 조심해라.”말이 새삼스럽게 들린다. 1945년 광복된 한반도 민중들 사이에 회자됐던 4행시다.

국가적 위기에 처한 우리가 당면한 현실은, 그 누구도 아닌 우리 모두의 책임이다. 정신 바짝 차리지 않으면 또 다시 100여 년 전 망국(亡國)의 비극을 면치 못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천하가 흥하고 망하는 것은 보통사람도 책임이 있다.”는 천하흥망 필부유책(天下興亡 匹夫有責)이 실감나는 대목이다.

100여년 전 국제 정세가 조선이라는 나라의 의지와 무관하게 조선이라는 나라의 운명을 결정지었듯이, 최근 국제정세 흐름을 보면 한국이라는 나라의 의지와 무관하게 대한민국 운명이 결정되는 게 아닌가 하는 의구심이 든다. 국력이 나약하면 우리 스스로의 운명을 결정하는데 아무런 역할을 할 수 없다. 기우(杞憂)이길 바라지만 2017년 가을, 한반도에서 벌어지고 있는 위기신호가 불길한 예감으로 다가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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